[수행법]서울 지역의 만일염불회
2008. 7. 20. 13: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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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파(http://cafe.daum.net/amitapa/) 서울 지역의 만일염불회
[고양군 흥국사 만일회(1904년 11월)]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기의 내용이다.
고종 갑진년 11월 단월이 열 가지 원을 세워 만일회를 창설했다. 만일회라는 것은 백련사(白蓮社)의 다른 이름이다. 살피건데 30년 염불회는 향화의 인연이다. 대중이 혜월공을 선출하여 연사(蓮社)의 화주가 되었다. 다음 해는 진관사 해송공을 맞아 연사의 화주로 모셨다. 생각컨데 해송공이 청중과 더불어 연사를 체결하여 이끌어 오니 26년 심안이 부동하여 함께 부처님의 명호(나무아미타불)를 염송하니 몇 만 편인지 알 수 없다.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니 과(果)가 경에서 설한 바와 같았다.
[화계사 만일염불회(1910년 12월)창설]
경술년 겨울인 11월 월해화상(越海和尙)이 주관하여 뜻을 함께한 월초(月招) 포응(抱應) 동화(東化) 제공(諸公)이 협력하여 화엄산림(華嚴山林)을 하기로 의논하고 각자가 힘을 따라 혹은 재물을 내고 혹은 시주자를 모집했다.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東華寺) 월제화상(越薺和尙)이 회주(會主)에게 80권 화엄경(八十券華嚴) 일부(一部)를 가져와 초하루부터 열흘 동안 밤낮으로 강설하여 환희에 찬 회향을 하였으니 실로 말세중에 드문 일이었다.
원유화상(爰有和尙)은 호(號)가 월명(越溟)이다. 어려서 머리를 깎고 입산하여 염불(念佛)로서 근본을 삼고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구하길 50년이었다. 홀연히 금년 겨울 병고가 들어 사대(四大)가 온전치 못하므로 스스로 목숨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한날 저녁 월해화상(越海和尙)을 불러 말하였다.
“스님과 나는 승가의 형제이니 나의 뒷일을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본인이 금년에 70살인데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명(命)이 다한것 같습니다. 평생 수용하고 있는 논이 양양(襄陽)에 있는데 몇 백 두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속간에 남겨온 재물이 아니라 본인이 입산 후에 빈손으로 이루어 근근히 생계를 도와 온 물건입니다. 어떻게 하면 옳겠오” 하였다.
월해화상(越海和尙)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회주(會主) 월제화주(月薺化主), 월초(月初) 포응(抱應) 동화제공(東化諸公) 스님이 역시 한자리에 있다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스님이 예로부터 염불(念佛)로써 날마다 공부의 업(業)을 삼았으니 만일염불인(萬日念佛人)들의 월료(月料)에 쓰인다면 곧 비록 천만년에 이르러도 염불(念佛)의 금고(金鼓) 소리가 도량에 그치질 않을 것입니다. 단지 만인에 염불을 권할 뿐 아니라, 역시 화상의 몫은 비록 서방으로 돌아가지만 이름은 본산(本山)에 머물러 가히 흐르는 향기가 백세(百世)에 이른다 할만하니 어찌 이 세간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곧 사람은 황천에 가고 재물은 허무로 돌아갈 것이니 원컨데 화상은 깊이 살펴주소서” 라고하니, 이에 화상이 크게 깨우쳐 논 문서를 사중(寺中)에 송두리째 드렸으니 헌신짝을 버리는 것 같았다.
만약 숙세에 선근의 깊고 두터움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평생 사랑하고 아끼던 재물을 일시에 헌납하는 것이 그 어찌 이와 같겠는가(하략) 석존강탄후 2937년 경술(음) 十二월 大功德主 金越溟 畓二百七十斗落 萬日會, 沓 十六斗落 祭位
〈화계사 현판〉
[봉원사 만일회(1912년 2월)]
경성의 서대문 밖 봉원사 이보담(李寶潭)스님은 당사에 만일회를 개설하여 사찰 안의 중년 이상의 승려로 하여금 모두 염불정진에 종사케 함.(불교월보 2호)
[개운사 만일회(1912년 4월)]
경성 개운사 이보련행 보살이 만일회를 창설하였고 지금도 그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건봉사 만일염불회]
<제1차>
서기 758년(경덕왕 17년)에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 양순 등과 함께 최초로 만일염불회를 개설하여 염불정진하였는데 이것이 만일염불회의 효시이다.
이 결사에는 승려 31인과 1820인 참여하여 염불정진한 후 서기 787년에 회향하였다. 그 결과 참여한 대중 가운데 염불하던 스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력으로 극락에 왕생하였다. 그 뒤 참여했던 신도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하였다고 한다.
<제2차> 서기 1802년(순조 2년)
<제3차> 서기 1851년(철종 2년)
<제4차> 서기 1881년 만화관준 스님을 회주로 하여 결성, 1908년 회향
<제5차> 서기 1908년 금암의훈 스님을 회주로 제5차 염불만일회 개설
<제6차> 서기 1998년 8월 6일 입재하여 서기 2025년 12월 21일 회향할 예정.
[고양군 흥국사 만일회(1904년 11월)]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기의 내용이다.
고종 갑진년 11월 단월이 열 가지 원을 세워 만일회를 창설했다. 만일회라는 것은 백련사(白蓮社)의 다른 이름이다. 살피건데 30년 염불회는 향화의 인연이다. 대중이 혜월공을 선출하여 연사(蓮社)의 화주가 되었다. 다음 해는 진관사 해송공을 맞아 연사의 화주로 모셨다. 생각컨데 해송공이 청중과 더불어 연사를 체결하여 이끌어 오니 26년 심안이 부동하여 함께 부처님의 명호(나무아미타불)를 염송하니 몇 만 편인지 알 수 없다.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니 과(果)가 경에서 설한 바와 같았다.
[화계사 만일염불회(1910년 12월)창설]
경술년 겨울인 11월 월해화상(越海和尙)이 주관하여 뜻을 함께한 월초(月招) 포응(抱應) 동화(東化) 제공(諸公)이 협력하여 화엄산림(華嚴山林)을 하기로 의논하고 각자가 힘을 따라 혹은 재물을 내고 혹은 시주자를 모집했다.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東華寺) 월제화상(越薺和尙)이 회주(會主)에게 80권 화엄경(八十券華嚴) 일부(一部)를 가져와 초하루부터 열흘 동안 밤낮으로 강설하여 환희에 찬 회향을 하였으니 실로 말세중에 드문 일이었다.
원유화상(爰有和尙)은 호(號)가 월명(越溟)이다. 어려서 머리를 깎고 입산하여 염불(念佛)로서 근본을 삼고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구하길 50년이었다. 홀연히 금년 겨울 병고가 들어 사대(四大)가 온전치 못하므로 스스로 목숨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한날 저녁 월해화상(越海和尙)을 불러 말하였다.
“스님과 나는 승가의 형제이니 나의 뒷일을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본인이 금년에 70살인데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명(命)이 다한것 같습니다. 평생 수용하고 있는 논이 양양(襄陽)에 있는데 몇 백 두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속간에 남겨온 재물이 아니라 본인이 입산 후에 빈손으로 이루어 근근히 생계를 도와 온 물건입니다. 어떻게 하면 옳겠오” 하였다.
월해화상(越海和尙)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회주(會主) 월제화주(月薺化主), 월초(月初) 포응(抱應) 동화제공(東化諸公) 스님이 역시 한자리에 있다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스님이 예로부터 염불(念佛)로써 날마다 공부의 업(業)을 삼았으니 만일염불인(萬日念佛人)들의 월료(月料)에 쓰인다면 곧 비록 천만년에 이르러도 염불(念佛)의 금고(金鼓) 소리가 도량에 그치질 않을 것입니다. 단지 만인에 염불을 권할 뿐 아니라, 역시 화상의 몫은 비록 서방으로 돌아가지만 이름은 본산(本山)에 머물러 가히 흐르는 향기가 백세(百世)에 이른다 할만하니 어찌 이 세간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곧 사람은 황천에 가고 재물은 허무로 돌아갈 것이니 원컨데 화상은 깊이 살펴주소서” 라고하니, 이에 화상이 크게 깨우쳐 논 문서를 사중(寺中)에 송두리째 드렸으니 헌신짝을 버리는 것 같았다.
만약 숙세에 선근의 깊고 두터움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평생 사랑하고 아끼던 재물을 일시에 헌납하는 것이 그 어찌 이와 같겠는가(하략) 석존강탄후 2937년 경술(음) 十二월 大功德主 金越溟 畓二百七十斗落 萬日會, 沓 十六斗落 祭位
〈화계사 현판〉
[봉원사 만일회(1912년 2월)]
경성의 서대문 밖 봉원사 이보담(李寶潭)스님은 당사에 만일회를 개설하여 사찰 안의 중년 이상의 승려로 하여금 모두 염불정진에 종사케 함.(불교월보 2호)
[개운사 만일회(1912년 4월)]
경성 개운사 이보련행 보살이 만일회를 창설하였고 지금도 그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건봉사 만일염불회]
<제1차>
서기 758년(경덕왕 17년)에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 양순 등과 함께 최초로 만일염불회를 개설하여 염불정진하였는데 이것이 만일염불회의 효시이다.
이 결사에는 승려 31인과 1820인 참여하여 염불정진한 후 서기 787년에 회향하였다. 그 결과 참여한 대중 가운데 염불하던 스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력으로 극락에 왕생하였다. 그 뒤 참여했던 신도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하였다고 한다.
<제2차> 서기 1802년(순조 2년)
<제3차> 서기 1851년(철종 2년)
<제4차> 서기 1881년 만화관준 스님을 회주로 하여 결성, 1908년 회향
<제5차> 서기 1908년 금암의훈 스님을 회주로 제5차 염불만일회 개설
<제6차> 서기 1998년 8월 6일 입재하여 서기 2025년 12월 21일 회향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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