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락으로 가는 길 /대행스님

2009. 5. 11. 11: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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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복락으로 가는 길 /대행스님

 

..... 나는 이 공부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드려 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중생으로서의 나를 되돌려 주긴 공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를 알게 되는 데 까지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한 번 죽는 것이고(거짓나로서), 동시에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참나로서).

그 다음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렇게 '참나'를 안 입장에서 다시 닦아 나가게 됩니다.

비록 자기의 참모습을 알았다고 해도 단지 '안'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이제 번뇌의 큰 집을 다 놓고 푹 쉬게 되었지만,

넓게 볼 때 진리란 자기 혼자서 편안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중생이 생각하는 '나'라는 관념은 없어졌으나,

아직도 삼라대천세계의 모든 생명과 일체가 되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는 자기 자신의 고苦를 넘어섰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고가 없습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그래서 '이뿐인가보다' 하고

편안한 거기에서 머물러 있기가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상태가 아주 기쁘고 반가우니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자기는 달디단 샘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생명의 샘물이지요.

그러니 거기까지 간 것만 해도 스스로 대견스러울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기가 쉽습니다.

더 놓은 차원은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생각도 해볼 수가 없지만,

아래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윗쪽은 어둡고, 아래쪽은 환하니,

거기에서 자기가 제일인 줄만 알기 쉽고, 그 병폐가 수행자를 그르칩니다.

그래서 남을아래로 보면 결국 자기에게 이익될 게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주인공은 '큰 하나'입니다.

모든 생명들이 다 그것을 근거로 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주인공을 사무치게

안 수행자가 '자기 혼자서만'기쁘고 편안할 수가 있을 까요? 그 또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비심이 없는 공부는 작은 공부입니다.

자기 혼자만 편안한 것은 아직 공부가 다 익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그 다음 차원의 과제는 내가 편안한 그것을 넘어서서 '모두 함께 편안한' 차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대비심이 있어야 하고, 수행자로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올바른 수행자라면 결코 어긋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부처님을 향한 이 마음의 길은 진실로써 꾸준히 나아가는 수행자를 결코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는 정도 휴식과도 같은 기간을 지나서 자연스럽게 다음 차원에대해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들이 함께 편안한 것을 염원하게 됩니다.

대비심이 일어나지요. 그리하여 이 위대한 마음의 길, 마음의 법의 다음 차원을 터득해

나가게 됩니다. 체험을 하는것이지요. 다양한 방편을 얻게 되고, 나-너를 떠난 경지에서

크나큰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소위 신통력이라고도 하는 신묘한 능력이 옵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면 그것 또한 놓아 버립니다.

이미 첫 번째 단계에 그 어떤 것이든 다놓아 버리는 공부가 완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다가오든 생각없이 놓아지게 되었으니까 랄입니다.

일체 경계를 다 놓는다고 했을 때의 '일체 경계'란 그야말로 일체인 것이어서 그 어떤

고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나 물질 따위 세간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신통 능력까지도 놓아 버려아먄 할 일체 경계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천안통, 천이통,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등이 오면 그대로 다 자기의

근본으로 되돌리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자와 보통의 영통자와 다른 점입니다.

수행의 결과로서가 아니더라도 그런 영통이 오는 경우가있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 그 삶은 모든 경계가 나와 둘이아니라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을 되돌려 자기의 근본 자리에 놓아 버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비한 힘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거야말로 보물을 가지게 되었구나!'하겠지요.

그러나 자기의 근본이 허약하거나, 신통능력까지도 결국 나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모르는 이에게 있어서 그런 힘은 득보다 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이들이 혹은 점장이가 되고. 혹은 미치광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는 먼저 철저하게 그 점을 알아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점을 모르고 있다가는 끝까지 나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자유는 커녕 오히려

부자유 속에 빠져 버리고 압니다.

언제나 신비하고 반갑고 위대하고 찬란한 것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 속에 나의 이기심이 숨어 있고, 그것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이 덜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것을 보아도 아주 비천한 것을 볼때와 다름없이 무겁고도 평온한 마음,

어떤 더러운것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볼 때라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은 채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그것이 확고하게되어 있지 않으면

큰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행자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마음이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닥쳐오는 신통력까지도 다 자심으로 돌려놓다보면 무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있긴 있는데 스스로 고요할 뿐이기 때문에 무심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가 있느냐 없느냐 따위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그 무심이 점점 깊어져가게 되지요. 무심이 제 스스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가 있을까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있다면 그것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나인 것이니,

그럴바에는 차라리 없다는 것이 맞겠고 없다고 하면 나라는 중심이 없는데

어떻게 생활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되물을 테니 있다고 해야만 하겠지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무심 그것도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텅텅 빈 상태-없어서 텅빈 게 아니라 너무나 자재로와서 텅빈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모든 경계를 자심으로 돌리고. 그게 되면 자심을 무심으로 돌리고,

다시 그 다음엔 그 무심조차 녹아져서 공에 이르는 것입니다.

차원은 각각 다르더라도 방향은 하나지요. 마음 안으로 향하는 것, 둘로 보지 않고 일체를

나로 보는 것, 놓아 나가는것....

그렇게 해서 두 번째 단계에서 는 오신통을 벗어나게 되며,

뿌리깊게 남아 있는 마지막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누진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질문 ) 그렇다면 오신통과 마지막 신통인 누진통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주 다릅니다. 오신통은 무심이 되지 않고도 간혹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은 무심 이후에야 나타는 것이나까요. 또 누진통은 오신통 모두를 합친 것이면서,

그것들에게 질서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누진통이 성취되었을 때 오신통은

제가 있을 자리에 자리잡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질문 ) 그때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됩니까?

 

그렇지요. 시공을 초월한 차원에 들게 됩니다. 대비심과 대지혜가 완성된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두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크게 또 한번 죽는 셈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작게 죽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크게, 아주 크게 죽는 것입니다 .

차라리 죽는다는 말조차도 거기엔 알맞는 말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개인으로서의 나로서 죽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생명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크게 죽은 다음에야 비로서 정작 신통력을 굴릴 수가 있어집니다.

언젠가도 이야기 했었지요? 통 밖에 나와야 통을 굴릴 수가 있다고요.

통 속에서는 통을 굴릴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신통력도 그렇습니다.

신통력 속에서는 신통력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신통력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신통력이 나를 굴리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오신통만으로는 도가 되지 못한다고요. 거기까지 '나 아닌 나'가 되지를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 아닌 나', 모두의 아픔을 함께 앓는 '나'가 되었을 때, 그 '나'는 '우리 다 함께'입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이기에,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입니다.

 

' 우리 다 함께' 복된 상태를 염원하는 보살만이 참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만 ' 복된 길을 찾아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천만 가지로 뛰어다녀도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오직 보살심, 오직 '우리 모두 함께 복된길'만을 통해서 나의 참된 행복도,

이 세상의 참된 행복도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보살심으로, 이기심이 텅빈 상태에서야 비로소 신통력은 부려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그 신통력이 세상을 나쁘게 하는 쪽으로는 도무지 쓰여질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 개인을 위해서 쓸 수 있을까요? 자기 개인만을 떼어서 생각하는 습관은

이미 아예 사라져 버렸는데 말입니다.

 

그는 오직 더불어 좋은 일을 위해서 살기로 철두철미 되어졌습니다.

그건 요지부동입니다. 천지가 무너져서 먼지 알갱이같이 산산조각이 나도 그건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위헙도, 그 어떤 유혹도 그에게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위협을 두려워하고, 유혹에 넘어가는 따위의 근거인 미망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차원에서 신통력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갑니다.

풀잎 하나, 벌레 하나까지 다 포함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야말로 보임이요, 만행인 것입니다.

 

질문)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가지가 2단계로군요.

 

그렇습니다

 

질문) 그럼 이젠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수없는 체험과 점검과 만행을 하다 보면 마침내 그것이 크게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한 보살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살은 이제 세상을 제도하려 나서게 됩니다. 물론 색신을 지니고 있지만,

그 색신으로서가 아닙니다. 색신과 물질로 제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원융하게, 자연스럽게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입니다.

보살은 마음의 법리로써 세상을 건지게됩니다

 

질문) 큰스님께서는 그 단계를 '크게 나투는 단계'라고이야기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마음으로써 하기 때문에 나툰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참만을 보고 참만을 삽니다. 앞과 뒤가 끊어져 있습니다.

아무런 여한도 미련도 없습니다. 아무런 바램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이 세계의 수많은 중생. 보살. 부처와 한몸 한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제도합니다. 본래 부처이면서도 온갖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자기 본래 모습을 보도록 여러가지 방편을 냅니다. 오직 그것 한 가지가 보살의

모든 행위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무엇을 해도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하는, 그것을 위한 일뿐입니다.

 

그게 단 하나의 기준이라면 기준이지요. 그러나 그 기준점에서 생각을 내서 제도가

된다기보다, 공적하게 있다가도 하나하나 일에 닥쳐서는 불이 번쩍 일어나듯

제도를 한다고 말하는 표현이 옳겠지요. 아니 제도를 한다기보다 저절로 제도가 되어집니다.

 

질문)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되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인위가 없는 ...말하자면 두 존재가 마주치고, 어떤 일과 부딪치게 되면 진리의 법칙이

저절로 작용이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산은 푸르르고 물은 흐른다는 겁니다. 진리의 바퀴가 돌아간다고도

하지요. 닥쳐오는 대로 갖가지로 저절로 응해서 판단이 개재될 여지도없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저절로'요, '그냥'이지요. 이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는 중생과 보이지 않는 중생, 유위법과 무위법을 모두 아우르게 됩니다.

 

질문)

용에 대해서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용이란 체體라는 용어에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용은 한편으로는 불보살의 교화방편이라는 듯으로 쓰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은 무루법을 완성하지 못한 수행자(또는 영통자)가 삿되게 신통력을

쓰는 것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신통력을 활용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다시피 하고 있는데요....

 

이미 말씀드린 무심 이후에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것은 꼭 필요한

제도 방편이 되겠지요. 그리고 수행 과정 중에도 점검과 체험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근본은 절대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까지 마음공부의 단계를 말씀드렸지만,

굳은 신심을 지닌 수행자에게는 단계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 도 그렇습니다.

불보살이 아니더라도, 또 깊은 수행을 못 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주인공을 믿는 깊은 신심으로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힘은 이 우주 법망에 속속 들이

전달이 됩니다. 중생의 한 생각, 한 행위마다 법망에 걸리고 기록되지 않는 바가 없지만,

특히 주인공을 믿는 마음에서 남을 위한 한 생각을 낸다는 그 공덕과 위덕은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지금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그대로 신묘한 용입니다. 단지 중생들이 그걸 모르고 신기한 것을 찾는 것이 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