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37.여래의 청정선

2008. 10. 9. 09: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전심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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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 (傳心法要)

    37.여래의 청정선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잡된 학문과 모든 반연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하여 결정코 구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아주 깊고 깊은 법을 듣더라도 맑은 바람이 귓가에 잠깐 스쳐지나간 듯이 여기어,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如來禪) [여래선 : 여기서 말하는 여래선은 조사선과는 우열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조사선이 곧 여래선임을 뜻한다. <선문정로>의 무생법인편 참조.]에 매우 깊숙히 들어가 참선을 한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 것이다. 위로부터 역대의 조사들께서 오로지 한마음[一心]만을 전하셨다. 결코 두 법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르게 가르치신 것이다.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어서 절대로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 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경망한 사람들이야 이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러므로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없는 보살은 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항상하다는 견해(常見) [상견(常見) : 영원불멸의 실체가 있다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로서, 단견(斷見)의 반대임.]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일체의 법은 공(空)하다고 관(觀)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견해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 그러므로 ‘3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식(識)이다 [三界唯心 萬法唯識]’고 하는 것은 외도와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약 최고의 법신자리에서 본다면 그것은 3현(三賢), 10성(十聖)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의 어리석음을 끊으셨는데, 하나는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며 또 하나는 극히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으셨거늘, 다시 무슨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차례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우침만을 얻으려 하고 번뇌와 무명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들은 망념이 남아 있는 존재이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백천 겁이 지나도록 다만 6도에 계속 윤회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본래 근원의 자성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또한 강하지도 않고 중생이라고 해서 약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법에는 강함도 약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선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하면 그대로 병통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근본은 말하지 않고 지말만을 말하며, 미혹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본체는 말하지 않고 작용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저 일체 법은 본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근본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근본은 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법은 곧 법이 아니요 법 아님이 곧 법이며, 법도 없고 법 아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이니라.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생각 생각이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현재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만약 일어날 때에,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미혹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사량분별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집착하여 끊어 버리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 생각 갑자기 일어나면 수천 겹으로 자물쇠를 채우더라도 가둘 수가 없고, 수만발의 오랏줄로도 그것을 묶어 두지 못한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그치게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이 아지랑이같은 의식이 어떻게 저 생각을 끊어 버려서, 아지랑이 같은 데다 비유하겠느냐. 너희가 가깝다고 말하면 시방세계를 두루 찾아도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다고 말하면, 볼 때에 단지 눈 앞에 있어서 쫓아가면 더더욱 멀리 가 버리며, 피하려 하면 또 쫓아와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여 그것을 근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앞 생각이 범부이여, 뒷 생각이 성인이라는 말처럼 손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3승교(三乘敎)의 종극(終極)이다. 그러나 우리 선종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앞 생각 또한 범부가 아니고 뒷 생각 또한 성인이 아니며, 앞 생각이 부처가 아니고 뒷 생각이 중생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모든 빛깔이 부처님의 빛깔이며 모든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소리이다. 한 이치[理]를 들면 모든 이치가 다 그러하므로, 한 현상[事]을 보아 모든 현상을 보며, 한 마음을 보아 모든 마음을 보며, 한 도를 보아 모든 도를 보아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다. 또 한 티끌을 보아 시방세계의 산하대지를 보며, 한 방울의 물을 보아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성품의 물을 보며, 또한 일체의 법을 보아 일체의 마음을 본다. 모든 법이 본래 공(空)해서 마음은 없지도 않다. 없지 않음이 바로 묘하게 있는 것[妙有]이고, 있음[有] 또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지 않음이 바로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참으로 공하면서 오묘하게 있음[眞空妙有]이니라. 그렇다면 시방세계가 나의 ‘한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티끌처럼 많은 모든 국토들이 나의 ‘한생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말하겠는가? 마치 벌꿀의 성질이 달콤해서 모든 꿀은 다 그러하므로, 이 꿀은 달고 저 꿀은 쓰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이 안팎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또한 그러하며, 허공이 중간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중생이니라. 중생과 부처가 원래로 한 본체이며, 생사열반과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원래 동일한 본체이며, 세간, 출세간과 나아가 6도, 4생과 산하대지와 유정, 무정이 또한 같은 한 본체이다. 이렇게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이 역시 공(空)하여 있음도 공하고 없음도 공하여, 간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온 세계가 원래 똑같이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중생을 제도할 부처가 어디 있으며, 부처의 제도를 받을 중생이 어디에 있겠느냐?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만법의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저절로 그렇다는 견해를 내면 곧 자연외도 (自然外道)에 떨어지고, 만약 나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견해를 내면 3현, 10성의 지위에 떨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찌 한 자, 한 치를 가지고 끝없는 허공을 재려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기를 ‘법과 법이 서로 다닫지 못하나니, 법은 스스로 공적함으로써 그 자리에 본래부터 머물러 있으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참되다’고 하였느니라. 몸이 공하므로 법이 공하다고 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므로 법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나아가 천 갈래로 다른 갖가지의 말들이 모두 다 너희의 본래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보리와 열반, 진여와 불성, 이승과 보살 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누런 나뭇잎을 가리켜 돈이라 하는 주먹과 손바닥의 비유에 불과하다. 주먹을 펴면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모든 대중들이 모두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본래 한 물건도 없어서 3세(三世) 역시 있는 바 없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단도직입으로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된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 인도로부터 이 땅에 오시어 여러 나라를 거치셨지만, 오직 찾아 얻으신 것은 혜가스님 한 분뿐이었다. 혜가스님에게 마음의 도장[心印]을 은밀히 전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본래 마음에 새기신 것이다. 마음으로써 법에 새기며 법으로써 마음에 새겨서, 마음이 이미 이 같으며 법 또한 이 같아서 진제(眞際)와 같고 법의 성품과 평등하다.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 누가 수기(授記)하는 사람이며, 누가 부처가 되는 사람이여, 누가 법을 얻는 사람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없으니, 몸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데,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허다고 성품으로도 얻을 수 없으니, 성품은 곧 바로 근본원류의 자성이 청정한 부처[本源自性淸淨佛]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모양이 없는 것으로 다시 모양이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또한 공함으로써 공함을 얻을 수 없고, 도로써 도를 얻을 수 없다. 본래 얻은 것이 없어서 얻은 것이 없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얻을 만한 한 법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다만 너희로 하여금 본 마음을 분명히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당장 요달했을 때라도 요달한 모양을 얻을 수 없어서, 요달함이 없는 모양도, 요달하지 않음이 없는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을 얻은 사람은 곧 얻으나, 얻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또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법을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알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를 잊은 사람이 몇이더냐?’ 고 하였다. 지금 한 기틀, 한 경계, 한 경전, 한 가르침, 한 세대, 한 시기, 한 이름, 한 글자를 6근의 문 앞에서 알 수 있다면, 꼭두각시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한 이름, 한 모양 위에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온 시방세계를 다 찾는다 해도 이런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노라. 그와 버금갈 만한 사람이 둘도 없으므로 조사의 자리를 이으며, 또한 부처님의 종자라고 일컫나니, 순수하여 전혀 잡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왕이 부처를 이룰 때에 왕자도 역시 따라서 출가한다’고 했는데, 이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느니라. 다만 너희에게 아무 것도 찾지 말도록 할 뿐이니, 찾으면 곧 잃어버린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산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질러 메아리가 울리면 곧장 산 아래로 달려 가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거기서 또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산 위에서 메아리가 울리며, 그는 다시 산 위로 달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천생만겁을 소리를 찾고 메아리를 좇는 사람일 뿐이어서 허망하게 생사에 유랑하는 자이니라. 만약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도 생기지 않는다. 열반이란 들음도 앎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자취도 발자욱도 모두 끊긴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겨우 조사의 방 근처에 인접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