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명상이라는 것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빈틈을 늘리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를 읽다보니 이에 관한 아주 자상한 설명이 나와 있어 함께 나누어 봅니다.
일상의 마음에서 우리는 생각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각각의 생각들 사이에 빈틈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과거의 생각이 이미 지나갔을 때, 그리고 미래의 생각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을 때, 당신은 마음의 본성인 리그파가 드러나는 빈틈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상이란 생각을 서서로 밑으로 가라앉혀 그 빈틈을 점점 더 뚜렷하게 만드는 것이다.
빈틈!! 이 빈틈을 보고 계신가요?
이러한 빈틈의 존재를 머리로 이해하기는 쉽습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더라도 한 생각과 또 다른 생각의 사이에는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빈틈을 분명히 바라보고, 또 바라봄으로써 그 빈틈을 늘려나가는 깨어있는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막상 현실에서 직접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그 생각과 생각 사이의 빈틈을 지켜보기는 그리 쉽고 녹록한 일이 아닌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빈틈은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잠시만 내면으로 들어가 생각이 어떻게 올라오고 사라지는지, 한 생각과 다음 생각 사이의 빈틈이라는 텅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빈틈이 얼마동안 유지되고 있는지를 가만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빈틈의 공간을 지켜보면 저절로 그 빈틈이 길어지고, 마음은 곧 마음 없음, 무심(無心)으로 나아갑니다.
좌선을 할 때에도, 염불을 할 때에도, 독송이나 진언을 염송할 때에도, 절 수행을 할 때에도 내 안에서 올라오는 번뇌와 무수한 생각들을 잘 지켜보면 바로 그 '빈틈'이 길어지면서 삼매와 각성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도 차를 타고 가면서, 운전을 하면서, 집안 청소를 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이 사이에도, 일하다가 쉬는 시간 틈틈이 언제고 '빈틈을 늘리는 수행'를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지혜]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과거의 생각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면 빈틈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요. 그 빈틈을 길게 늘여보세요.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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