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한암대원스님

2009. 3. 10. 0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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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한암대원스님  <반야심경 주해> 

- 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 중에서-

 

본래의 공의 차원에서 입각해서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닌 것을 알게됨으로써 시비가 끝납니다.

다투지 않는 시비가 없는 차원으로 퍼뜩 돌이켜서 걸림 없이 쓸 수 있는 마음을 가리켜

'지혜로 묘용을 쓴다.'고 합니다.

 

묘용을 쓸 줄 모르는 범부들은 끊임없이 두 가지 양변에 매달려 싸우고 시비해서

무한한 지옥의 고통을 만들어 내지만, 지혜의 묘용을 쓸 줄 아는 사람은   공의 차원에서 한 마음

한 몸이 됨으로써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무애자재한 큰 안정과 큰 해탈의

세계를 찰나 찰나에 만들어 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서 화두를 타파하고 이 마음을 깨달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화두공안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서 타파하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화두를 깊이 관하는 것은 내 자성을 바로보고 깨달으려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에 집착하는 데 떨어져서 화두를 가지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화두를 받아서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 가지고 있는 이놈을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어 놓으려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염불하기 위해서'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님 명호를 받아 놓고

'아미타불,아미타불' 하면서 끊임없이 붙들고 잊지 않고 염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뭣고'라는 것을 담아놓고 '무엇인고? 무엇인고?'하면서 '아미타불''아미타불'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은 모조리 전부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뭣고'라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뭐냐?' 라는 것입니다.

'너는 뭐냐?' 라고 물었을때, 대다수가 '나는 영철이지요', 또는 '영자입니다'라고 답하는데,

'과연 그것이 진정 너란 말이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짜로 붙여진 이름일 뿐,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존재하는 이 몸은 무엇인가?

색수상행식이 인연으로 뭉쳐져 존재하는 이몸은 무엇인가?

 

색수상행식이 인연으로 뭉쳐져 존재하는 것으로 따뜻한 기운이 하나만 떨어져 나가도

이 몸뚱이는 멈춰서 못 쓰게 되고 맙니다.

지수화풍의 네가지 원소 가운데 한 가지라도 떨어져 나가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네 가지 요소가 고르게 균형이 잡혀야 기동을 잘 하는데, 중풍이 들었다는 것은

움직이는 기운이 뭔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요소가 다 떠나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 라고 하는 뚜렷한 실체가

어디에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이뭐고" 화두는 바로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 몸 말고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 영원히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이런 저런 법문을 듣고 죽지도 나지도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죽지도 나지도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 생겼으며 어떻게 머물러 있고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육근, 육식 자체도 다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의식 자체도 무너집니다. 의식이 있어서 우리가 움직이고 알고 하는 것인데,

그 의식도 인연으로 모인것입니다. 6근 6식, 의식 자체도 모두 인연으로 모여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조차 다 흩어져 없어지면 그때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파고 들어갈 만큼 파고 들어가 보고 흩어버릴 수 있는 대로 다 흩어보고, 그러면

마지막에 무엇이 있겠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생각 안 하려 해도 안 할수 없을 정도로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간절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뭐고'를 받아서 담아 놓고 '뭔고''뭔고' 되풀이만 하는 것은 화두를 잘못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조그만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뭐 이런저런것이지' 하면 그것은 벌써 10만 8천리나 멀어진 이야기 입니다.

주먹을 들려 한다든지 절을 한다든지 하면서 여하한 행동을 지어서 해보려 하면

10만 8천리나 거리가 멀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지극한 의심을 품어야 합니다.

밥먹고 똥 싸고 잠자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의심이 진정으로 성성해져서 매(昧)하지 않으며,

그 의정을 그대로 깊이깊이 끌고 나가면, 내가 의식이 없는 세계에 가서도 그 의심 덩어리 하나가

그대로 성성하게 됩니다.

깊은 잠이 들었을 때에나 깨어 있을 때나 관계없이 순수하게 성성한 지경에 가면

비로서 해결이 될 수 있는 상황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다 되었을 때에는 마지막에 가서 본인이 어떠한 경계든 경계에 부딪혀서 뒤집어 집니다.

번신일전(飜身一轉)즉 몸을 뒤집어엎어서 한번 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뒤집어졌을때 비로소'아'!하고 본인이 깨달아서 알 뿐 입니다.

그것을 누가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인생사를 확실하게 해결했다고 봅니다.

자신의 일을 해결한 사람, 일대사 일을 해 마친 사람입니다.

 

 

 

    

            

                

 

 

  아깝다는 마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기 싫은 마음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주기 아깝고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까지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부러움이 생기고,

  그것이 지나쳐 질투가 생기고, 미움을 낳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마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진정한 수행을 위해서는

  탐내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無一우학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