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5. 22:0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일발가 一鉢歌) / 배도 선사(杯渡 禪師)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이 참으로 보고 참으로 들음이다.
본래부터 한 구절의 말도 없는데
오늘의 첫마디를 억지로 한다.
진(眞)이 곧 망(妄)이요, 망이 곧 진이니,
진과 망을 제하면 사람도 없다.
'참 마음'으로 부질없이 번뇌를 내지 말라.
의식(衣食)은 때에 따라 몸을 보양(保養)하면 된다.
거칠어도 먹고, 고와도 먹어서
범부들이 형상(形相) 위에서 보는 것을 배우지 말라.
거친 것도 없고, 고운 것도 없으니
위의 향적세계(香積世界)엔 뿌리도 꼭지도 없네.
앉아서도 다니고, 다니면서도 앉으니
'생사'의 나무 밑에서 '보리'를 이룬다.
앉는 것도 없고, 다니는 것도 없으니
원래 나지 않는데 무엇 하러 무생법(無生法)을 구하랴.
여의면 집착하고, 집착하면 여의니
'허깨비 문'(幻門) 안에는 진실함이 없다.
여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으니
본래 '병'도 '약'도 없음을 어디서 다시 구하랴?
말할 때 잠잠하고, 잠잠할 때 말하니
말함과 침묵함이 제 자리가 없구나.
말하지도 않고, 잠잠하지도 않으니
동서를 남북이라 부르지 말라.
성냄이 기뻐함이요, 기뻐함이 성냄이니
나 스스로 마(魔)를 꺾어 법륜(法輪)을 굴린다.
성낼 것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으니,
물이 파도를 여의지 않아서, 파도가 곧 물이다.
괴로울 때 즐겁고, 즐거울 때 괴로우니
그렇게만 수행하면 문호(門戶)가 끊인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본래부터 자유로와 속박이 없다.
더러움이 깨끗함이요, 깨끗함이 더러움이니
'두 쪽'은 끝끝내 앞뒤가 없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
대천세계가 하나의 '진여 성품'이다.
'약'이 '병'이요, 병이 약이니
끝끝내 '두 일'은 버려야 된다.
약도 없고, 병도 없으니
그것이 <진여의 신령한 성품>이다.
'부처'가 '마'(魔)로 되고, 마가 부처 되니
거울 속의 그림자요, 물 위의 파도로다.
마도 없고, 부처도 없으니,
본래부터 삼세(三世)에 한 물건도 없다.
범부가 성인이요, 성인이 범부이니
그림 속의 아교(阿膠)요, 바닷물의 짠맛일세.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니
만행(萬行)을 두루 지님(持)에 한 가지 행(行)도 없다.
'참' 가운데 '거짓'이요, '거짓' 가운데 '참'이니
범부가 허망한 번뇌를 일으킬 뿐이다.
참도 없고, 거짓도 없으니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대꾸하랴?
본래부터 성(姓)도 없고, 이름도 없으니
그런 대로 휫둥휫둥 발길 따라 걷는다.
때로는 저자 거리, 푸주간을 들리니
한 떨기 홍련(紅蓮)이 불 더미 속에 솟았고,
때로는 지팡이 끌고 서울 거리를 거니니
이 몸은 뜬구름인가, 정한 자리 없구나.
허깨비는 원래부터 더부살이 같으니
그것의 더럽든 곳 다시 새로 밝아진다.
계행(戒行)을 찾으려 하면
삼독(三毒)의 종기 언제나 나을 건가.
참선(參禪)을 하려 한다며
나는 멋대로 싫것 잠이나 자네.
― 일발가(一鉢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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