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해야 상대도 변한다
어느날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문제를 내셨습니다.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세상의 길에는 돌이나 나뭇조각 같은 것들이 있어서 걸어다닐 때 위험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제자들은 여러 가지 답을 끌어내어 서로 토의한 뒤에 이런 의견으로 정리했습니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을 전부 사슴 가죽으로 덮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필시 불가능할 것입니다.부처님은 그런 답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보다는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의 발을 사슴 가죽으로 싸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사고방식이 잘 나타납니다.
사람의 발을 사슴 가죽으로 감싼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신는 가죽신발의 발상입니다.
사슴 가죽보다 소 가죽을 더 많이 사용하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죽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넘어지면 비탈길을 탓한다. 비탈이지지 않았으면 돌을 탓한다.
돌이 없으면 신발을 탓한다. 사람은 좀처럼 자기를 탓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뜨끔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실패를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곤 합니다.
정치가 나쁘다, 사회가 나쁘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좀처럼 자신의 탓으로는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견해는 다릅니다. 불교에서 대상은 공입니다. 우리는 공한 사물을 각자의 견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게는 구멍을 파고 게딱지처럼 판다."
자기의 게딱지가 작으면 작은 구멍밖에 파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이 냉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차갑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겁에 질려 있기 때문에 사물이 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강하면 사물은 그저 길에 놓인 새끼줄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물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물 쪽을 바꾸려고 해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 쪽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자신의 발에 신발을 신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내 마음을 바꾸면 대상 세계가 변합니다.
이슬람교의 개조인 마호메트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호메트가 기적을 보이겠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어떻게든지 멀리 있는 산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불러오겠다고 했습니다.
"이봐! 산이여! 이리로 오너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호메트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산은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산을 불렀습니다. 그래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호메트는 세 번째로 산을 불렀습니다.
"산이여! 이리로 오너라."
역시 산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표정들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마호메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다시피 나는 세 번 산을 불렀소.
그렇지만 산은 움직이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산을 향해서 걸어갈 차례요."
그리고 그는 산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산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쪽이 움직이면 저쪽이 가까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좀처럼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변하면 됩니다.
그것이 "도일체고액-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극복하는"방법입니다.
<반야심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로 사치야 적, 이미령 역 / 대숲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