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함정
수행을 잘 하려고 애써서 수행력이 돋보이더라도,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애써서 금욕적인 수행자가 되더라도,
무주상 보시를 늘 베풀고자 애써서 수많은 물질을 보시하더라도,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려고 애써서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이가 되었더라도,
그 수행에 그 금욕에
그 보시에 그 가난에 마음이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속임수에 불과하다.
스스로도 속도 세상도 속이는 것일 뿐.
때때로 수행 잘 하는 수행자도 바로 그 '잘'하는 수행력에 스스로 속고 마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수행 '잘' 하는 수행자도 일 없는 수행자에 견줄 수 없다고 하듯, '잘' 한다는 데는 큰 함정이 있다. '잘' 한다는데도 치우치거나 집착됨이 없어야 한다.
하물며 '잘'한다는데 스스로 얽매이고, 남들에게 '잘'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억압시키는 어리석음을 수행자는 잘 지켜보고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꼭 수행자 뿐이겠는가.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를 '그 위치'의 어떤 사람으로 고정짓게 되고, 그 위치에서 해야할 몫, 혹은 상을 정해두고 그 몫에, 그 상에 얽매여 '그 위치'를 '잘' 사수하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박탈시키고 마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사장, 회장, 교장, 스님, 성직자, 장관, 선생님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멋지고 높은 자리이지만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상에 갇히게 되면 여간 답답하고 형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처신해야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또 그렇게 처신해야만 '잘'하는 것이란 상에 갇혀있을수록 우리의 몸도 정신도 자유를 잃고 창의를 잃으며 틀에 박힌 채 그 '위치'에 맞춘 연극만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어진다.
그것처럼 부자유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세상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틀'이나 '위치'나 '방편'이나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형식, 관념에서 자유롭고, 자신 스스로의 빛깔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야말로 내적인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준다.
안과 밖이 분열되지 말라. 보여지는 외양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격차가 커질수록 내 안의 참나, 불성이며 신성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수행력도 금욕이며 가난도 보시행이며 이타행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일어남으로써 쉽고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억지가 들어가고 강제가 들어가며 잘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앞서면 설사 잘 해 보이기는 할 지언정 그로인해 마음은 부자유하다.
지금 내 모습에 내 스스로 자유함을 느끼는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스스로 답답함을 알면서도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 무엇 때문에 누르고 억압하며 하기 싫은 연극을 계속 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을 속이지 말라.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자유로이 자신의 참모습을 마음껏 드러내며 살라.
옮겨 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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