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佛敎)란? / 만공 선사
불교(佛敎)라고 주장할 땐 벌써
불교 교리와는 어긋난 것이니, 불교 교리는
아집(我執)을 떠난 교리이기 때문이니라.
불교의 종지(宗旨)가 악(惡)을 징계하고
선(善)을 장려하는 종교가 아니라,
선악이 다 불법인 까닭에 천당·극락의 즐거움이나,
반대로 지옥의 극고(極苦)한
세계가 다 나의 창조물인 까닭이니라.
먼저 대가(代價)없이는 얻어지지 않고,
노력 없이는 성공이 오지 않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니라.
일체는 그대로 불(佛)이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나 조직을 세워서 가르치지 않고,
기류 차제(機類次第)로 가르칠 뿐이니라.
불교의 유심(唯心)이란
유물(唯物)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니라.
허공(虛空)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을 낳고,
인격은 행동을 낳나니라.
세상에는 물심 양면이라면
우주의 총칭(總稱)인 줄 알지만,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나니라.
불교에서는 신(神)을 초월하여 법신(法身)이 있고,
영혼 위에 진인(眞人)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증득하는 것으로 구경(究竟)을 삼는데,
육신(肉身)과 신과 영혼의 근본이 법신이요,
그 근본을 잃어 버린 육신과 신과 영혼이
서로 교환 이동(交換移動)하는 생활이
사바 세계(娑婆世界)의 인간이니라.
불교는 전인류의 자아(自我)를 완성시키는
교육 기관이니, 다종(多宗). 각법(各法)의 종교가 다
진아 완성의 가교(架橋)요 과정이니라.
불교 교리의 오의(奧義)는 표현할 수 없는 법이지만,
각자가 다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할 수 있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되 주고 받을 수 없는
그 법을 전불(前佛)·후불(後佛)이 상속하여 가나니라.
[만공스님] 산다는 것
성재 서상민
마음에도 없는데
단 하루라도 찬 겨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일이 분명한 것이다.
마음에도 없다는 것은
대화중에 나타내 보이는 동문서답의 내용에서
자신의 의중이 우리들에게 들키는 셈이다.
안으로 숨어드는 자신의 행동이 침묵하는 모습에서
진실을 위장술로 감추려했던 내용으로
자신의 의중이 우리들에게 들키는 셈이다.
마음에도 없다는 것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마음이 뛰어가고 있거나
마음에도 없다는 것은
마음이 급한 일들로 복잡하여 지쳐서 쉬고 싶다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이제 두눈으로는 보고싶지 않다는 것
이제 두귀로는 듣고싶지 않다는 것
이제 두발로 걸어서 다가서지 않겠다는 것
이제 두손으로 잡으려고 하지 않겠다는 것 등
위와같이 극단적인 내용들을 자신이 감수해야하는 일인 줄 알면서
아무것 아니 일처럼
아랑곳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려는 원인들이 허공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미완성의 운명곡으로 연주되어 온 까닭들에 대해서
불평불만으로 깨끗이 청소하려는 시도처럼
비추어 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단순하다.
이것 저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다른 바쁜 일들에 자신이 매달려 가는 까닭이 있는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은
현재의 기억들을 지워내지 않고
또다른 새로운 하루살이를
받아 들이는 이중적이고 바쁜 삶 속으로
자신을 빠져들게 하는
급하게 오는 근거들을 제공받은 때문이다.
그러나 그 떠남들이 영원한 떠남들이
되지 못 하는 것은
밖에 나갔다가 밖의 급한 일들이
마무리될 즈음에
문득 본래의 중요한 일들이
기억에서 생각으로 저절로 나타나는 일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들이 뚜렷하게 보이는 때
정신이 번쩍 확 깨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지켜보고 스스로를 아는 일이 되는 셈이다.
모아둔 재산을 모두 소비하고
빈털털이가 되어
기운 없이 병상침대에 누워있는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생살이에 대해서
모르는 사실들이 없을 정도로 잘 알아서
척척 박사로서의 말들을 잘 토해내고
유희의 즐거움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찾아내고
명분을 만들고
그럴싸하게 포장을 잘 해내는데는
이미 도인 수준급이다.
그 내용들을 합리적으로 실행에 옮기도록
정당화 할 수 있었던 명분이라도
실제적 구체적으로
개인의 인생살이를
0살에서 100살까지를 살펴보면 보잘 것없는
변명인 셈이다.
세상은 불타고 있는 불바다이고
불나비들이
불에 타는 줄 모르고
정지된 시간 속으로 뛰어들었던 방황인 셈이다.
인생에서 산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
그리고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
스스로 자책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일시적인 떠남들은
방황이였지만
본래에서 산다는 중요한 일들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변함없는 그 자리에서
처음처럼 깊은 애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아직 두눈으로 더 보고싶어 하는 일들을 해야하고
아직 두귀로 듣고 더 알려고 하는 일들을 해야하고
아직 두발로 가까이 더 다가서야 하는 일들을 해야하고
아직 두손으로 잡고 꼭 포옹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이 자신에게는 중요한 일들이다.
자신이 머문 곳이 찬 겨울이라는 원인 때문에
자신이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는
떠난다는 것은 영원한 떠남이 아니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까닭으로
한때 길을 이탈 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대목이다.
이런 일을 인생의 아리송 사건이라고 하는데
별것이 아니라고 늘어놓았던 변명들이
자신의 중요한 일에 대한 긍정들을 거부했던 내용임을
스스로 공개한 것과 같은 셈이다.
외부의 급한 일들을 정당화하고
실행한 일들은
마음의 그림자가 춤시위를 벌인 한바탕 소동이였고
긍정에 대한 이유없는 반항의 숨김들은
흔들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중요한 일에 대한 구테타로 나타났던 셈이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처음처럼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는 까닭이 있다.
말 못하고 숨어 있었던 자신의 주장들이
따뜻한 외부온실의 영향들을
직접적 계속적으로 받아내는 과정에서
결국 스스로를 방어해 내지 못하고
외부효과에 흡수되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지만
작은 촛불의 밝음이 햇빛의 밝음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미완성된 자신의 뿌리에서 뻗어나오는
미성숙인 자신의 잎새들이
가상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인식하고
조작하여 꾸며내는 일에 참여하는데
익숙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밖의 급한 일들을
자신의 중요한 일로 둔갑시켜 놓는데
성공을 거두고
구테타에 성공한 개선장군처럼
인생의 한때
자신의 당당한 모습들을 보이게 하는 아리송한 사건들이
연출되는 날들인 셈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중요한 일들을 해내는
시간 속에
장소 속에
빠져드는 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급한 일은
나 없이도 저절로 돌아가는 크고 작은 자리들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생겨나는 포괄적인 전체의 흐름들이지만
중요한 일은
나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지금의 구체적인 자리로서
자기개발을 위하여
꿈을 갖고 실현을 위한 노력하는 자리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맑은 자리를 갖고
사실적이고
공개적으로 밝은 자리에서 주변을 밝히는 중요한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중요한 일을 하는데도
하루 86,400초가 부족할텐데
급한 일들을 만들어 뛰어 다니는 일들은
자신 스스로를 낭비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결국 자신을 위한 중요한 일은
미루고 또 미루어서
만들어 내놓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미래에는 자신이 받아내어야 할 양식이
하나도 없는 셈이지만
한때 유희의 훼밀리들의 결속력 마저도
온데간데 없고
건물 양지바른 빈의자에
의지할 사람없이 나홀로 앉아 쉬는
노인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 둔갑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불타고 있는 오늘 속에서
타협을 거절하고
자신을 지키내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미래의 자신이
머물러야 할 안락하고 편안히 지낼 곳을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시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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