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주인공 수행법이란/대행스님

2009. 1. 5. 11: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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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음·주인공 수행법이란


[질문]

스님께서는 한마음 주인공을 말씀하십니다.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과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공에 놓고 가는 수행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큰스님]

원자 속에서 많은 입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서는 요생각 조생각, 이런 말 저런 말…
그냥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한마음은
광활한 우주를 다 싸안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마음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전체와 같이 돌아가고 전체와 가설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유위세계에서
나무는 산소를 주고 인간은 탄산가스를 공급해 주듯이
그렇게 서로 나누면서 공생·공용·공식·공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에 놓으면
그대로 일체와 더불어 놓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 나가 없이, 말하자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공! 하면 그것도 벌써 이름 해서 주인공이지
대상이 있어서도 아니고,
또 놓는 다, 놓았느냐, 놓을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똥 마려우면 그냥 가서 눌 뿐이지
똥을 눈다, 또는 눠야 하느냐 안 눠야 하느냐 그런 생각하지 않지요.
그와 같이 그렇게 놓고 가는게 수행이요.
수행 중에 첨단 가는 수행이란 말입니다.

또 생각해 보세요.
잘하든 못하든 내가 하고 가는 것이지
딴사람이 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너무 쉬워서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못하는 것도 내가, 잘하는 것도 내가,
망하는 것도 흥하는 것도 내가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잘하려고 하고 흥하려고만 하는데
잘못되고 망하기도 하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나는 주인이 아니라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아하!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구나!
오해하실지 모르지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심부름꾼, 주인이 다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뭉뚱그려 주인공! 했지요.

아무튼 잘하려는 생각, 흥하려는 생각을 한다 해도
결과는 내 사량하고 꼭 들어맞지 않으니까
놓고 지켜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참선입니다.
그렇게 놓고 지켜보면 체험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되는 건 되는 것대로 감사히 생각하며 놓고
안 되는 건 안 되는대로 되돌려 놓으라고 합니다.
안 되는 것도 내가 한 일이고 다 내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내가 사량으로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그 까닭을 모르겠으니까
남의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그럽니다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량까지도 다시 놓으라고 합니다.

흔히들 안 놓아진다고 하는데
그건 믿음이 약한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라면
주인공이 다 알아서 하라는 두둑한 배짱으로
몰록 놓고 가십시오.

세상에 믿는다는 말을 할 때 무얼 믿는다고 해야 옳겠습니까?
이름을 믿겠습니까?
형상을 믿겠습니까?
허공을 믿겠습니까?
믿을 건 자기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스님, 어떻게 놓아야 제대로 놓는 것입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예를 들어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보고
"얘, 걸음마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가르쳐 주면
그 아이가 잘 걷고 그렇지 않으면 잘 못 걷게 되고 그럽니까?
아이는 넘어지든 바로서든 걸음마를 떼어놓고 보지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잘 걷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걸음을 떼 놓기 시작하던가요?
그냥 걷다보면 잘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문자답한다는데
말로 자문자답을 해서가 아니라
절로 눈이 밝아지고 귀가 밝아지게 되어 있어요.
누구에게나 생명의 근본 불성이 있고
그렇기에 모든 걸 '포괄적인 하나'로 놓고 볼 때에
진심으로 거기에다 맡겨 놓으면
안 경계와 바깥 경계에 다 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량으로 이러니 저러니 해서 탈이 생기는데
맡겨놓고 보고 맡겨놓고 들으면
내가 어디에 서야 옳은지,
내가 어떻게 해야 옳은지 하는 답이 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답이 나오는 건 사량으로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걸음이 점점 빨라지게 됩니다.
그러기까지는 체험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믿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럴까 저럴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걸 보면 하나인데
나와 주인공을 둘로 보고 자꾸 머리를 굴리니 탈입니다.
하지만 수 억겁 전부터, 나를 있게 하고 끌고 다닌
주인공을 믿지 못하면 뭘 믿습니까?
저 스님이 가르쳐 주기를 한마음 주인공에다 놓고 하라니까
어디 그렇게 한 번 해보자 한다면 아니올시다 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게, 굳건히 내 근본을 믿어라,
그래야 자기를 발견한다 이것 이지요.
물론 전자에 먹은 마음의 업보가 두터워서
자꾸 엉뚱한 생각이 나기 도 하지만
그럴수록 무얼 믿겠습니까?
허공을 믿을 건가요, 형상을 믿을 건가요?
진짜로 한마음 주인공을 믿고 거기서 깰 의지처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6.25때 보니까 사람들이 보따리 챙겨서 도망을 가는데
법당의 불상은 그냥 놓아두고 도망을 간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찾아와서 복을 달라고 빌고 절하던 불상을
왜 놓아두고 달아납니까?
복을 주시는 부처님이라면 모시고 가야할 텐데 말입니다.
그분들이 실은 자기를 믿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렇게 황급해서 도망갈 때 그렇듯이
죽어도 나, 살아도 나를 믿고 밀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죽는다 산다를 떠나서 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나를 믿지 누구를 믿느냐고 하신다면
수행도, 고의 해방도 다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별심도 놓고 착도 놓고
오직 한마음 주인공에 일체를 놓고 가십시오.
나를 보고 늘 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고 하는데
내 말은 오늘 물어도 같고 내일 물어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