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信心銘)

2008. 7. 20. 15: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728x90

 

 

이 성전(聖典)을 쓴 승찬대사는 누구인가?

 

달마가 혜가에게 소림에서 법을 전하고 혜가가 법을 계승할 이를 찾던 중 어느날 40이

넘은 거사가 나타나서 물었다.

 

 "소인은 풍병(風病)이 걸렸사오니, 화상께서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소서."

혜가가 말했다. "죄를 가지고 오너라. 참회시켜 주리라."

 

잠시후 거사가 말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가 말했다.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다. 앞으로 마땅히 불(佛), 법(法), 승(僧)을 의지해서 머물러라."

 

그러자 거사가 말했다.

 

 "지금 화상을 뵈옵고 승보(僧寶)임은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

법보(法寶)라 합니까?"

 

혜가가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또한 그러하다."

 

거사가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사오니,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가 둘이 아니옵니다."

 

대사가 큰 인물로 여기고 머리를 깎아주고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다. 승찬(僧璨)이라 부르리라."

 

그후 스승 혜가는 107세 입적시까지 대중 속에서 교화를 하였다.

승찬 역시 도신(道信)이라는 14세의 사미에게 법을 전한 후에 A.D. 606년

큰 나무 아래에서 합장하고 선 채로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대도(大道)는 어렵지 않나니

편견에 치우치지 말지어다

사랑과 미움이 없으매

모든 것이 맑고 숨김 없어라

털끝 만한 차별하나 일으켜도

하늘과 땅이 무한히 벌어지나니...

진리를 깨우치고자 한다면

뜻을 펴지도 거스르지도 말지어다.

싫고 좋은 것으로 하여 버둥댐이

마음의 병이니라.

 

 

세상만사 깊은 뜻 이해 못할 때

마음의 평정(平靜)을 이루려해도 소용 없나니...

도(道)는 광막한 허공처럼 완벽하여

남고 모자람이 없도다.

허나, 도(道)가 우리의 받고 물리침에 달렸으니

세상만사 참 이치를 알지 못함이로다.

바깥 세상에 연연하지도

공(空)의 내지각(內知覺)에 빠지지도 말지어다.

사물의 일치 속에 아웅다웅 하지 않고

잠잠하면,

허상(虛像)이 스스로 사라지리라.

 

 

무위를 성취하고자 행위를 멈추려고 애쓸 때

바로 그 노력이 행위로 가득 채우나니...

이쪽 저쪽, 어느 한 극단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그 하나를 알지 못하리라.

그 하나 속에 살지 않는 자는

행위와 무위를

모두 이루지 못하리라.

 

 

사물의 실재를 부정하면

그것들의 실체를 놓치고

사물의 공(空)을 가리면

그것들의 실재를 등지느니라.

진리에 대하여 말이 맣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부터 더욱 멀리 해매이리라.

따라서 말과 생각을 멈추면

모른 것이 없느니라.

 

 

뿌리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현상을 좇으면 근원을 잃나니

내면의 깨달음을 맞이하면

현상과 공(空)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

공허한 세계에서 이는 듯한 변화를

우리의 무지는 진실이라 부른다.

진리를 추구하면

오직 편견에 사로잡힐 뿐이니라.

 

 

이원설(二元說)에 머물지 말고

그런 추구를 조심스레 피하라.

만약 거기에 이것 저것

옳고 그름의 낌새라도 있다면

본 마음을 혼란 속에 잃어버리느니라.

모든 이원성은 하나로부터 온 것이니

이 하나조차 집착하지 말라.

마음이 평정할 때

세상에 아무 허물이 없느니라.

그리고 사물에서 흠 잡을 것이 없을 때

마음이 옛날같지 않느니라.

분별력이 사라지면

옛마음도 온 데 간 데 없다.

 

 

객관의 사념(思念)이 소멸 될 때

주관의 사념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소멸됨에 따라 객관도 사라진다.

사물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마음은 사물로하여 존재한다.

이 둘 사이의 상대성도

원래 하나의 공(空)임을 알지어다.

이 공 안에서 그 두른 구별되지 않나니

모든 삼라만상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귀하고 천한 것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면

편견이 일지 않을 것이니라.

 

 

대도(大道)에 살기란

쉽지도 어렵지도 않거늘,

좁은 시야를 가진 자들은

두려워 망설인다.

서둘수록 더디며

집착하면 법도를 잃나니...

깨달음의 이상에 달라붙을 지라도

길을 잃고 해매이리라.

사물이 있는 그대로 놔두면

오가는 것이 없느니라.

 

 

사물의 본성(자기자신의 본성)을 따르면

번뇌없이 자유로이 걸을 수 있으리라.

사고(思考)에 얽매이면 진리가 숨나니...

그때 모든 것이 불투명하여

분별력의 번거로운 수행으로

번민만 불러 일으킬지니...

차별로부터 무슨 득을 보겠는가?

 

 

한길로 나아가고자 하면

감각과 사고의 세계조차 물리치지 말라.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깨달음과 같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목적을 지니지 않거늘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얽매인다.

거기에 여럿이 아닌 하나의 진리, 법(Dharma)이 있을 뿐...

차별은 무지한 자의 집착에서 일어난다.

 

 

안정과 불안은 망상으로부터 일어나고

깨달음과 함께라면 싫고 좋을 것이 없느니라.

모든 이원성은 무지한 추론으로부터 온다.

이 꿈같은 것을, 허깨비 꽃같은 것을,

어리석게 붙잡으려 애쓰는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옳고 그른 것...

그러한 생각들을 한번에 없애 버려라.

눈이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이 저절로 멎을 것이다.

 

 

마음에 아무런 분별이 없다면,

만가지 사물들이

본래 모습대로 하나이다.

이 한 가지 본질의 신비를 깨우치는 것이

모든 인연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보일 때

영원한 자아의 본질에 닿는다.

이 까닭없는 무연고(無緣故)의 경지에서는

아무런 비교나 유추고 가능하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과

움직임 속의 부동(不動)을 숙고하라.

그러면 운동의 상태와 휴식의 상태가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이원성(二元性)이 존재할 수 없거늘

하나인들 어찌 있을소냐.

이 최종적인 궁극에는

아무런 법이나 묘사도 맞지 않는다.

 

 

하나된 마음을 위해, 도(道)와 조화를 이루면

모든 자아 중심적인 투쟁이 그친다.

의심과 망설임이 사라지면

참된 믿음의 삶이 가능하다.

단번에 우리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매달리지 않고,

우리 또한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모든 것이 텅 비고, 맑고, 스스로 빛나니,

마음 쓸데가 없도다.

여기에 사고나, 감정, 시직이나 상상이

아무 쓸모 없구나.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과

움직임 속의 부동을 숙고하라.

그러면 운동의 상태와 휴식의 상태가

모두 사라진다.

 

 

이 진여법계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이 실재와 더불어 조화롭기 위해서는

의심이 일어날 때,

그냥 "둘이 아님"을 말하라.

이 "둘 아님" 속에서는 아무 것도 분리되지도,

아무것도 빼놓지도 않는다.

언제 어느 곳을 막론하고

깨달음은 이 진리로 들어감을 뜻한다.

이 진리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서

불거나 줄어듦을 초월하여 있다.

그 속에서는 생각 하나가 만년이라...

 

 

여기도 공(空)이요, 저기도 공,

그러나 무한한 우주는 항상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우주는 우한히 크고, 또한 작기도 하다.

아무런 차이도, 한계도 사라지고

경계가 보이지 않네.

있음이 곧 없음이로다.

공연히 논쟁이나 의심으로

허송세월 하지 말라.

 

 

하나의 사물, 모든 것들이

분별없는 사이에서

움직이며 뒤섞인다.

이 깨달음 속에 살려면

미완성이라 걱정하지 말라.

이 신념 속에 사는 것이

비이원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비이원성에 사는 사람이

신심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

도(道)는 언어를 초월하여

어제도

내일도

오늘이 아닌

마땅히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