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어 / <박산 무이> 선사 공부를 짓되 최초에 생사를 파하려는 마음이 굳세고, 세계와 몸과 마음 이 모두 이 거짓 인연이라, 실다운 주재(主宰)가 없는 줄로 간파(看破)할 지니라. 만약 본래 갖추어진 큰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곧 생사심(生死心 )을 깨뜨리지 못하고,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했을진대 무상살귀(無常殺鬼 )가 생각생각 멈추지 않으리니, 도리어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 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 아침에 의심덩어리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공부해 가는데 제일 두려운 것은 고요한 경계에 탐착하는 것이니, 사람 으로 하여금 고적한데 빠져서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게 함이로다. 시끄러 운 경계는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요한 경계는 흔히 사람들이 싫어하 지 않는 것이, 진실로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떠드는 장소에 처해 있다가 한 번 고요한 경계를 만나면 엿이나 꿀 먹는 것과 같은지라, 마치 사람이 오랜 피로 끝에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거니 어찌 스스로 알 수 있으랴. 공부를 짓되 반드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하고, 굳세고 곧아서 인정을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정(情)을 따라 응대하면 공부가 향상하지 못하리라. 다만 공부가 향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반드시 속된 중의 무리에 휩쓸림이 의심없으리라. 공부를 지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 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산을 보아도 산 인줄 모르고, 물을 보아도 물인 줄 알지 못하며,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몰라서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서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온 몸 안팎이 한 개의 의단(疑團)뿐이 니, 의단을 깨뜨리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쉬지 말지니라. 이것이 공부에 긴요한 것이 되나니라. 공부 지어 가는데 죽고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고 죽지 못 할까 두려워 할지니, 과연 의정으로 더불어 한 곳에 맺어두면, 동(動)하는 경계는 보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망령된 마음은 맑히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리라. 육근문(六根門)이 저절로 환하게 열 려서 손짓하면 곧 오고, 부르면 곧 대답할 것인데 어찌 살지 못할까 걱정하 리오? 공부를 짓되 화두를 들 때에 뚜렷하고 분명히 하되, 마치 고양이가 쥐 잡 듯이 할지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노(○奴)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않으리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귀신 굴 속에 앉아 흐리멍덩하게 일생을 지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고양이가 쥐 잡을 때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다만 쥐를 잡아 입에 넣고야 마니, 비록 닭이나 개가 곁에 있더라도 또한 돌아볼 겨 를이 없나니, 참선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오직 분연히 이 이치를 밝힐지니, 비록 팔풍 경계가 앞에 엇갈리더라도 또한 돌아볼 여가가 없나니라.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쥐 뿐만 아니라 고양이까지도 달아나 버리리라. 공부를 짓되 옛 사람의 공안에 대하여 헤아려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 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 지어가는 사람은 문구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공부를 지어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이나 은산 속에 들어 앉아서 다만 살길을 찾는 것 같이 할지니, 살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 가리오? 다만 이와 같이 지어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 나리라. 황벽 선사가 이르시되, '진노(塵勞)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니 승두(繩頭)를 꽉 잡고 한 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 하니 이 말씀이 가장 친절한지라 만일 이 게송으로 때때로 경책하면 공부가 자연히 향상하리라. 공부를 짓되 가장 요긴한 것은, 이 간절 절(切)자이니 절자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치 않으면 해태심(懈怠心)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함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만약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리요? 마땅히 알라. 절(切)자 한 자는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 간절 절자 한 자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 (無記 - 선도 악도 아닌 것), 세 가지 성품을 뛰어넘나니,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선(善)을 생각지 않을 것이요, 마음 씀이 매우 간절한 즉 악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산란심도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昏沈)도 없나니라. 간절 절자 한 자는 이 가장 친절한 말이니, 마음씀이 간절한즉 틈이 없으며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간절하야 '있다, 없다' 하는 등 계교하고 헤아림이 나지 아니하면 외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공부를 짓되 사유하야 시 짓고 게송짓고 문부(文賦)등을 짓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지니, 게송을 지으면 이름하되 시승이요, 문장공부를 한다면 칭하여 문자승이라, 참선과 모두 아무 관계가 없나니라. 무릇 역경계나 순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곳을 만나거든 문득 깨닫고 화두를 들어서 경계의반연을 따라서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너무 애쓰지 말라' 하나니 그 말이 사람을 가장 그르치는 것이라, 배우는 자는 살피지 않을 수 없나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오,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바 '잡독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배우는 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나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 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다 딴 생각이니라.
공부를 짓되 지어서 더 마음 쓸 수 없는 곳과 만 길 벼랑이 떨어진 곳과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과 비단 짤 때 날이 다한 곳에 이르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간 듯 저절로 끝장 날 것이다. 공부를 짓되 영리심(聆悧心)을 가장 두려워할지니, 영리심은 약기(藥忌)가 되느니라. 터럭만치라도 범하면 비록 참 약이 나타나더라도 능히 구제하지 못하리라. 만약 진정한 참선객일진댄 눈은 소경같고 귀는 귀머거리같으며 생각이 겨우 일어날 때에 마치 은산철벽에 부딪히는 것 같으리니, 이와 같은 즉 공부가 비로소 서로 응하게 되리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굴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 '악귀가 서식하는 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가야 비로소 이 곳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한 구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옷입고 밥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 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힐지니, 하루 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웠느니라.
공부를 하되 향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말지니, 향상하지 않거든 향상하도록 하면 문득 이 공부니라. 공부가 향상하지 않는다고 문득 물러서는 북을 친다면 비록 백겁천생을 지낸들 그 어찌하리오? 의정이 일어나 놓아 버릴 수 없는 것이 곧 향상하는 길인, 생사 두 글자를 가져 이마 위에 붙여두되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같이 할지니, 만약 곧바로 달려 집에 이르지 못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으리니 어찌 가히 발을 멈추리오? 공부를 짓되, 다만 한 가지 공안에만 마음을 쓸지언정 온갖 공안에 따져 알려고 말지니, 비록 풀이해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침내 이것이 알음알이요 깨친 것이 아니니라. 법화경에 말씀하시되 '이 법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능히 알배 아니니라'하시고, 원각경에 말씀하시되 '생각하는 마음으로 여래의 원각 경계를 헤아릴진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 마침내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시고, 동산(洞山)이 말씀하시되' 마음과 뜻을 가지고 현묘한 종지를 배우려 할진대 마치 서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동쪽을 향해 가는 것 같도다'하시니, 무릇 공안을 천착하는 자는 모름지기 가죽밑에 피가 있거든 부끄러운 줄 알아야 옳다. 도(道)는 잠시도 여의지 못할지니,가히 여의면 도(道)가 아니요, 공부는 잠시라도 끊이지 못할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는 듯 하며, 또한 머리에 붙은 불끄듯 할지니, 어느 겨를에 딴 일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리오? 옛 어른이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만 사람으로 더불어 싸운다면 마주보고 어찌 눈인들 깜짝임을 용납하리요'하니, 이 말이 공부지어가는데 가장 요긴한 지라 몰라서는 안 되는니라. 공부를 짓되 아침 저녁으로 감히 스스로 게을리 말지니, 자명(慈明)대사는 밤에 조리면 송곳을 들어 찌르시고 또한 말하시길 '옛 사람은 도를 위하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고?' 하셨느니라.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척도 (思惟尺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 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 그가 본 것이요, 길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구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하지 말지니, 염해가고 염해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염하야 미륵불이 나오실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하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각기 화두를 거각할지니 '무(無)'자를 한다면 '무(無)'자 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백수자(栢樹子)'를 한다면'백수자(栢樹子)'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일귀하처(一歸何處)'를 한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의심할지니, 의심이 일어나면 온 시방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며 안팎이 없이 한 몽치가 되어선 하루에 통테가 절로 터지듯 하리니, 선지식을 다시 친견하면 입을 열지 않아도 큰 일을 해 마치리라. 공부를 짓되 잠깐이라도 바른 생각을 잃지 말지니, 만약 참구 하는 한 생각을 잃어 버리면 반드시 이단에 들어가 아득히 돌아오지 못하리라.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맑고 깨끗한 것만 기뻐해서, 순수하고 맑고 티끌이 끊어진 것으로 불사(佛事)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서 맑은 데에 떨어진 것이라 부르는 것이요, 혹 능히 강설하고 능히 말하고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할 줄 아는 것을 그릇 앎으로 불사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 식신(識神)을 잘못 안다 할 것이고, 혹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눌러 망령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불사를 삼으면 이를 불러 바른 생각을 잏은 것이라, 돌로 풀을눌러 놓은 것과 같은 것이라. 또한 파초 잎을 벗겨내는 것과 같은 것이요, 혹 몸이 허공과 같다고 관(觀)하야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장벽과 같이 하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은 것이라, 공(空)에 떨어진 외도이며, 넋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니, 통틀어 말하건대 다 바른 생각을 잃은 때문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정이 일어났거든 다시 그 의정을 깨트려야 하나니, 만약 깨트리지 못한 때에는 마땅히 바른 생각을 확실하게 하도 큰 용맹심을 발하야 , 간절한 가운데 더 한층 간절을 더해야사 옳다. 경산(經山)스님이 말씀하시되 '대장부가 결단코 이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저 할진대, 첫째로 체면을 차리지 말고 성급히 척추뼈를 똑바로 세워 인정에 따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해 오던 것을 잡아 이마 위에 붙여놓고 항상 남의 돈 백만 관을 빚진 사람이 빚쟁이에게 추심을 받되 갚을 물건이 없어 남에게 수치와 욕을 입을까 두려워하야,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바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 것같이 하여야사 비로소 공부를 해 나갈 분(分)이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