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십우도 - 본성을 �아가는 선 수행 단계

2008. 7. 20. 16: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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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소를 찾아 나서는 것에 비유하여

선 수행의 단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로부터 소는 인도나 중국에서 농경생활의 필수적인 동물이므로

사람과 매우 친숙하다.

세존께서 성불하기 이전에 고타마 싯타르타 태자였는데,

이 '고타마'는 곧 '최상의 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농선일치(農禪一致)를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농업 및 노동과 관련 있는 소를 등장시켜,

선수행의 단계를 비유하여 마음을 조복(調伏)받는

10가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우도는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불립문자, 不立文字),

부처님이 가르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겨(교외별전, 敎外別傳),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직지인심, 直指人心),

바로 부처가 되는 것(견성성불, 見性成佛)을

이상과 원리로 삼는 선의 종지(宗旨)를 담고 있다.

십우도는 중국 송대(宋代)의 보명(普明)과 곽암(廓庵) 스님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보명의 심우도(목우도, 牧牛圖)는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默照禪)을 반영한 것으로

점수(漸修)적인 오염과 청청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만 원으로 그리고 있다.

곽암의 심우도는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을 반영한 것으로

돈수(頓修)적인 잃음과 얻음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열 단계가 모두 원상 속에 그려져 있다.

아래의 십우도는 곽암사원(廓庵師遠) 스님의 작품인데,

석고희이(石鼓希夷) 스님이 화답하는 게송을 지었으며,

다시 괴납대련(壞衲大璉) 스님이 화답 게송을 넣고 있다.

곽암의 십우도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서

소를 보고 잡아 끌어서 마침내 소와 내가 하나가 되어

결국은 공적(空寂)의 상태가 되고,

다시 본래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는 차례를 그리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잘 다룬 곽암의 십우도가 가장 널리 유행하여

오늘날 우리 나라 각 사찰 벽화에는 어김없이

십우도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1] 소를 찾아 나서다 (심우, 尋牛)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종내불실 하용추심(從來不失 何用追尋)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 있겠는가 /

유배각이성소 재향진이수실(由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깨침을 등진 결과 멀어져서 세간을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

가산점원 기로아차(家山漸遠 岐路俄差)

고향집에서 점차 멀어져 갈림길에서 어긋난다 /

득실치연 시비봉기(得失熾燃 是非鋒起)

얻고 잃음의 불이 타오르니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어지럽게 일어나네


[2]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견적, 見跡)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의경해의 열교지종(依經解義 閱敎知踪)

경전에 의거해 뜻을 헤아리고

가르침을 배워서 그 자취를 안다 /

명중기위일금 체만물위자기(明衆器爲一金 體萬物爲自己) 그릇들이 다 한가지로 금임을 밝혀내고 우주만물이 곧 자기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

정사불변 진위계분(正邪不辨 眞僞繫分) 바름과 삿됨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됨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

미입사문 권위견적(未入斯門 權爲見跡)

아직 입문하진 않았으나 임시 방편으로 '자취를 본다'고 한다


[3] 소를 보다 (견우, 見牛)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종성득입 견처봉원(從聲得入 見處逢源)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

육근문 착착무차(六根門 着着無差)

육근(眼耳鼻舌身意)의 문마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네 /

동용중 두두현로(動用中 頭頭顯露)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

수중염미 색리교청(水中鹽味 色裏膠靑)

물 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인데 /

잡상미모 비시타물(?上眉毛 非是他物)

눈썹을 치켜 뜨고 바라보아도 별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4] 소를 얻다 (득우, 得牛)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땅 속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찾아낸 것에 비유한다.

이 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직 탐(貪)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상태임을 상징한다.

구매교외 금일봉거(久埋郊外 今日逢渠)

오랫동안 야외에 숨어 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댈 만났네 /

유경승이난추 연방총이불기(由境勝以難追 戀芳叢而不己)

뛰어난 경치 때문에 쫓아가기 어려운데

싱그러운 수풀 속을 끊임없이 그리워 하네 /

완심상용 야성유존(頑心尙勇 野性猶存)

고집 센 마음은 여전히 날뛰니 야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

욕득순화 필가편달(欲得純和 必加鞭?)

온순하게 하고 싶으면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5] 소를 길들이다 (목우, 牧牛)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선종에서 이 과정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 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 검은 색이 차츰 흰색으로 바뀌어간다.

전사재기 후념상수(前思裳起 後念相隨) 앞 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 생각도 따르나니 /

유각고이성진 재미고이위망(由覺故以成眞 在迷故而爲妄)

깨달음에 의해 진실을 이루기도 하며 미혹으로 인해 헛되기도 한다 / 불유경유 유자심생(不由境有 唯自心生) 대상 사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

비삭뢰견 불용의의(鼻索牢牽 不容擬議)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사량분별은 용납치 않는다.


[6] 소 타고 집에 돌아가다 (기우귀가, 騎牛歸家)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 때의 소는 전체가 완전한 흰색을 띠고 있다.

소와 동자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본성의 소리를 의미한다.

간과이파 득실환공(干戈已罷 得失還空)

투쟁이 끝나서 얻음도 잃음도 모두 비었구나 /

창추자지촌가 취아동지야곡(唱?子之村歌 吹兒童之野曲)

나뭇꾼의 시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 아이들의 풀피리를 불어 보노라 / 신횡우상 목시운소(身橫牛上 目視雲?)

태평한 모습으로 소 등에 누워 눈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

호환불회 로총부주(呼喚不回 撈寵不住)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아름다움에 이끌려도 머무르지 않는다.


[7]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망우존인, 忘牛存人)

 집에 돌아와보니 애써 찾은 소는 간데 없고 자신만 홀로 남은 상태를 표현한다.

결국 소는 본성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니 그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했으면

방편인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법무이법 우차위종(法無二法 牛且爲宗)

법엔 두 법이 없나니 임시 소에 의탁해 종으로 삼았노라 /

유제토지이명 현전어지차별(喩蹄兎之異名 顯筌魚之差別)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 같고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

여금출광 사월이운(如金出鑛 似月離雲)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

일도한광 위음겁외(一道寒光 威音劫外)

한 줄기 차가운 빛은 무한한 시간 밖의 위엄 있는 소리로다


[8] 사람도 소도 다 잊다 (인우구망, 人牛俱忘)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 빈 원상만을 그리고 있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는다.

범정탈락 성의개공(凡情脫落 聖意皆空)

범속한 생각을 벗어나니 성인의 뜻도 다

빈 것이다 /

유불처불용오유 무불처급수주과(有佛處不用?遊 無佛處急須走過)

부처가 있는 세계엔 놀 필요가 없고 부처 없는 세계는 모름지기 급히 지나가야 한다 /

양두불착 천안난규(兩頭不着 千眼難竅) 범속함과 거룩함 모두 집착하지 않으니 관음보살의 천안이라도 엿보기 어려워라 /

백조함화 일장마라(百鳥啣華 一場??)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 공양하는 아름다움도 오히려 한바탕 베어내야 할 것이라네


[9] 근원으로 돌아오다 (반본환원, 返本還源)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속에 있는

그대로 비치는 자연의 경지를 표현한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이다.

본래청정불수일진 관유상지영고(本來淸淨不受一塵 觀有相支榮枯)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 /

처무위지응적 부동환화(處無爲之凝寂 不同幻化)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더 이상 환상과 함께 하지 않으니 /

기가수치 (豈假修治) 어찌 수행과 배워

익힘에 허망하게 의지하리오 /

수록산청 좌관성패(水綠山靑 坐觀成敗)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르러니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 성쇠를 바라보노라


[10]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입전수수, 入廛垂手)

 동자가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줄 복과 덕을 담은 것으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제도에 있음을 상징한다.

시문독엄 천성부지(柴門獨掩 千聖不知)

사립문 닫고 홀로 고요하니 수많은 성인이라도 그 속을 알지 못하리 /

매자기지풍광 부전현지도철(埋自己之風光 負前賢之途轍)

자기의 풍광은 묻어 버리고 옛 성현들이 간 길도 등져버린다 /

제표입시 책장환가(提瓢入市 策杖還家)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

주사어행 화령성불(酒肆魚行 化令成佛)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루게 한다


이상과 같이 십우도는 표면적으로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깊고 심오한 선종의 사상을 담고 있다.

열 단계의 과정을 다시 정리해 보면,

'①심우'는 불도(佛道)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나타내고,

'②견적'에서 '⑥기우귀가'까지는 수행의 과정을,

'⑦망우존인'과 '⑧인우구망'은 보리심을 성취하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⑨반본환원'은 완전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의 경지에 들어가는

모습을, '⑩입전수수'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는 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 석고희이(石鼓希夷) 스님의 화답하는 게송과 괴납대련(壞衲大璉) 스님의 화답 게송은 생략함.

* 위의 두 게송과 영문 번역 및 사찰의 전각 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칼라 그림은 다음 홈페이지의 자료파일을 참조. (부산 삼광사 홈페이지의 십우도 자료를 토대로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임)

1.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http://my.netian.com/~yjino 에 접속하여
2. '각종자료다운'을 클릭하여, '십우도.zip' 파일을 다운 받은 후에
3. 알집 프로그램으로 압축을 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