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2008. 12. 19. 21: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염불 불보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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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 들숨-날숨 속에 ‘열반적정’ 있다

 

안반수의경은 이른바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관법을 가르친 경전이다. 이 수식관을 설한 안반수의경에는 37종의 관법이 담겨 있어, 이것을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이라는 경의 이름으로 소개했다.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의 수행은 이 삼십칠도품경에 소개된 37종의 관법으로 수련하여 성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시대에 오면 여기에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 가미되어서 누구나 함께 쉽게 빠르게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권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소승시대의 관법의 내용을 알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그 내용을 보이고, 그 중에서 안반수의 곧 호흡을 관하는 수행이 이들 중 어떤 위치에 있으며,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도록 한다.

 

수식관은 부처님 재세부터 강조

 

소승시대나 대승시대나 불교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길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수행을 통해서 성도 하셨고, 역대 조사들이 모두 수행의 성취자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아함경(中阿含經)의 여러 곳에서 자주 보이는 선정의 관법이 유일한 수행의 길이었다. 아함경에 보이는 관법은 삼삼매(三三昧), 사무량(四無量),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 십변처(十遍處), 십상(十想), 십념(十念) 등이 보이는데 이와 같이 숫자로 표시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 크게 조직된 것인 듯 하다.

 

팔리어(pali)로 된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인 아비담(阿毘曇, abhidamma)에서는 십편(十遍), 십부정(十不淨), 십수념(十隨念), 사범주(四梵住), 사무색(四無色),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등 40여개의 대상에 따라서 관하는 수행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을 사십업처(四十業處)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 여러 가지 관법 중에는 실제로 불교도들이 활용하지 않은 것도 있고, 특별히 많이 활용한 것도 있다. 그리하여 그 뒤에 소승불교시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다시 정리되면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내용으로 하여 설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논서인 해탈도론(解脫道論)이라는 논서다.

 

여기에서 이들 여러 수행법을 자세히 설법하고 있다. 어떻게 선(禪)을 닦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탈도론은 세간정(世間定)과 출세간정(出世間定)의 두가지로 나누고 있다. 세간정을 닦음에 있어서는 삼계(三界)에 있어서 선(善)을 향한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도록 하라고 했고, 출세간정에 있어서는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고 지혜를 얻는 수행법을 보이고 있다.

 

세간정이란 세간에서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관법이다. 이러한 세간 속에서의 수행에서는 첫째로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먼저 끊어야 하고, 둘째로는 좋은 벗을 만나야하고, 셋째로는 자기의 성품에 맞게 해야 하고, 넷째로는 40종의 대상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잡아서 그것을 관하고, 다섯째는 적당한 수행처를 정하고, 여섯째는 머리가 길거나 손톱이나 발톱이 길면 그것을 깎아서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일곱째는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관법을 잘 익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 증득하겠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

 

출세간적인 수행법은 세간적인 수행을 거쳐서 보다 높은 곳에 도달되는 것이니, 출세간정이라는 특별한 관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결같이 세간정을 닦으면서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아가면 드디어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세간정이나 출세간정의 수행법으로서 널리 행해진 것은 지(止), 곧 정신통일을 통해서 사물을 꿰뚫어보는 관(觀)법이다.

 

 

♠ 숫자 헤아리는데 모든 정신 집중하라

관법수행은 근본불교와 소승불교의 불교도들이 기본적으로 널리 활용한 것이다. 이들 수행법들은 주로 정(定)인 지(止)와 혜(慧)인 관(觀)을 고루 닦는 것이다. 지가 이루어져야 관이 따른다. 그래서 지는 삼매(三昧, samadhi)를 얻은 다음에 모든 대상을 관하되 그 삼매의 상태를 떠나지 않게 되면, 그때에 지혜가 얻어져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의 그 복잡하고 수많은 수행법 중에서 대표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대표가 되는 것은 바로 안반수의(安般守意)라고 하는 6묘문(六妙門)과 16특승법(十六特勝法)과 40업처관(四十業處觀)이니 이것을 소개하겠다.

 

 

수식관은 초기-소승불교 대표 수행법

 

육묘문(六妙門)이란 여섯 가지 문으로 들어가서 절대 안온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뜻으로 지어진 관법의 문이다. 이 육묘문의 근본이름은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라고 하여, 이 이름으로 된 경전이 『아나파나사티수타(anapanasatisutta)』다.(정태혁 저, 『붓다의 호흡과 명상Ⅱ』, 정신세계사 참조) 이 경전의 내용이 육묘문이다. 여섯가지 오묘한 문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의 천태 지의대사가 가장 소중히 하여 항상 이 관법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역경전에는 『안반수의경』으로 나온다. 안(安)은 ‘an’, 반(般)은 ‘pan’ 사티(sati)는 뜻으로 수의(守意)라고 하여 『안반수의경』이라고 했다. 안은 입식(入息)을, 반은 출식(出息)의 뜻이다.

 

이와같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행법은 열반의 세계로 가게 하는 오묘한 문이다. 호흡을 명상하는 이 오묘한 관법은 여섯 가지 종류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육묘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대비바사론』 권26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에 수(數), 2에 수(隨), 3에 지(止), 4에 관(觀), 5에 전(轉), 6에 정(淨)이 있다’고 하였고, 잡아비심론(雜阿毘心論) 권8에서는 수(數), 수(隨), 지(止), 관(觀), 환(還), 정(淨)의 여섯을 들고 있다. 이들 두 문헌으로 보면 다섯 번째의 전(轉)과 환(還)의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같은 것이다. 한문으로 되어있는 『안반수의경』에서는 환(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이 여섯가지 오묘한 문은 어떤 내용인가?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권 60의 설명에 의하면,

 

① 수(數)란 수식문(數息門)으로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헤아려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헤아리면서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②수(隨)란 수식문으로서 수행자의 마음이 숨과 같이 따라서 떠나지 않게 하여 숨이 나갈 때에는 그것이 시방에 이르고 들어올 때에는 큰 몸에 두루 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③지(止)라는 것은 지문이라고 하는 것이니 생각을 콧등에 머물게 하여 고요히 숨을 생각하는 것이다.

 

④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관문이니, 이 몸은 부정하므로 우리의 생각은 이것을 통해서 고(苦)를 받고, 마음은 덧없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의해서 내 몸이 깨끗하다고 하거나 지금 나는 즐겁다고 하거나 내 마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거나, 모든 존재는 절대적인 실체가 있다고 하는 그릇된 집착을 가지는 것을 없애고, 올바르게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각을 콧등에 머물도록 해야

 

⑤환(還)이라고 하는 것은, 환문(還門)이니,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하는 것에서 다시 전환하여, 우리의 몸은 부정하여 지나친 애착에서 떠나는 신염처와 우리의 몸에 있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고를 받는다는 진실을 철저히 깨달아 그 감각기관으로부터 받는 고통에서 떠나는 수념처(受念處)와 우리의 마음은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심념처(心念處)와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어 인연에 의해서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된 것이라는 법념처(法念處)의 네가지를 닦아서, 드디어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⑥정(淨)이라고 하는 것은 정문(淨門)이니,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마음이 한 곳에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청정한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 숨 잘 쉬면 자비-무상도리 따라온다

 

 

‘아나파나사티’라고 불리는 관법은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 들어있고, 그 효과나 방법도 누구나 다같이 할 수 있는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법에 대해서 불교도들은 너무도 소중히 간직해오면서 이것을 보다 세밀히 분석하여 열여섯 가지로 세분하여 철저히 실천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시 16특승법(十六特勝法)이라고 이름하여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남방불교도들이 위파사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6종으로 설한 것을 16종으로 보다 자세히 나누어 설하고, 다시 37종으로 설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바가 없고, 실제 수행에 임해서는 16특승법 또는 37도품으로 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교의 수행법의 대표가 되는 ‘아나파나사티’의 위대한 공덕을 간단히 보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물의 근본을 알게 된다.

 

우리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자연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오묘하며, 너무도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대생명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숨을 쉬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면 죽고만다. 그렇다면 숨의 출입은 깊은 철학적 종교적 뜻이 있다.

 

숨이 그저 물리적인 생체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는 말하겠지만, 과학 이상의 뜻이 있고, 과학이나 학문이나 사고를 넘어선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뜻이 담겨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니, 입식(入息)은 삶 자체이다. 생명의 시작이요, 생명의 힘이 바로 숨이 들어오는데 있다. 그리고 숨이 나가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나쁜 요소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 이상으로 큰 뜻이 있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숨이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끊어짐과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숨이 나가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 자체다. 숨을 쉬고 있는 우리는 삶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 속에는 삶과 죽음이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삶이란 죽음을 동반한 것이며, 죽음이란 삶을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숨이 들어올 때 내가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숨이 나갈 때 나는 죽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삶이 곧 죽음이요, 죽임이 곧 삶이라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생사가 따로 없는 생사일여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이 집중되어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간다’고 느끼고, 숨이 들어오면 ‘숨이 들어온다’고 느끼면서, 그 숨이 또한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숨에 따라서 느끼는 감각적인 감수작용 또한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그것은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 있게 된 것임을 알면, 이 들고나는 숨에 집착함이 없이 고요히 숨이 끊어진 듯이 들고나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이 때에 숨의 들고나는 것에 대한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어찌 숨만에 국한되랴.

 

둘째는 마음에 집착이 없어진다.

 

숨이 들어오고 또는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극치에 이르면 숨의 출입에 대한 느낌까지 없어진다. 이것이 무념무상의 상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안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뇌의 활동이나 모든 신체기능이 가장 조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있게 되므로 마음의 움직임도 고요히 정지된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비추듯이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집착이란 우리의 감각기능이 밖의 대상에 끌려서 자기자신을 잃은 상태이므로, 호흡이 있으면서도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도 밖의 대상에 끌리지 않고, 의식도 없으면서 있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이 때에는 밖의 어떤 대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오직 자기자신에 안주하고 밖의 대상을 관조할 뿐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없고, 마음 안에 고요히 머물고 있으니, 뜻대로 오고감에 걸림이 없다. 이것이 집착 없는 자기다.

 

이와같이 자기자신의 근본 상태로 돌아와서 객관세계를 보면 나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요,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며, 남의 고락이 나의 고락이다. 여기에서 진실로 자비심이 있게 된다.

 

♠ 숨이 편안해지면 몸-마음도 가뿐

나에게서 숨이 나가고 나에게서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주인이 되었으니 모든 사물은 나의 것이 된 셈이다. 내가 주인이 되었으니, 나 아닌 것이 없다.

 

실체 없는 이 마음이 나의 주인이 되었으니 나의 주인은 무아(無我)의 아인 것이다. 무아로써 아를 보고 무아로써 본체 대상을 보고 있으니, 나 아닌 것이 없고 나와 남의 일체는 무아 그대로다.

 

그야말로 공(空) 그대로이니, 공이 곧 색(色, 일체) 아님이 없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보았으니, 본체 사물의 인연을 본다. 생사의 인연을 보았으니 법을 본 것이 된다. 법을 보았으니 일체의 생멸을 자재로이 하게 된 것이다. 생사가 마음에서 일어난 그림자의 끝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섯 가지 즐거움이나 여섯 가지 괴로움도 모두 끊어진 것이다. 이 어찌 즐겁지 않으랴.

 

네번 째 공덕으로는 그릇됨이 없어지고 청정함을 얻는다.

 

일체의 심의 작용이 없어졌으므로,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그릇된 것이 자연히 없어지고, 어리석은 짓이나 일체의 악함이 억제된다. 마음이 고요한 곳에 머무르게 되면 모든 사물의 실체를 보게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사물을 자재로이 쓰게 될 것이니 이것이 지(止)에서 관(觀)을 거쳐서 환(還)으로 돌아와서 정(淨)에 머문 것이다. 악한 마음을 관찰하여 그것을 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린다. 그 길로 나아가게 되면 도를 이루게 된다. 그것을 자세히 설한 것이 37도품경의 37가지 수행이다. 나쁜 것을 제거하는 것은 깨끗한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된다. 출세간도에서 지혜를 얻는 수행이 바로 이러한 적극적인 방법이다.

 

다섯 째는 인연법에 따르고 그것을 넘어선다. 숨이 들어오는 것은 숨이 나가기 때문이며, 숨이 나가는 것은 숨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이러한 인연법 그대로 우리는 호흡을 하고 있으며, 삶도 그렇고 죽음도 그렇다.

 

그러므로 숨의 출입은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가는 것이며, 죽음과 삶도 생사가 본래 없는 속에 생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숨의 출입이나 생과 사는 인연법 그대로요, 그 인연법을 통해서 생사가 없는 세계, 출입이 없는 세계로 가서 자유자재한 청정한 세계에 머문다. 이것은 인연법에 따르면서 인연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니파나시티는 이러한 세계의 실천이다.

 

호흡을 통해서 호흡을 떠나고 인연을 통해서 인연을 떠났으니, 그것이 지극히 고요한 열반의 세계다.

 

이러한 열반의 세계에도 머물지 않겠다는 것이 대승불교다. 대승불교의 극치에 이른 교설을 보이고 있는 좬금강정경(金剛頂經)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리수 밑에서 붓다가 무식정(無識定, asphanaka-samadhi)에 들어 있을 때 일체제불이 경각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일어나거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무식정이란 사선(四禪) 중의 높은 단계로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통하는 경지다. 그때에 붓다는 일체여래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리에서 일어나서 비상비비상처에 그치지 않고 무진(無盡)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진정이 바로 공의 세계요, 청정한 세계요, 중생구제의 지혜방편이 있게 되는 여래의 세계요, 지혜와 자비가 같이하는 보살의 세계다.

 

이상과 같이 호흡을 관하는 수행의 공덕을 간략히 일부를 소개했으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좬안반수의경좭에서 설하는 아나파나사티법에 대한 소개를 끝내겠으나, 이들 여섯 가지 문은 첫째 문인 수를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점차로 올라가서 청정한 세계에 이르도록 여섯 단계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낮고 높음은 단지 방편에 지나지 않고, 어느 것이나 궁극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수를 헤아리는 수식문(隨息門)에 철저하면 그것이 점차로 수(隨)와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으로 이어진다.

 

여섯 문은 각각 다른 문이면서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간략하게 소승불교시대의 대표적인 수행법의 하나인 ‘아나파나사티’법 소개를 마친다.

 

 

다음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철저히 체계화한 수행법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 들숨-날숨 편안하면 ‘만사형통’

 

16특승법(十六特勝法)은 앞에서 말한 육묘문법을 확대하여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16종의 뛰어난 방법이라는 이름이다. 이 법에 대하여는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권 5,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 달마다라선경(達磨多羅禪經), 잡아함경(雜阿含經) 권 2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 21 등에 기록되어 있고,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권 26, 성실론(成實論) 권 16 등에서 해석되고 있다.

 

곧 입식과 출식에 정신을 집중시켜 한결같이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들고 나는 숨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실제에 있어서 수행자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세면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반복하여 세면 계속 헤아리는 동안에 마음이 집중되어 산란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고 하는 관법의 하나인 수식관(數息觀)을 확대하여 16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다.

 

십륙이란 어떤 것인가? 곧 식단(息短), 식장(息長), 식변신(息遍身), 제신행(除身行), 각희(覺喜), 각락(覺樂), 각심행(覺心行), 제심행(除心行), 각심(覺心), 영심희(令心喜), 영심섭(令心攝), 영심탈(令心脫), 무상행(無常行), 단행(斷行), 이행(離行), 멸행(滅行) 등의 16이다. 이들은 점차로 얕은 단계에서부터 깊은 단계로 들어가서 드디어 열반에 드는 수행인 것이다.

 

이제 이들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겠다.

 

① 단식(短息)은 짧은 호흡을 관하는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그에 따라서 마음이 안정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고 어수선한지를 비추어 보아 이것을 점차 가라앉히는 방법이다.

 

② 장식(長息)은 호흡을 길고 가늘게 하여 그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면 정신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수 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길고 가늘게 호흡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킨다.

 

③ 식변신(息遍身)이란 숨을 들이마시면 그 숨이 온 몸에 두루 차게 된다고 생각하여 수행자는 몸이 허공과 같이 공허하므로 몸의 모든 털구멍으로부터 숨이 들어오고 또다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킨다.

 

④ 제신행(除身行)

몸으로 짓는 업력이 원인이 되는 모든 행위를 없애기 위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관하면, 들고 나가는 숨이 없는 것 같은 무심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이 때에 마음이 안정되어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이 상태를 되풀이하여 익히면, 드디어 몸으로 짓는 업을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몸의 업은 근본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게 되지 않는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⑤ 각희(覺喜)

마음이 안정되고 심의 활동의 살아지면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 때에 자연히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흔들림에서 괴로움이 있는 것이므로 고요히 머문 마음에는 즐거움만이 있다. 그야말로 안온해진다. 온화함에는 편안함이 따르고, 편안함에는 기쁨이 따른다.

 

⑥ 각락(覺樂)

마음이 안정되고 몸에서 기쁨을 느끼면 다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쾌락함을 느끼면 이것이 쾌락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피로한 사람이 푹 쉬고 난 뒤에 몸의 상쾌함과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 때에는 자연히 숨도 길게 내보내게 된다. 마음과 몸이 쾌적하면 후련한 심정이 되고 몸도 쾌적하여 길게 숨이 나간다. 이 단계가 바로 이 ‘각락’의 단계다.

 

⑦ 각심행(覺心行)

앞 단계에서 마음에 쾌감을 느껴서 여기에 맛을 알면 그 쾌감에 끌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탐심(貪心)이 발동한 것이다. 탐심이란 어떤 한가지에 끌려 들어간 마음이다. 기쁨이나 쾌락에 끌려 들어가서 그것을 따르게 되면 그 마음이 또한 업력이 된다. 그래서 그 탐심도 없애야 된다. 그러므로 이 각심행의 단계에서는 마음에 탐심이 발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탐심을 없애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이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

 

 

 

♠ 定-慧는 열반적정 이르는 두 축

 

 

16특승법(十六特勝法)의 나머지 단계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8. 제심행(除心行)-탐욕심을 없애겠다고 하여, 마음의 실체를 살펴보면 잘못된 마음의 상태를 없애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릇된 마음의 상태가 사라지면, 안온한 본래 마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9. 각심(覺心)-탐심을 없애면 마음이 안온하고 고요해진다. 그러나 이 때의 이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안온함과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깊은 마음을 보는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보는 마음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10. 영심희(令心喜)-이 때에는그 아무것도 없는 안온함과 고요함에 끌려서 침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떨치고 침잠함에서 일어서서 환희심을 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침잠하기도 하고 떨쳐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나, 침잠하고만 있으면 그것은 잘못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잠된 마음은 다시 스스로 떨쳐 일으켜야 한다. 그 때에는 오직 환희심만이 일어난다.

 

11. 영심섭(令心攝)-환희심만이 일어나고 있으면 그것도 다시 걷어들여야 한다. 마음이 너무 환희에 들떠있기 때문이다. 너무 들떠있는 것도 안된다.

 

12. 영심탈(令心脫)-마음이 들떠 산란하지도 않고 침잠하지도 않게 잘 조절하여 침잠하거나 들뜨는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에 있게 하는 것이다. 탈(脫)이란 두 극단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13. 무상행(無常行)-마음이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머물게 되면 능히 모든 존재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된다. 곧 모든 존재의 생멸의 실상을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생과 멸의 실상이 곧 무상함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 이르게되는 것이다. 무상행이란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는 진실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14. 단행(斷行)-모든 존재가 무상함을 알게 되면 모든 번뇌가 끊어지는 단계로 들어간다. ‘행(行)이란 마음의 움직임을 말한다.

 

15. 이행(離行)-모든 존재가 무상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들에게 끌리지 않고 이들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16. 멸행(滅行)-모든 것을 떠났으니 마음에 자재를 얻어서 걸리 바가 없다.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멸진된 상태로 돌아간다.

 

이상과 같은 16단계로 수행하는 관법은 1∼4는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것이고, 5∼8은 감각의 심의 활동이 모두 고(苦)임을 관하는 관법이고, 9∼12는 마음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고, 13∼16은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무상(無我)를 관하는 것이다.

 

곧 깨끗하고(淨), 즐겁고(樂), 영원하며(常), 실체가 있다(我)는 네 가지 그릇된 생각을 없애고 일체는 모두 고요(一切皆苦), 모든 정신적·육체적 움직임에서 일어난 것은 무상하며(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이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에서 있게 되었다(諸法無我)는 것이니, 이런 것을 모두 떠나서 열반의 고요함에 이르게 된다(涅槃寂靜)는 네가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관법이다. 바로 사념처(四念處)의 관법이다.

 

열반적정의 세계는 바로 정(定)이라고 하는 세계다. 이 정은 바로 혜(慧)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 없이 혜가 없고, 혜 없이 정이 따로 없다. 정과 혜는 표리의 관계요, 두 다리와 같다. 불교의 수행은 정과 혜를 겸해 닦아서 정과 혜가 서로 떠나지 않게 되는 수행이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 정혜쌍운(定慧雙運)이 이루어진다.

 

『중아함경』 제29 용상경(龍象經)에서 ‘숨이 들고 날 때 잘 머물러 마음이 선(善)함에 이르러 정(定)이다. 용(龍)은 가고 그침에 다 정이요, 앉고 누움에도 정이다. 용은 일체시에 정이니 이것을 용의 상법(常法)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이고 있듯이 걷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항상 정에 머물면 모든 그릇됨에서 벗어나서 있어야할 상태에 있게 되어 드디어는 수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 코끝 숨구멍에 삶의 진실 담겨있다

도는 가까이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우주의 진실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이란 어디인가? 바로 코앞에 있다. 콧구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 들고나는 숨 속에 생사가 그대로 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항상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또 있다. 마음이다. 마음의 움직임은 그대로 우주만유의 움직임이다. 마음의 실체를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마음을 부릴 수 있으면 우주를 내 것으로 하고 우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불교의 수행은 가장 확실한 사실을 통해서 가장 확실한 세계를 실증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이다. 호흡의 들고남은 가장 확실하지 않은가. 마음의 움직임은 일체만유의 주인이 아닌가.

 

불교의 수행은 가장 가까이 있는 진실을 통해서 내가 주인이 되는 수행이다. 지난호에서는 16특승법을 소개했다. 여기에서도 육문법, 곧 호흡의 들고 남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 바탕을 이룬다.

 

이와 같이 호흡은 수행의 가장 기본이 되며, 가장 쉬운 수행법으로서 누구나 다같이 들어갈 수 있는 오묘한 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호흡을 관하는 전형적인 교설의 일부인 칠각지(七覺支)를 소개할까 한다. 이것은 붓다가 호흡을 설하신 원형 그대로를 알 수 있고 16특승법도 모두 여기에 포함돼있는 것이다. 이것은 팔리어 원전 속에 있는 경이다. 그 이름은 『아나파나사티숫타(Anapanasatisutta)』이다. (이 경의 전체는 졸저 정신세계사 간 좬붓다의 호흡과 명상 Ⅰ좭에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사념처(四念處)를 수습하고, 어떻게 널리 익혀서 칠각지(七覺支)를 원만히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몸으로 몸을 따라서 관하면서 전일하게 정진함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그 때 그의 생각은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생각이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으면 그 때에 비구는 염등각지(念等覺支)를 수습하여 그 때에 비구의 염등각지가 원만하게 수습된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이 있어서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써 살펴서 보고, 살펴서 알고 두루 생각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생각이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써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알고 두루 생각하면, 그 때에 택법등각지(擇法等覺支)가 비구에게서 부지런히 행해져서 그 때에 택법등각지가 수습되어 원만해진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저 법을 지혜로써 살펴보고 자세히 알고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집착 없는 정진을 부지런히 닦으면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가 닦아져서 그 때에 비로소 정진등각지를 원만히 수습한 것이 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정진을 한결같이 애써 노력한 사람에게는 집착이 없는 기쁨이 생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정진에 애쓴 사람에게 집착 없는 기쁨이 생하면 희등각지(喜等覺支)가 이루어진다. 그 때에 비구가 잘 수습하면 원만히 수습된다. 기쁨의 마음에는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또한 고요하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기쁨을 얻어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면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라 한다. 그 때에 비구에게서 닦아져서 수습되고 원만하게 되면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에게서 몸과 마음이 고요하면 그 때에 비구에게서 정등각지(定等覺支)가 닦아져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그는 이와 같이 적정에 든 마음을 잘 관찰하여 깨닫는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같이 마음의 고요함을 잘 관찰할 때에 사등각지(捨等覺支)가 비구에게서 닦아져서 사등각지를 익혀 그 때에 비로소 사등각지는 비구에게서 원만히 된다.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이와같이 수습하고 이와같이 널리 닦으면 칠각지를 원만히 하느니라.”

 

 

 

♠ 초기 29종 수행법 戒-定-慧로 귀결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어떻게 닦아 익히고, 어떻게 널리 닦으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히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있어 고를 떠남에 의하여, 탐심을 떠남에 의하여, 고의 멸에 의하여, 버리고 떠나는 곳을 향해서 가는 염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택법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정진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희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경안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고를 떠남에 의해서, 탐심을 떠남에 의해서, 고의 멸에 의해서,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서 가는 사등각지를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이와 같이 닦고 익히면 지혜와 해탈이 원만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세존이 말씀하셨다고 경에 설해져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올바르게 제법을 분별하여 깨달아서 선악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택법각지다. 그 다음에는 선으로 나아가게 되고, 선을 알면 그리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있게 되니, 이것이 정진등각지다. 이렇게 하여 한결같이 정진한 사람에게는 집착함이 없는 기쁨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희등각지다. 이 희등각지에서 얻어지는 집착 없는 기쁨에서 다시 다음 단계인 경안등각지를 수습하게 된다. 마음에 기쁨이 솟아서 더욱 수행정진 하게 되면 마음이 유순해서 마음과 물이 쉬게 되니 이것이 경안등각지다. 이 단계에서는 몸과 마음이 평안하여 모든 인연을 떠나서 어떤 것도 얻음이 없는 단계로 간다. 이것이 사등각지다. 이렇게 하여 마음과 몸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면 삼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등각지다.

 

여기까지 와서 비로소 욕심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의 때가 없어진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나니, 이 때에 바로 나 자신을 찾게 된 것이요, 나를 수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지를 호각지(濩覺支)라고 한다. 이와 같은 칠각지도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떠나는 과정에서 모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이같은 법을 설하셨는가? 보살은 모든 것이 공(空)이라고 관한다. 37종의 관법의 세계는 바로 공의 세계인 것이다. 공의 세계를 알고 증득하면 모든 것이 희론(戱論)인 것을 알게 되고 희론임을 알면 해탈한다. 희론인 공의 세계는 항상 적멸(寂滅)이니, 이것이 참된 법의 모습이다.

 

붓다는 일체가 고요, 제법의 무상이요, 제법이 무아요, 열반이 적정임을 알고, 일체가 희론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37종의 수행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37도품의 수습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인연을 알고 인연법을 따라서 열반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자비심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다.

 

붓다는 자비심으로 사념처(四念處)로부터 사의단(四意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를 통해서 팔정도(八正道)에 이르는 37도품을 설하신 것이다.

붓다의 최초 설법이 나타나는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는 먼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으나, 열반에 들기 직전에는 37도품경을 설하셨다고 한다.

 

붓다가 열반에 드실 때에

“비구들이여, 이제까지 너희들에게 말한 법을 너희들은 모두 잘 가지고 행하여 생각하고 널리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 법이란 37도품이니라”라고 하셨다.(『장아함의 유행경』)

붓다가 입멸 직전에 29종의 행법을 더 설하신 것이다. 이 29종은 붓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근기에 따라서 스스로 실행하고 남에게도 실행하게 할 수 있도록 설하신 것이니, 이들 29종의 수행법은 팔정도로 들어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나누면 37도품이 되고, 37도품을 성취하면 팔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계(戒)·정(定)·혜(慧)로 섭수된다.

 

여기에서 소개한 팔리어 ‘아나파나사티숫타’에서는 팔정도가 설해져 있지 않다. 이것으로 보아서도 ‘아나파나사티숫타’라는 경전은 붓다가 입멸하시기 직전에 비구들에게 수행법으로 요약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그 속에서 이들 29종의 수행이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妙樂의 깊은 경지 넘어서야 수행 끝

 

 

앞에서 소개한 소승불교 시대의 대표적인 수행은 불교의 선의 관법이다. 그러므로 소승불교 시대에는 여러 가지 관법이 행해졌는데, 그것들은 모두 수행자의 적성에 맞는 것을 택한 것이거나, 문제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십변관(十遍觀), 십부정관(十不淨觀), 십수념관(十隨念觀), 십범주관(十梵住觀), 사무색관(四無色觀), 식염상관(食厭想觀), 사계차별관(四界差別觀) 등 사십여 종류의 관법으로 발전되어 수행했다. 이것을 사십업처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먼저 ‘십변관’이란 마음을 열가지 어떤 대상에 집중하여 그것으로써 온갖 곳에 두루 원만하게 하여 마음이 모든 대상에 두루 머물러 통일되게 함으로써 산란심을 떠나고,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한 대상에 집중되면 한결같이 고요함을 유지하여 사선(四禪)이나 오선(五禪)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선이란 정신의 통일이 이루어져서 점차로 깊어지는 네 단계를 말한다.

 

첫 단계에서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 오로지 거기에 집중하면 점차로 욕정이나 악한 마음이 없어져서 고요하게 안정된다. 이 단계가 제1선이다.

 

이 단계에서는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악함이 사라져서 고요하게 되어 이 때에 특별히 스스로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기쁨을 맛보지 않으면 그것은 욕정이나 악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제1선의 단계를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고 한다.

 

마치 등산하는 사람이 높은 산을 향해서 올라가지만 처음에는 힘이 들어서 괴로움을 참고 올라가서 한 고비를 넘으면 그때에 괴로웠던 것이 사라지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서는 아직 떠나지 못했던 것이 모두 없어져서 마음이 깨끗하게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더 깊어지면 안정된 마음으로 깊게 들어가게 되니, 이 때에는 안정된 즐거움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산을 다시 올라가서 샘물을 마시고 쉬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경지를 제2선이라고 하고,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더 올라가야 한다. 샘물을 마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다시 일어나서 더 올라가야 한다. 그 기쁨까지도 없어지고, 특정한 것에서 가졌던 관심을 없애고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서 마음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느낌이 나타나면 더 깊은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 때에는 지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등산하는 사람이 샘물의 신선함도 떠나서 더 높이 올라가면 바위, 풀, 나무, 바람 모두가 신비하고 신선하고 새로운 가치로 나타난다. 이 때에는 모든 상대적인 가치 세계를 떠난 평등한 즐거움에 젖어든다. 그러한 경지가 묘락(妙樂)이라는 경지다.

 

이 묘락의 경지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지를 제3선의 경지라고 하고,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고도 한다.

 

, 그러면 이 단계에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묘락의 즐거움에 젖어서 거기에 빠져있으면 안된다. 더 나아가면 앞에서 맛본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떠나고,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서 만물이 순화되어 한결같은 성취감에 젖어든다. 순화된 고요한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면서 깨끗하게 정화된 것이다. 이것은 등산하는 사람이 괴로웠던 것, 즐거웠던 것, 모든 것을 잊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초연한 마음으로 구름 위를 거닐고 있는 것과 같다. 천하의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마치 맑은 물에 사물의 모습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 때에는 마음의 안정과 맑은 심성이 균등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경지는 묘락의 경지까지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를 제4선이라고 하고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고도 한다.

 

이 경지에서는 천하가 나의 것이 되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바로 발 아래에 펼쳐진 것이다. 이것을 초월이라고도 하고, 청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 수행이 이루어져서 아라한(arhat)과를 얻는다. 이 때에는 모든 번뇌가 사라졌으므로 이구지(離垢地)요,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사념청정지다.

 

 

 

♠ 몸의 부정함 觀해야 모든 집착 끊는다

 

 

지난주 소개한 네가지 단계에서는 욕망이 없어졌으나, 몸의 안락은 남아있으므로, 이것을 색계정(色界定)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몸의 안락이 있으면 마음이 육체의 속박을 받게 되므로, 그 속박도 떠나서 자재로워져야 한다.

 

‘십부정관(十不淨觀)’은 열가지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관법으로서, 예부터 초입문한 수행자가 이 관법으로 세상의 집착을 끊는 관법이다.

 

죽은 시체가 점차로 썩어가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무상하고, 깨끗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관법이다. 이 관법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고 초선에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왜 이런 관법을 통해서 초선으로 들어가는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은 집착때문이요, 집착 중에도 몸에 에고(eogs) 집착이 가장 강력하므로, 몸의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몸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한다. 불교는 허구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그 사물의 실상을 알고, 그것에 걸리지 않게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부정관으로 몸의 집착을 끊고, 사무색관으로 마음의 집착을 끊는다.

부정관을 통해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면 본격적인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때에 신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범주관(四梵住觀)을 닦는다. 이것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가지 거룩한 세계에 머무르게 되는 관법이다. 그리고 사무색관(四無色觀)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무변처(定無遍處), 식무변처(識無遍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관하여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리고 식염상관(食厭想觀)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 배설물 등에 대한 것을 관해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수행이다.

 

또한 사계차별관(四界差別觀)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공(空)의 본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통찰하여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관법이다.

 

이상 간단히 40가지의 내용에 대한 수행을 소개했으나, 이들은 모두 우리의 집착을 끊는 수행이므로, 어떤 대상의 진상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어 집착을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 여러 관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덕에 대해서 『청정도론(淸淨道論)』이라는 책에서는 첫째로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하여 거기에 즐겁게 머물게 된다(現法樂住)고 하고, 둘째로는 비파사나(vipasana,毘鉢舍那), 곧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별하여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셋째로는 신통력(神通力)을 얻는다고 하고, 넷째로는 모든 존재는 더없이 뛰어난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다섯째는 멸진정(滅盡定)에 든다고 했다.

 

이 외에 소승론부(小乘論部)에서는 관법으로서 오정심(五停心) 곧 오문선(五門禪)을 들고 있다. 이 오정심관은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차별관, 수식관 등 다섯 가지 관법이다.

 

이 중에서 부정관은 탐심이 많은 중생이 몸의 부정함을 관하여 그 탐욕심을 다스리는 것이다.

 

자비관은 진심이 많은 중생이 남에게 자비심을 일으켜서 진심을 다스리는 것이다. 연기관은 어리석은 중생이 생노병사가 있게 된 열 두가지 인연을 관하여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계차별관은 집착심이 강한 중생이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거짓 모인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여 제법이 무아임을 알게 되는 관법이다.

 

수식관은 산란심이 있는 중생이 숨의 들고 나는 것을 헤아려서 산란심을 없애는 관법이다.

 

이들 다섯 가지 선법은 소승불교의 선법이라고 말해지나 이들이 대승불교의 선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승불교시대에는 이들 소승불교의 선법이 너무도 복잡하므로 이것을 정리하게 된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선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승불교도 중에서 독자적인 자기의 입장을 내세워 체계화하게 되었으니, 예를 들면 천태(天台)의 관법이 이것이다.


 

♠ 계율은 선정으로 이끄는 수행의 근간

 

천태의 관법은 소승불교의 사념처관(四念處觀), 수식관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독자적인 견해로서 체계화했다. 임제(臨濟)의 간화선(看話禪)도 소승시대의 여러 조사들이 깨달은 세계를 단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관법이다.

 

지금까지 소승불교의 수행에서 몇가지 대표적인 것을 소개했다. 그러면 불교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야겠다. 수행(修行)이라는 말은 ‘닦아서 행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흔들리고 들뜨거나, 침잠하고 어두운 마음이 아니고 밝게 깨어있는 마음이 되려고 하고, 고요히 안정된 마음이 되려고 하는 수행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믿고 실천해야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믿으려면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서 그 마음을 알고 믿게 된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부처님과 같이 마음을 닦아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되려고 노력했다.

 

부처님은 항상 고요한 마음과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셨다. 그러나 몸이 없이 마음이 따로 있을 수 없으므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기의 참된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보게 되었고, 자기를 찾게 되었고, 자기를 올바르게 살리게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으셨다는 것은 자기의 올바른 모습을 깨달으신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진실을 여실히 보신 것이고, 여실히 보셨으니 모든 존재를 절대안온한 세계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연기의 도리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의 도리가 공의 도리요,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있고 없는 도리다. 연기의 도리 그대로, 공의 도리 그대로 사신 것이 부처님의 삶이었다.

 

부처님의 일관된 수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조복하는 수행이었으며 그 과정은 명상을 통해서 삼매의 세계에 드셨고 삼매를 떠나지 않고 삼매 속에서 이 세상을 관하고 그것을 살리셨다. 삼매는 지(止)요, 이 세상을 관하는 것은 관(觀)이다. 지와 관이 동시에 운용되는 삶을 사셨다.

 

부처님의 수행은 한때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길을 택하셨으나, 드디어 이로부터 새로운 길을 개척하셨다. 지(止)에서 관(觀)으로 나오신 것이다. 지관쌍수(止觀雙修)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이다. 삼매는 정(定)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계(戒)가 없이 정이 있을 수 없다. 계는 몸과 마음을 올바른 상태로 가게 하는 인간 훈련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과 몸은 습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조련해서 항상 어디서나 올바른 상태를 떠나지 않게 해야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장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업이 쌓여서 이루어진 훈습을 잘 조복하는 훈련이 수행이다.

 

이러한 자기 조복을 통해서 자기자신에 머물게 되니, 이것이 정이다. 이 때에 비로소 지혜가 나타난다. 이것이 혜(慧)라고 하는 것이다. 계에서 정으로 가고, 정에서 혜로 가는 명상이 붓다의 명상이요, 붓다의 수행이며, 불교도의 수행이다.

 

부처님이 닦으신 수행은 삼매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정(定)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간 관(觀)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 지혜를 얻는 단계를 관이라고 하니 위파사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삼매(samadhi)에 의지해서 제법을 여실히 비춰보고 분별하여 두루 살피는 단계이니, 이 단계에서 올바른 판단과 실천이 따른다.

 

부처님의 마지막 49일간의 명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깨달으신 뒤에 다른 나무 밑으로 가서 49일 동안 숙고하신 것은 바로 세상을 두루 올바르게 관찰하신 것이다.

 

분별을 통한 무분별의 지혜를 얻으신 것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직후에 그를 버렸던 다섯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하신 일은 종교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이 때의 설법 중에서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를 말씀하셧다고 한다. 이 중에서 첫째는 고(苦)라고 하는 진리다. 이것은 두카(Dukkha)라고 하는 것이니, 부처님은 ‘이 세상은 두카 그대로’라고 하시고, 이 두카의 원인은 탄하(tanha)다. 이 탄하를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12연기 실상 바로 보는 게 正見

 

 

우리 인간은 욕망이 추구되는 한 이로 인해서 인간의 삶의 법칙 곧 우주 속의 인간의 질서를 떠나서 잘못된 곳에 머무르게 되며, 그 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두카다.

 

이어야할 우주적 질서를 벗어나면 그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므로 이 두카를 멸하기 위해서는 순서에 따라서 잘 행해야 할 규범이 있으니, 이것이 여덟가지 올바른 길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여덟가지 중에서는 첫째 단계에서부터 점차로 올라가는 순서가 있다.

 

첫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그 다음의 단계를 이룰 수 없다. 그 첫단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정견(正見)이다. 이로부터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순차로 이루어지게 된다.

팔정도의 마지막 단계인 정정이 이루어졌을 때 두카, 곧 고가 없어져서 해탈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 때의 정정은 올바른 삼매요, 위파사나다. 올바른 삼매란 곧 위파사나가 따르는 삼매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함에 침잠해서 이 세상의 진실을 살펴보고 분별하지 못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삼매다.

 

인도에서 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삼매는 마음의 고요함에 빠져들어서 거기에 만족하는 엑스타시(extasi)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기쁨을 맛보고, 그것을 우주로 확대시켜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로까지 가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은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진실 그대로를 보고 사는 것이 목표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이러한 정견에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의 순역(順逆)의 관찰이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밑에서 십이인연을 순역으로 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연기관(緣起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십이인연법을 관하실 때에 이 법을 자기의 마음에서 바로 보셨으니, 그것이 관심삼매(觀心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법이 대승불교로 와서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이르러서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으로 반전된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소승불교의 수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닦아서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니, 이것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이룩하는 길이다. 보시(布施)는 이타이면서 자리가 되고, 지계·인욕·정진·선정은 자리이면서 이타가 되며, 지혜는 그대로 자리이타다.

 

그러므로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 대승의 수행이니,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이렇게 설해지고 있다.

 

옛날 인도에 시비왕(尸毘王)이 보시행을 닦고 있었는데, 비수천(毘首天)이라는 천신이 그를 시험하려고 비둘기로 몸을 바꾸고 제석천(帝釋天)은 보라매로 몸을 바꾸었다. 그런데 보라매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쫓아가자, 비둘기는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시비왕이 이 비둘기를 품고 있을 때에 보라매가 날아와서 그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이 때에 왕이 ‘비둘기가 살기 위해서 내 품으로 온 것을 어찌 내놓을 수 있으랴. 나는 그런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렇다면 당신이 나의 밥을 빼앗은 셈이니 당신은 내가 먹을 밥을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살이라도 베어주시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왕이 그리하겠다고 하자, 보라매는 다시 ‘당신의 살을 비둘기만큼 떼어가지고 가겠소이다’하고 왕에게 저울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왕의 살을 떼어 저울에 달았는데, 왕의 온몸의 살을 모두 떼어달아도 저울의 근량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살을 그대로 모두 떼어 보시하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비둘기와 보라매가 비수천신과 제석천신으로 다시 변신하여 나타나서 ‘대왕의 보시행이 이처럼 거룩하고 철저하시니 그 공덕으로 반드시 성불하겠습니다’하고는 떼어낸 살점을 모두 다시 붙이고 갔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소승불교는 자리로부터 이타가 이루어지고 대승불교는 이타로부터 자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방법은 다르나 모두 같은 것이 아닌가?




        변장술 인가 .. 온세상이 겨울 흔적 가득인데 힌빛눈 위에 발자국 없다 알아차림이 아니되는 건 변장술 인가 멈춤인지 끊김인지 숲 속에 숨은 바람은 말이없고 흔적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