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명백할 뿐이다
"무엇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
"그대의 한 생각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이것이 마구니이다.
그대가 만약 만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은 환상처럼 조화를
부린다는 것에 통달하면, 다시는 하나의 경계도 없고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모두 청정하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는 물들거나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나의 견처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예도 없고 지금도
없으니, 얻는 자는 곧바로 얻을 뿐 시간을 거치지 않으며,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을 뿐,
언제든지 다시 무슨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것을 넘어서는 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이나 환상과 같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모두이다."
법이라고 말하면 이미 법이 아니다.
법이라는 말이 법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말로
써 법을 이해할 수는 없다.
법은 말하고 침묵하고 알고 모르고에 상관이 없다.
사람이 법을 말하고 법에 관하여 알음알이를 지을 뿐이지만, 말
과 알음알이는 마치 허공 속에 울리는 메아리 같이 허망한
것이다.
법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캄캄하거나 한 것이지,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체험하여 법에 통하여 버리면 점차 의심 없이 명백해지지만,
체험이 없이 생각을 따라 배우면 아무리 오래 아무리 상세히 법
을 말할 수 있어도 캄캄한 어둠 속에 있을 뿐이다.
법은 반드시 체험을 통하여 확인된다.
이 체험을 흔히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체험을 통하여 확인되는 법은 전혀 예상 밖의 생소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단순하고 당연하고 이미 익숙하게 사용해온 것이
라는 사실에 놀라게도 된다.
이미 완전하게 갖추고 익숙하게 사용해온 것이긴 하지만, 체험
이라는 확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법은 그저 암흑 속의 비밀
일 뿐이다.
체험은 어떤 과정을 차례 차례 밟아서 하나 하나 얻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달걀이 시간이 지나면 부화하여 병아리가 나오듯이, 법을
체험하고자 염원을 낸 자가 그 염원을 잃지 않고 더욱 간절하고
깊게 한다면 언젠가 그 염원이 부화하여 체험이 나타나게된다.
그러므로 이 공부에는 어떤 정해진 방법이 없다.
그저 간절히 소원하여 그 소원을 버리지 않고 더욱 깊게 하는 것
이 유일한 길이다.
공부의 방법이란 이 소원을 일으켜서 잘 유지하고 더욱 깊게 하
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체험은 다양한 경우에 다양한 계기로 발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와 그러한 계기가 체험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 동안 가져온 염원이 때가 되어서 폭발하는 것이다.
체험할 당시의 계기는 그 폭발을 일으키는 약간의 자극일
뿐이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충분히 불어 넣으면 조그만 외부의 충격에
도 터져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폭발력 즉 바람을 충분히 불어 넣는
것이다.
폭발력은 법을 체험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삶의
일차적 관심을 온통 그 염원에 둠으로써 생긴다.
그 염원의 힘이 커져서 온 몸을 지배하게 되면 마치 바람이
팽팽히 들어간 풍선처럼 되어 조그만 자극에도 폭발하는 것
이다.
폭발의 체험을 하고 보면, 지금까지의 의심이 사라지고 그저
밝고 가볍고 편안할 뿐, 법이라는 이름이나 생각은 사라져
버린다.
이제 법의 힘이 온몸에서 직접 느껴지므로, 법에 관하여 말하
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명백할 뿐이다.
- 임제 의현(臨濟 義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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