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春性 춘성春城 스님(1891∼1977)
열반송涅槃頌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여든 일곱 생을 살았던 일이
칠전팔도기(七轉八倒起)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는 것과 같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 횡설수설했던 그 모든 것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붉은 난로 속의 한 점 눈이네
스님은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에서 1891년에 태어나 9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신흥사>에서 출가하였다. 13세 되던 해 백담사에서 주석하고 계시던 만해 스님과 운명적으로 만나 10년간 시봉을 하면서 사상적 토대를 다지게 되었다.
20세에 동선 스님을 계사로 구족게를 받았다. 평생을 무소유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수행자로서 걸림없는 언행에 걸출한 기승奇僧으로 살아가다가 1977년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무소유와 무애행을 일관되게 실천한 그는 만해스님의 유일한 상좌로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정도로 불교 교리에 해박하여 <화엄법사>라는 명칭을 얻기도 하였다. 화엄이란 '근원으로서의 수행의 꽃이 결과로서 부처님을 아름답게 사는 것' 을 말하는데 그는 화엄법문의 대가요, 모든 법문은 촌철살인의 육두문자였다.
거침없는 언행으로 '욕쟁이스님'의 별호를 얻을 정도로 욕과 음담패설을 잘하였다. 그러나 그의 법문은 한마디 한마디가 골수를 파고드는 촌철살인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선문답 하나.
누구라 하면 다 알만한 보살이 자신의 손녀딸을 그에게 보내 좋은 이야기를 듣고 오라고 했다. 그러자 춘성은 단박에 어린 그녀를 보고 "네 좁아터진 그 곳으로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 고 했다나. 눈이 휘둥그래진 처녀는 홍당무가 되어 그만 뛰어나가고 말았다. 춘성은 그저 크고 작다고 만 한 것인데 처녀는 달리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였던고. 춘성의 큰 것은 지혜이자 깨달음이며 좁아터진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녀와 머리와 마음이었구나.
또한 스님은 일제시대 절을 짓기위해 벌목을 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는데 일경이 본적을 묻자 "나의 본적은 아버지 자지다"고 했다. 그러면 주소는 어디냐고 하자 "나의 주소는 어머니 보지다"고 해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평생을 옷 한 벌, 바릿대 하나만으로 지낸 고승의 치열한 무소유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마저 화로속에 떨어진 한점의 눈처럼 부질없다고 한 춘성스님의 열반송은 굉장히 힘이 있으면서 거칠다. 그의 인생이 칠전팔기와 같아서인지 열반도 세수 87세였다.
참조: - 꽃은 피고 물은 흐르는데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