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을 일깨우며 <수필집 '바다칸타타'중에서>

2009. 5. 12. 10:06일반/생활일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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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들꽃사랑마을 

 

 

 

망각을 일깨우며 <수필집 '바다칸타타'중에서>

 

글: 박종규, 낭독: 이남희, 시낭송: 고은아

 

 

 

어머니…….

그래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다.

내 살아오는 동안 가장 슬펐던 때는 어머니를 영영 떠나보내는 순간이었다.

삼일 밤낮을 옥상에 올라가서 혼자 울었다.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은 망각 속에서 살아가는가.

그 망각이라는 것은 귀했던 일도, 좋았던 추억도, 슬펐던 일, 사랑했던 모든

것 까지도 사람이 세월의 둔덕을 넘을 때 모두 함께 남겨두고 넘어가게 하는

것인가.

 

어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새삼 그 인자했던 얼굴을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정이 우러나는 이미지로 남아있겠지만 내 어머니는 참

넉넉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친구들이 자기들 엄마보다도 내 어머니를

더 좋아했을 정도로 평생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셨던 어머니셨으니.

괴팍한 성품의 아버지를 만나서 갖은 고생을 다 했으나 항상 순종하는 아내로서

자리를 지켜낸 분이었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을 때는 막노동까지

하셨다. 나의 슬픔은 그런 내 어머니와 했던 약속으로 인하여 더욱 절절했다.

 

나는 어머니께 약속을 한 가지 했었다.

그 약속은 너무나 지당하게도 얼른 커서 성공하여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특하게도 고학을 하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내 약속의 날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듯 했다.

장교복을 입고 입영할 때,

나는 어머니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전역을 수개월 앞둔 어느 날, 집에서 전보가 왔다.

이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그 이모는 슬픈 사연을 가진 분이었다.

육이오 동란 중, 이모의 오빠가 휴가를 왔는데 전시였기 때문에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이 총기가 오발사고를 일으켜 이모의 정강이를 관통한 것이다.

집안에 하나밖에 없던 오빠는 전란 중 전사했고,

이모는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이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결혼이

늦어지더니 결국은 어느 집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후처노릇을 끝낼 수밖에 없었고, 이모는 그 집에서

나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외할머니까지 돌보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

중이었다. 어머니는 늘 당신의 동생 걱정을 안고 사셨다.

물론 내게도 참 좋은 분이어서 고학하는 내게 위로를 많이 해 주셨다.

부대로 날라 온 전보에는 사인死因이 나와 있지 않았다.

 

전화도 귀했던 시절이라 휴가를 내어 집에 가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저녁녘에 도착해 보니 집은 텅 비어있었다.

다들 인천의 이모님 빈소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군화 끈을 풀다말고

인천으로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구두끈을 조였다.

바로 그때, 앰뷸런스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더니 대문 앞에서 멈추고 있었다.

난데없이 우리 집에 웬 앰뷸런스일까 머리회전이 안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대문이 열리고 남동생이 들어서면서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형, 어머니 돌아가셨어!”

말도 안 나왔다. 그럼 이모가 아니고 어머니였구나, 내가 충격 받을까 봐 이모라고

한 게로구나 싶었다. 앰뷸런스에서 흰 천을 씌운 들것이 내려지고 있었다.

나는 달려 나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놀랍게도 아직 따스했다.

 

“아직 살아계시잖아?”

“운명 하셨어. 한 이십 분 됐어, 형.”

“뭐라고? 그럼 이모는?”

“이모님도......”

이모는 교통사고를 당하신 거였다.

 

평소에 이모 걱정을 많이 하시는 어머니에게 이모의 사고를 알리면 충격을 받으실

것이 뻔 해 동생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마침 외할머니는 많이 늙으셔서 거동까지 불편하셨기 때문에 충격이 훨씬 덜할 수

있었다.

 

동생과 함께 인천의 이모 빈소에 간 어머니는 이모의 영정사진 밑에서 어머니를

슬피 부르셨다고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친척이 외할머니가 아니고 이모라고 귀띔을

한 순간 영정사진을 다시 올려다보던 어머니는 숨이 가빠지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고 한다.

 

서둘러 응급실로 갔으나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시든지 하라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응급차로 서울 큰 병원으로 가던 고속도로 상에서 끝내 숨을

거둔 것이었다.

줄초상이었다. 슬픔은 배가 되었고, 불쌍한 이모님께는 가보지도 못하고 귀대를

해야 했다. 그 때 나는 사람의 운명, 팔자 같은 것을 생각했다.

힘든 세상만 살고 이제 자식이 좀 편하게 모실만 하니 세상을 뜨신 어머니.

세상에는 원인만 있고 결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선善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내가 재수하던 시절, 딱 1년간 교회에 다녔다.

오직 자식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였다.

사느라고 하나님을 영접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장례식 날 목사에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착한 분이셨고, 남에게 베풀기 만 하던 사람인데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목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섭섭했다. 나는 기독교와 유교,

불교가 혼재된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에게 좋은 것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내 성장과정에서 나를 지켜주었던 기독교를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가 구원을

못 받아 지옥에 가신다면 나도 그리 가리라 생각했다.

 

지금 내 아내가 그 시절의 어머니역할을 하고 있다. 아들은 나보다는 아내를 더

따르는 편이다. 아내의 어딘가에 어머니의 좋은 성품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아내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갈 것이고, 아들은 잠시 슬픔에 겨울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아들이 성장한 뒤 아들의 기억 속에서 아내는 또 얼마나 남아질 수

있을까.

 

망각은 슬픔을 잊게 하고 과거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지금의 모든

일들도 결국은 망각의 광주리에 담겨지리라.

 

* 아래의 시는 내 어머니에게 드리는 사모곡이다.

 

 

그리하리라

하늘바다

그 넓은 가슴에 빠져

섧도록 소리치고 싶다

 

쩌엉 쩌엉 하늘 가르는

외침하나로

그대 곁에 가고 싶노라고

그대 깊음 깊고 깊어

 

태산아래 골짜기라도

하늘 가득 담긴 그 담소에 빠져

나 영영 수장되고 말지라도

 

그대 사랑 거기 있었음에

처음부터 수평으로 하나였던 당신과 나

다시는, 다시는 바람이 나누지 못하도록

두 손 길게 늘려 동여매리라

 

눈빛 눈빛으로 일군 불꽃 타올라

하늘 바다 다 말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