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사람/해안대선사의 詩

2009. 3. 9. 09: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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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람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친구가 있다면

구태여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香)을 사르고

산창(山窓)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시(詩)를 쓰는 시인(詩人)이 아니라도 좋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잎에 손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개하고

바위에서 한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도(道)라는 속된 말을 묻지 않아도 좋다.

 

야점사양(野店斜陽)에 길가다 술(酒)을 사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다정히 인사하고

아예 가고 오는 세상 시름일랑 묻지 않아도 좋다.

 

「해안대선사의 詩」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아홉배비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거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

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

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그러냐 안.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데 팥이란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

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

는디 달구 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1998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작  

 

 

 


발걸음 내딛기 전 이미 거기에 이르럿고

혀를 움직이기 전에 이미 말해 버렸다.

 

(未擧步時先已到 未動舌時先說了)

 
무문스님의 게송이다. 음미하는 맛이 좋다. 이 사설시조를 
해남사람 목소리로 낮게 읊조리다 보면 핑그르 눈물이 돈다.
읽는 순간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리라. 무문스님의 게송을
해석하면 본래 맛을 잃어버리듯, 이 시조도 그렇다.
명시란 음미할 뿐 해석하면 오염되는 것 아닐까.

 

 

 

 

이지엽 시인


1958년 전남 해남 출생.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999년 계간 ≪열린시학≫사 주간. 「적벽을 찾아서」등으로

'중앙시조대상'을 수상. '성균관문학상'등을 수상.

시집 : <다섯 계단의 어둠> <샤갈의 마을> <씨앗의 힘>

시조집 : <떠도는 삼각형> <해남에서 온 편지>

시론집 : <한국전후시 연구> <21세기 한국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