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읽고/월호스님
2009. 5. 2. 23:2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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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읽고 * 지은이 - 월호스님
* 1판 1쇄 인쇄 - 2007. 4. 1.
* 1판 2쇄발행 - 2002. 5. 10.
* 발행처 - 도서출판 마음의숲
* 총 251쪽
* 읽은 때 - 4월 4째 주
* 요즈음 나의 독서는 스님들의 글에 편중되는듯한데, 이번에도 고른 이 책도 월호스님으 쓰신 것.
월호스님이라 .... ? 이 스님은 어떤분일까 ....?
제목과 표지의 설명에서 풍기는 냄새가 사뭇 내 입맛을 자극하는데 .....
* 앞표지에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젠가 그 빛깔과 향기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름답고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진정으로 사랑하세요.
치열하세요. 삶을 완전 연소하세요.
* 속표지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책은 죽음을 삶에 비춰보면서 오히려 죽음이 삶을 지탱해주는 친구로,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서이다. 몸매와 피부를 가꾸고 잘 먹는 것에 매진하기에 앞서, 마음을 가꾸고
다스려 평상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진정한 삶이 존재한다.
*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가깝게 있는 벗, 가족, 스승, 직장동료, 이웃 ..... 모두 당신과 함께 동시대를 살다가 떠날 사람들입니다. 치열하게 순간을 살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만이 잘 사는 것(well-being)이고 진정한 웰다잉(well-dying)의 길입니다.
5쪽에
* 인간은 언제나 그의 일생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산다.
- 백스터 -
6쪽에
* 삶과 죽음의 어느 한 순간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상재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있으며,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이 애틋하고 소중한 것이며, 이별이 있기에 지금 나의 사상이 애절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지금의 내가 애틋하고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이곳에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7쪽에
* 지금 이대로의 상황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바뀌고 운이 좋으면, 좀 더 부자가 되거나 좀 더 건강해지거나 좀 더 명예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바뀌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그 마음이 나를 지켜보는 상태일 때 당신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16쪽에
* 주인 된 삶은 ‘~ 때문에(because of)’ 의 삶이 아닙니다. ‘~에도 물구하고 (in spite of)’ 의 삶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위 환경 때문에, 돈이 적기 때문에,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 때문에’ 스스로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주인 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 ....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 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주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21쪽에
* 이 세상은 사바세계입니다. 사바裟婆란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에 온 것은 그럴 만한 인연을 지었기 때문이지요.
32쪽에
*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까요? 무엇보다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에 대한 애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 및 과거에 대한
회한에서 벗어날 수 잇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애착과 회한은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됩니다. 몸에 내가 있다는 것, 한 마디로 나의 몸’ 이라는 소유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지요. 진정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늙거나 병들고 죽어가는 이것이 어찌 내 소유란 말입니까?
37쪽에
* 나는 몸의 관리자였을 뿐입니다. 임시로 관리를 맡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가꾸어주느라 바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 이제 관리 시효가 다해가는 것뿐입니다. 얼마나 개운한 일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놓아두고 떠나라 한다면 무척 서운할 것입니다. 당연히 미련이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관리하고 있다가, 그것을 놓아두고 떠나라 한다면 그다지 서운할 까닭이 없습니다.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38쪽에
* 사실 못 다한 인연이란 없습니다. 억울한 죽음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인과의 법칙에 오류는 없습니다. 이른바 금생과의 연이 다 했으니 갔을 뿐입니다.
다만 지어놓은 업에 따라 또 다른 몸을 받으러 떠난 것뿐입니다.
39쪽에
* 잘살기(wellbeing)에 관한 관심과 더불어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잘 죽기 (welldying)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웰빙의 끝에 웰다잉이 놓여 있으므로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웰다잉을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잘 벗기’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벗는다고 하면, 옷 벗는 것을 연상하게 되지요. 참으로 옷은 잘 벗어야합니다. 몸뚱이는 그야말로 마음의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41쪽에
*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는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지요.
* 더 좋은 옷으로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웰다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더 나쁜 옷으로 갈아입는 경우의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69쪽에
* 불교에서 극락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일종의 중간 목적지입니다.
71쪽에
* 결국 윤회는 불완전 연소하는 삶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과거,
미래, 현재의 어딘가에 머물거나 무언가에 애착한다면, 윤회하게 됩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82쪽에
* 나의 마음이 아닌 외부의 그 모든 것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당신의 마음을 흩뜨리고, 당신의 마음을 흩뜨리고, 당신을 이 세상 중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말입니다.
83쪽에
* 마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참 마음이요, 둘째는 거짓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상시에 나다 남이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고 구분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것은 모두가 거짓 마음입니다. 본래 나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참 마음인 줄 알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이는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인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마음은 할 줄 아는 게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86쪽에
*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닦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을 닦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마음은 다만 쉬어줄 수 있을 뿐입니다.
111쪽에
*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극락이나 지옥을 만듭니다. 내 마음이 극락이면,
나 또한 극락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지옥이면, 나 또한 지옥 불구덩이 속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쫓아가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123쪽에
* 윤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요? 고요한 연못 한가운데 돌을 던지면, 그 파문이 가운데서부터 가장자리로 물결치며 전달됩니다. 이때, 가운데 있던 물 그자체가 가장자리로 옮겨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파동이 전달될 뿐이지요.
윤회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원불멸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있어서 내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이 죽은 후 그 육신에 담겨져 있던 정신적 파동이 다음 생으로 전이된다고나 할까요?
154쪽에
* 파스칼은‘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고 말했습니다. 이는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쉬운 지름길을 두고 그동안 우리는 너무 멀리 돌아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행복을 찾아서 ....
*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그만한 시간을 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TV라도 시청하든가, 신문 잡지라도 뒤적거리거나
음악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155쪽에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잠을 연상해서는 안 됩니다. 잠은 진정한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의 휴식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휴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휴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다름 아닌 ‘깨어있음’입니다.
156-157쪽에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대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비슷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각각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걸어가면 여러 가지 풍경이 펼쳐지지만, 그때그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니다. 관심이 가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모자가 필요해서 사려고 하는 경우, 온통 사람들의 모자만 눈에 들어옵니다. 둥근 모자, 캡 모자, 검은 모자, 흰색 모자 등 형형색색의 다양한 모자들이 시선을 끕니다. 신발을 하나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전부터 그런 신발을 신고 그러한 모자를 쓰고 다녔건만, 나의 눈에 뜨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거길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의미 있개 다가오는 것입니다.
* 세상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세상은 그저 세상일뿐입니다.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서 좋다 싫다 아름답다 추하다고 단정할 뿐이지, 세상은 본래부터 좋거나 싫거나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닙니다. ....................
.........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160쪽에
* 흔히 날씨가 좋다 나쁘다 분별하지만,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는 본래 없습니다. 단지 맑은 날과 흐린날, 비 오는 날과 바람 부는 날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풍가는 이에게는 맑은 날이 좋은 날이지만,말라가는 작물을 지켜보는 농부에게는 비 오는 날이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164쪽에
* 우리의 시선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눈앞을 주시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잘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눈이 부는 게 아니고, 귀가 듣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과 귀는 다만 그 매개체일 따름입니다. 진정으로 보고 듣는 성품은 따로 있는 것이지요.
167쪽에
*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을 고치고, 몸의 행위를 고치면 됩니다. 당신 마음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그리고 당신 몸의 주인 또한 당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운명의 주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172쪽에
* 그냥 일반적인 상식으로 법고는 들짐승, 운판은 날짐승, 목어는 물짐승 그리고 대종은 지옥중생을 제도濟渡하기 위해서 친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마음을 근본으로 합니다. 다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짐승들이란 마음속 중생을 의미합니다.
* 법고는 들짐승의 가죽으로 만듭니다. 법고의 바싹 말림 가죽이 울리는 소리를 잘 듣다 보면 투쟁심이 쉬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롭고 고요해지는 마음 말입니다. 이른바 들짐승이 제도되는 것이지요.
* 구름 모양의 쇠로 만들어진 운판을 치면 날짐승이 제도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들이 날아와 제도된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날짐승이란 바로 나 자신의 들뜬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냥 들떠서 정처없이 헤매는 이 마음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들으면서 차분히 가라앉는 것입니다.
* 물고기 모양의 목어 소리는 축축하고 우울한 마음 혹은 현실을 회피하려는 마음을 끌어 올려줍니다. 마른 나무 둥치 속에서 서로 부딪치는 건조한 음이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지요.
* 마지막으로 대종은 쇳물을 펄펄 끓여 식혀서 만듭니다. 그러므로 대종 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이 식어집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냄과 분노가 곧 지옥중생이며, 이러한 분노심을 가라앉히는 것이 제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는 온갖 중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184쪽에 *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앞사람에게 뺨을 맞아 화를 내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에겐 아무 잘못이 없지만 화를 내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성에 불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 참회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스스로의 자성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189쪽에
* 강의를 하다 보면, 수강자들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진지하게 경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다소 닫힌 마음으로 냉담하게 듣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대기도 합니다. 물론 중요한 구절을 적어서 나중에 음미해 보고 반추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필기에 열중하느라 그때의 분위기에 같이 젖어들 수 없다면 차라리 듣기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열심히 적어대는 분들에게 실제로 나중에 얼마나 복습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마음뿐이지 복습을 하지 못한다고 답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강의에만 열중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192 쪽에
* 내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어여뻐서 사랑하고,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가엾어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실은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9쪽에
* 특별히 누군가가 나에게 고마운 일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그대로를 고맙게 생각함으로써, 실제로 고마워할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주인 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탄생도 당신의 삶도 당신의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감사할 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206쪽에 * 이 세상은 철저히 인因과 연緣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결과果인 것입니다. 인이란 직접적 원인이며, 연이란 간접적 원인입니다. 인이란 주관적 요인이며, 연이란 객관적 요인입니다. 인이란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을 말하며, 연이란 주변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말합니다. 이렇게 인과 연이 만나서 열매를 맺게 되어 나타난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현실을 고치려면 인이나 연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지요.
224쪽에
*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사란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 애정 어린 눈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면 될 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관조적인 사랑 말입니다.
230쪽에
* 세상 사람은 제각기 직업을 가지고 사는데, 어떤이는 성공하고 어떤이는 실패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온 힘을 바친다.
232쪽에
*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햇는데, 알고 보니 용서 받아야 할 자는 바로 저네요.”
어떤 이가 참회하면서 내놓은 이야기입니다. 지금껏 주위에 마음에 안 들거나 미운 이들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내 마음이 진짜 문제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컨대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도의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욕을 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하였을 때, 과연 각각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이는 바로 성을 낸다든가, 어떤 이는 같이 욕을 해댄다든가
할 것이고 혹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으며, 그냥 속으로 참고 지나가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고통은 보통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수용하는 만큼 느끼기 때문입니다.
233-234쪽에
* ‘인연因緣’이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입니다. 예컨대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는 객관적 요인인 ‘연’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거나 참아 넘기거나 하는 내 마음은 주관적 요인인 ‘인’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100에 해당하는 정도의 스트레스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여기에 ‘인’을 1을 곱하고 혹은 2, 3을 곱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각각 100, 200, 혹은 300에 해당하는 만큼의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 마음이 공하다는 것은 결국 모든 스트레스에 영(0)을 곱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지금 당신을 흔들어 놓고 어지럽히고 있는 모든 것을 말입니다.
235-236쪽에
* 불교는 ‘자각신앙自覺信仰’입니다.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불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라는 말은 단순히‘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가 되는 가르침’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타 종교에서 신앙의 목표로서 충실한 신의 ‘종’ 혹은 ‘어린 양’ 이 되고자 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불교만의 특색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는 결코 스스로 ‘신’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의 나라에 태어나 충실한 신의 ‘종’이 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종’이라거나 ‘어린 양’ 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대자재비심으로 중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표현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끝까지 어린 ‘자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인(부처님)’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0^ 양가기 법우님 ^0^ Have a wonderful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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