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선지식 水月음관(1985-1928)

2008. 9. 11. 13: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흥국사 수월정사에 봉안된 근정                                                                    백담사 계곡 
 
 
근대 선지식 水月음관(1985-1928) 
 
19세기 말. 백성들은 집잃은 나그네처럼 처량한 생활로 연명했다. 그때 ‘한국 불교’에 '조선의 등불'로 불씨를 지핀 이가 경허 선사다. 그에겐 내로라하는 제자가 셋 있었다.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경허의 세 달’로 부른다. 수월은 멀리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그리고 만공은 중간 지점인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그 중 경허의 맏상좌였던 수월은 달 중에서도 ‘꽉 찬 달’로 통한다. 그러나 오도송도 없고, 열반송도 없다.
이렇다할 설법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특이하다. ‘그림자 없는 성자’. 그의 자취가 깃든 북간도, 그의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를 옛 만주땅을 찾았다.

* 설정스님 수좌 혜암스님과 벽초스님에게 들은 이야기                       

자식이 없어 노심초사하던 수월 스님의 부친이 어느날 나무하러 갔다가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솔굴에 숨겨 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포수에게 엉뚱한 방향을 알려주어 생명을 건졌는데, 이듬해 산에서 그 노루가 나타나 옷깃을 물어서 잔설殘雪이 있는 곳으로 안내 하는 곳으로 가서 선조의 묘를 썼더니 아이를 갖게되었는데 훗날 수월 스님이다.  

스님은 어려서 머슴살이를 하여 나무를 팔아 생활을 하면서 시장에서 만난 스님의 말에 감탄하고, 따라나선 곳이 천장암이었다. 당시 천장암 주지는 경허스님의 속가 형님인 태허스님이었다. 수월스님은 매일 나무를 하고 짚신을 삼고 방아를 찧으며 정진했다. 천장암 아랫마을은 장요리長要里였는데 마을에서 보면 천장암에 서광이 빛쳤는데 가보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방광放光한 수월스님의 도력에 존경의 대상이었다. 

어느때인가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스님이 몇칠간 보이지 않자 찾아나섰다. 스님은 해우소에서 뒤를 닦으며 구부리고 있었다.  "스님 ! 무얼하십니까?" 하니까 그제서야 "쥐가 똥을 맛있게 먹어서 구경했지" 라며 3일이나 경지에 들었던 것이다. 또, 문하의 성암스님이 성수스님에게 들려준 이야기 -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온뒤 공양간에서 불을 지폈다. 무쇠솥을 걸어놓고 물이 다 마르고 솥이 벌겋게 달아 오르도록 삼매일여의 경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발견한 사람이 없었으면 밤을 샜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장암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던 스님이 곡식을 넣는 순간 삼매에 들었다. 공이가 올라가 멈춰 있었다. 마침 ㅐ태허스님이 "수월아 뭣하는 거냐?" 하는 바람에 깨어나면서 공이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만주에 머물당시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만주를 유랑하는 조선인에게 한끼의 식량과 짚신을 나눠주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스님이 탁발을 하려고 마을에 들어서면 사나운 개도 짖지 않았고 노루 사슴 토끼 등 동물들이 놀래지 않고 다가왔다고 한다. 스님에게 물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뉴. 악의만 없으면 되는 거여" 만공스님은 생전에 "복덕과 도력을 누가 감히 당하겠느냐" 하면서 수월스님을 높이 기렸다고한다.  

수월스님이 간도에 계실때 금오스님과 청담스님 등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주민 한명이 되지새끼를 안고와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청하니 수월스님은 "부터님탁자에 올려라" 하고는 목탁을 치면서 "잘 크게 해주세요"라고 불공을 드렸다. 방금까지 꽥꽥거리던 되지가 얌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수월 선사의 법문은 거의 없고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이 하나 남아 있다. 몸을 다친 독립군 연설단원이 화엄사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이다. 거기서 수월 선사는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 겨”  또,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집에 죄를 짓는 것이여.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사람 몸받아 참나를 알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있어. 이보다 더 큰 한이 어디있어.  라고 말했다. 이 법문을 기억한 그 독립군 단원은 나중에 몽골에서 스님이 됐다. 수월(水月), 스승이 내린 법명처럼 그는 쉼 없이 흐르는 ‘달’이었다.

흑룡강성 화엄사에서 점심공양을 마친후 목욕재계하고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위로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새옷과 새짚신을 머리에 이고 불속으로 들어간 자화장自火葬이었다. 연기는 향으로 변하여 널리 퍼져 일주일간이나 향훈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방광이 일주일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입적에는 이설異說도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불법을 실천했던 수월스님의 삶은 지금 한국불교의 유효한 하나의 경책이다.    글 - 이성수 기자      편집 - 유당 

 

행장 :                                                                
 
1855년 충남 홍성 태생이나 속성조차 정확하지 않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스님은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29세에 서산 천장암으로 출가하여, 경허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했다.
처음에는 공양주와 나무하는 일을 했다. 천수대비주를 알게된 후 일념으로 염송하여 행주좌와 어느순간에도 천수 주력을 놓지 않은 스님은 구경에 이렀지만, 드러내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몰두했다.‘일하는 수행자’‘수행하는 일꾼’으로 불릴 만큼 중생을 위한 자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경허스님의 인가를 받은 수월스님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몸을 숨긴 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묵묵히 실천하였다. 배움이 없는‘까막눈 선사’였음에도 금강산 마하연 선방의 조실을 지냈다. 
 
경허선사가 열반후 북간도로 올라간 스님은 60세의 노구에도 한 농가의 일꾼으로 들어가 지냈다. 품삯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무주상 보시를 실천했다. 당시 비적들에 맞서 간도의 집집 마다 키우던 사나운 도사견들도 수월 선사 앞에선 엎드렸다고 한다.
말년에  만주 송림산 아래에 화엄사라는 작은 절을 짓고 밭을 일구며 8년을 지냈다. 1928년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호랑이와 새, 산천초목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스님의 법은 묵언默言스님을 거쳐 도천 도광 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