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6. 21: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파도 / 조오현
밤늦도록 불경(佛經)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오늘 / 조오현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할 만한 오늘.
사랑 / 조오현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시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하나님의 떡잎입니다.
부처님의 떡잎입니다
琵瑟山(비슬산) 가는 길 / 조오현
琵瑟山 구비 길을 스님 돌아 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韻 들릴까
끊일듯 이어진 길 이어질듯 끊인 緣을
싸락 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 두루 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맷새 한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아지랑이 / 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떠 흐르는 수람 / 조오현
가을이 소나기처럼 지나간 그대 정원에
열매 하나가 세상의 맛을 한데 모아
뚝하고 떨어지는구나
다 쭈그러든 모과하나.
* 수람
(사람의 마음을) 끌어모음, (민심, 사태를) 수습하다라는 뜻
파지把指 / 조 오 현
조실스님 상당相堂을 앞두고
법고를 두드리는데
예닐곱 살 된 아이가
귀를 막고 듣더니만
내 손을
가만히 잡고
천둥소리 들린다 한다
일월日月 / 조오현
하늘은 저만큼 높고
바다는 이만큼 깊고
하루해 잠기는 수평
꽃구름이 물드는데
닫힐 듯 열리는 천문(天門)
아, 동녘 달이 또 돋는다.
출정出定 / 조오현
경칩, 개구리
그 한 마리가 그 울음으로
방안에 들앉아 있는
나를 불러 쌓더니
산과 들
얼붙은 푸나무들
어혈 다 풀었다 한다.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 펼쳐 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로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
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은 빛을 서로 비춰 주나니...
관음기觀音記 / 조오현
촛불켠 꿈은 흘러 연꽃으로 물들어도
마지막 목욕하고 앉지 못할 저 연대 (蓮臺)여
설움의 소리를 듣고 차마 못갈 보살
손에 쥔 백팔염주 헤아릴 수록 무거움은
흩어진 상념들을 알알이 뀌움일레
달 뜨는 뜨락에 서서 지켜보는 저 정토 (淨土)!
내가 쓴 서체를 보니 / 조오현
지난 날 내가 쓴 반흘림 서체를 보니
적당히 살아온 무슨 죄적(罪迹)만 같구나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
이날토록 아린 가슴을 갈아놓은 피의 먹물
만지(滿紙)는 하늘 펼쳐놓자 역천(逆天)인가 온몸이 떨려
바로 쓴 생각조차도 짓이기고 말다니!
견춘3제見春三題 / 조오현
1. 봄의 불식
이 몸 사타구니에 내돋친 붉은 발진
그로 인하여 짓물러 다 빠진 어금니
내 불식 하늘 가장자리 아, 황홀한 육탈肉脫이여.
2. 봄의 역사
내 말을 잘라버린 그 설도舌刀, 참마검斬馬劍도
내 넋을 다 앗아간 그 요염한 독버섯도
젠장할 봄날 밤에는 꽃망울을 맺더라
3. 봄의 소요
목마르다, 목마르다. 꽃의 내분비에도
해마다 봄이 오면 잦아지는 내 목숨의 조고凋枯
올해도 한바탕 소요로 꽃은 올 모양이다
내 몸에 뇌신雷神이 와서 / 조오현
이날 내 몸은 미친 하늘 뇌신이 와서
세상을 다 때려 부수고 서천 번개로 가자 한다
번개 그 불빛만 봐도 나는 잘 갑시는데
이 모진 죽살이의 질긴 피죽 벗겨 보면
한치 흙도 파지 않고 인도에도 묻은 지뢰
한자국 높디딘 생각은 저 가교를 밟고 갔네
슬픔은 날이 날마다 낙엽처럼 쌓이는데
끝까지 달아봐도 끝내 모를 자유의 근량斤量
먼 훗날 홀로 남아서 오늘을 점두點頭할 바위도 없다
몽상 / 조오현
산에는 백도라지 들에는 민들레꽃
내 고향 아득한 기억은 우물 속 드리운 얼굴
담장가 등돌리고 섰던 순이 한 번 만나고 싶다.
물올라 싱그러운 쑥 내음은 나도몰라
십리도 까마득한 언덕 달은 너무 밝아
못 지울 영상을 밟고 몰래 나온 조그마한 마을.
마셔서 차지 않고 못내 비운 이날 밤은
어딘지 시름 번질 속 쓰린 항아린가
깨고난 잠의 자리엔 메아리만 감도네.
잘못 살온 세상이라도 정화수 끝내 말고
초 한 자루 밥 한 그릇 외할머니 빌어주신
그날 그 돌상 곁에서 놀 수 없는 왕자여
계림사 가는 길 / 조오현
게림사 외길 사십 리 허우단심 가노라면
초록산草綠山 먹뻐꾸기가 옷섶에 배이누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흰구름도 빛나고
물따라 산이 가고 산을 따라 흐르는 물
세월이 탓없거니 절로 이는 산수간에
말없이 풀어논 가슴 열릴 법도 하다마는
한 벌 먹물 옷도 내 어깨에 무거운데
눈감은 백팔염주 죄일사 목에 걸어
이 밝은 날빛에 서도 발길이 어두운가
어느 골 깊은 산꽃 홀로 피어 웃는 걸까
대숲에 이는 바람 솔숲에 와 잠든 날을
청산에 큰절 드리며 나 여기를 왔고나
재 한줌 / 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줌뿐이네
무자화無字話 1 / 조오현
하늘에는 손바닥 하나 손가락은 다 문드러지고
이목구비도 없는 얼굴을 가리고서
흘리는 웃음기마저 걷어지르고 있는 거다.
무자화無字話 2 / 조오현
걷어가고 있는 거다. 걷어가고 있는 거다.
때아닌 저 바다의 적조, 그리고 또 포말들을
이 겨울 밤의 마적이 걷어가고 있는 거다.
무자화無字話 3 / 조오현
누가 건방지게 침묵을 하는 거다
온 몸이, 마른 하늘이 흔들리는 이 진렬
이 한낮 깊은 내 오수를 흐너뜨리고 있는 거다.
무설설 1 / 조오현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이 머리 풀고 상여잡고 곡하기를 '불집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용기로 용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대요
***
느긋이 설악도인이다.
한국 전래의 기능 보유자들에게는 고집스러운 도 (道)가 배어난다.
독짓는 영감에게는 평생을 길러온 옹기 굽는 불에 견주는 노여움도
있어야 했다. 그런 이승의 것을 넘겨주고 가라는 것이 저승으로
보내는 절절한 마음이다. 옛 시절의 이승과 저승은 오늘처럼 건달
이 아니다. 다시 만날 혼백이 있고 생령이 있다. 그래서 망 (亡) 은
생 (生) 이기도 하다. / 고은 시인
절간 이야기 / 조오현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
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로의
그 신사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앉아있기에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간 이야기 3 / 조오현
아득한 옛날의 무슨 전설이나 일화가 아니라 요 근년에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공부하는 암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물론 숲속에 파묻힌 돌담 주춧돌도, 천년 고탑도 비스듬한 그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밟히고 먹뻐꾹 울음소리가 옷
자락에 배어드는 심산의 암자이지요. 그 암자의 마당 끝 계류가에는 생남불공生男
佛供 왔던 아낙네들이 코를 뜯어먹어 콧잔등이 반만큼 떨어져나간, 그래서 웃을 때는 우는 것 같고 정작 울 때는 웃는 것 같은 석불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암자가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그 두루적막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노비구니스님이 그해 늦가을 그 석불 곁에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을 때 다람쥐 두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돌담 속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옳거니! 돌담 속에는 도토리가 많겠구나. 묵을 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어야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중얼거린 노비구니스님이 돌담을 허물어뜨리고 보니 과연 그 속에서는 도토리가 한 가마는 좋게 나왔지요. 그런데 그 한 가마나 되는
도토리를 몽땅 꺼내어 묵을 해 먹었던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놈의 다람쥐 두 마리가 노비구니스님의 흰고무신을 뜯어먹고 있었답니다. 그 흰고무신을 뜯어먹다가 죽었답니다.
절간이야기 29 / 조오현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어느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위해 담장가
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 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덩굴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놈 청개두리를 제題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 볼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엿습니다.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劫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조오현 시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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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16회 공초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무산 조오현 시인은 말과 글을 버려야 하는 스님이 시를 써서 상을
받는다는 게 부끄럽다며 겸사의 말부터 꺼냈다.
그래서인지 1978년 첫시집 '심우도(尋牛圖)'를 상재한 이후 30년
가까이를 절필하다시피 하다가 2007년 이번 수상작 '아지랑이'가
실린 시집 '아득한 성자' 등 '겨우' 두 권의 시집을 내는 데 그쳤다.
수상작 '아지랑이'는 죽음을 앞두고 걸어온 삶을 반추하며 웅숭깊은
삶의 통찰과 인식을 담아내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6개월간 밥은 거의 안 먹고 죽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지랑이'를 붙들고 살았다는 회한에 사무치게 된 것이지요."
막상 삶의 정점, 꼭대기에 올라섰다고 생각하고 내려다보니 물러설 곳도,
옆으로 갈 곳도 없는, 생사의 백척간두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곧 죽을 마당에 돈이고 명예고 직위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아지랑이'
를 좇아 애면글면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우스웠습니다."
그러니까 칠십 평생을 허상을 붙들고 마치 그 속에 진리나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는 게 후회스러웠다는 것이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시인은 1939년 입산한 뒤 1968년 '시조문학'
으로 등단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신흥사·백담사 회주를 거쳐 설악산 산감을
맡고 있다. "1960년대 절 주지를 하려면 관청에 등록해야 했죠. 등록을 위해
이력서를 써야 했는데, 학교에 다니지 못한 내가 학력란을 공란으로 비워
두니까, 막 무시하는 거예요. 그때는 젊었을 때니까, 어떻게 하면 알아주느냐
고 물었죠. 어떤 이가 시집이 하나 있으면 알아준다고 하기에, 부랴부랴 내놓
은 게 '심우도'예요."
그렇지만 스님이 시를 발표한다, 신문에 난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아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태 전부터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삶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시를 쓰게 됐다고 한다.
"춘천불교방송 창립에 관여하고 장학재단도 설립했으며, 만해 선양회와
만해마을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지금 돌이켜보니 한낱 '아지랑이'
를 붙들기 위해 발버둥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공초 오상순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도 털어놓았다. 공초 선생이 서울 조계사
지대방(객승 등이 쉬는 곳)에 머물 때 시인은 여러번 만나뵈었다.
"당시 공초 선생은 최고급 담배인 '백양'을 태웠는데, 내가 그 재떨이를 매일
비웠어요. 내가 꽁초를 모아 피운다는 사실을 눈치챈 선생께서 재떨이를
치울 시간이 되면 담배 한갑을 몰래 놔두고 방을 비웠죠."
공초 선생은 이렇게 사람들을 배려한 것은 물론, 깊은 깨우침도 남겼다고
한다. 시인에게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 되라는 것. 일이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큰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일이 없는 사람, 즉
도인(道人)이라는 얘기다. 세상의 시비, 번뇌 등을 끊어야 귀인이 된다는
공초 선생의 말을 시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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