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진스님의 편지-부처님 참모습 찾기위해 신화 전설 등 제거돼야

2009. 9. 24. 21: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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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스님의 편지-부처님 참모습 찾기위해 신화 전설 등 제거돼야

 

 

호진스님“신이 돼버린 자신 모습에 아연실색할지도”

             
지난 2002년 ‘아름다운 회향’을 보이며 동국대 교수에서 물러난 호진스님이 부처님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고 있다. 본지는 호진스님의 소회를 수차례 게재하고, 지안스님의 답장도 싣기로 했다. 열악한 현지 사정으로 호진스님 편지가 도착하는대로 게재할 예정이다. 지난 10일 도착한 호진스님의 편지를 두차례로 나눠 게재한다.

                            

 


 

◁순례중인 호진스님이

절친한 도반 지안스님에게

 


 


지안스님.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왕사성(라즈기르)에서 남쪽으로 약 80km 거리에 있는 보드가야의 미얀마 절입니다. 이곳에서 지낸지도 어느덧 두달이 되었습니다. 내 방이 있는 4층 건물의 베란다에서 동쪽으로 바로 눈 아래 나이란자나(尼蓮禪河) 강이 내려다 보입니다.

지금은 건기(乾期)라서 강이라기 보다는 넓은 모래밭입니다. 그 위로 긴 다리가 있습니다. 다리가 끝나는 곳이 수자타 마을입니다. 고행을 포기한 싯다르타에게 우유죽을 공양한 여인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곳까지는 1500걸음(약 900m) 쯤 됩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수자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집터에 쌓았다는 거대한 탑 유적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논밭을 가로질러 700걸음쯤 가면 벌판 복판에 수자타 사당이 있는데, 규모가 제법 큰 힌두교 사당과 담장을 함께한 오두막 같은 건물입니다.

부처님께 다가설수록 아득

오랫동안 고행으로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카에게 수자타가 우유죽을 올리는 소박한 상(像)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논과 밭을 가로질러 1000걸음쯤 내려가면 모래 밭 위에 키 큰 야자수들이 무성하게 서 있고, 그 한쪽에 힌두교 사당이 있습니다.

<사진> 나이란자나강과 대보리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 나무 밑에서 싯다르타가 고행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우유죽 공양 받은 곳으로 와서 서쪽으로 논밭을 가로 지르고, 제법 큰 마을의 골목길을 꼬불꼬불 걸어 1100걸음쯤 나가면 나이란자나강 둑에 이릅니다. 물이 없는 강의 모래밭 길을 900걸음쯤 걸으려면 제법 힘이 듭니다. 강을 건너 약 500걸음 서쪽으로 가면 싯다르타가 정각을 성취한 보리수에 도착합니다.

싯다르타가 고행하고 걸었을 장소들. 나는 때때로 고행림에서, 나이란자나 강변에서, 보리수 밑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요즈음은 매일 아침 일찍 1300걸음의 거리를 걸어 싯다르타의 그 보리수 밑에 예불을 드리러 갑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나는 지금 2600여 년전, 싯다르타가 수행을 했고, 정각을 이루었고, 얼마후 첫 설법을 하기 위해 녹야원으로 떠났던 곳, 그리고 다시 이곳 강변으로 되돌아와서 가섭 3형제와 그들의 추종자 1000여 명을 귀의 시킨 뒤, 그들과 함께 빔비사라왕을 만나기 위해 북쪽의 왕사성을 향해 떠났던 곳, 바로 그 현장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 하니까 그럴듯 하지요.

지안스님. 내가 초기불교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 1973년 부터니까,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오로지 역사적인 부처님의 모습과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가를 추구하는데만 골몰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알수 없게 되고 맙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 “부처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처님의 실체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멀어져 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 초기경전에 없어

그래서 모든 것을 현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서 이곳 ‘부처님의 땅’으로 온 것입니다. 지난 몇 달동안 초기 경전인 <아함경>과 <4분율장>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으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이 초기경전들은 이번까지 4번 읽었습니다. <아함경>이 가장 초기 경전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후기의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불상의 기원에 관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이룬 얼마 후, 어머님께 설법을 하기 위해 도리천으로 가서 3개월 동안 자리를 비운사이, 코삼비국의 우다야나왕과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을 너무 사모해서 병이 날 지경이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각각 조각가를 시켜 불상을 만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전 내용은 <아함경(증일아함 36권의 5)>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상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2세기, 적어도 부처님 돌아가신뒤 600년 후의 일이고, 코삼비와 코살라가 아니라 그곳에서 수 천리나 떨어진 변방 간다라에서 였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아함경>과 <율장>의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습니다. <아함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녹음해 놓다시피 했다가 문자로 출판한 문서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와같은 ‘신심’을 가장한 무지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것 보다 더 의외의 사실도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것, 즉 부처님의 본명인 싯다르타라는 이름 조차도 초기경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이 이름이 불전(佛典)에 나오는 것은, 부처님의 탄생으로부터 적어도 750여년(기원후 2세기 후반)후에 생존했던 마명(馬鳴)이라는 사람이 지은 최초의 부처님 전기,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 랍니다. 싯다르타라는 말이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목적을 달성한 사실, 즉 도를 성취한 사실’을 알고 있는 후세 사람이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 작명가의 본의와는 다르게 바깥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한가지. 고타마(Gotama)는 부처님의 가족성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그것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타마가 싯다르타의 가족성이라면, 아버지인 슛도다나도, ‘고타마 슛도다나’이어야 할 것이고, 친아들인 라훌라, 이복동생인 난다, 4촌동생들인 아난다와 데바닷다의 이름에도 모두 고타마라는 성이 붙었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이들에게 고타마라는 가족성을 붙여 부른 것을 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지안스님이 그와같은 예를 어디에서 보았다면 꼭 나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타마라는 이름은 가족성이 아니라 혹시 붓다의 본명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고뇌하던 청년, 비실존 인물로

이와같은 사실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본명’ 조차도 확실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싯다르타 부인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다른 이름이 3가지나 됩니다. 아쇼다라 외에 고삐(Gopi),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그리고 라훌라 어머니(Rahula-mata)입니다.

수백년 동안 완전한 불타전(佛陀傳) 없이 지내다가, 본격적인 불타전을 써야할 필요를 느꼈을 때는, ‘라훌라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불타전 작가들은 자신들이 편리한대로 이름을 하나씩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하는 말인데, 그럴듯 하지 않습니까. 후대에 와서 이것이 문제로 되니까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싯다르타 태자의 후궁’으로 처리해 버린 것이겠지요. 두사람의 후궁이 있었다면,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었을까요? 불전의 어디에서도 이 일을 언급한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안스님.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지루하지요. 그러나 매일 이와 같은 일만 생각하고 사는 나는 어떻겠습니까 2600여년전, 바로 저 강 건너편에서 인생의 근본 문제를 풀기위해 고뇌하고 있었던 청년, 그리고 어느날 핍팔라 나무(보리수) 밑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 환희작약했을 그 청년은, 분명히 지금 그 나무에서 불과 1300걸음(800m) 떨어진 이 미얀마 절의 한 구석방에서 고민하고 있는 ‘호진’이와 같은 실존인물이 아니였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너무나 비실존적인 인물로 되어버렸습니다.

<사진> 편지 첫장 사본.

 

나이란자나 강물위로 발바닥에 물을 묻히지 않고 걷기도 했고, 넓고 넓은 갠지스강을, 힘센 장정이 팔을 굽혔다 펴는 사이에 날아 건너기도 했고, 심지어 도리천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30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 3달 동안 설법을 한 존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격화하려는 행위 막으려 할것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존재의 보편적인 원리인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했다는 그 한가지 사실로써 보통의 한 인간이 일시에 초자연적인 존재로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안스님은 받아 드릴 수 있습니까. 뉴톤과 아인슈타인도 역시 존재의 원리를 깨달았는데, 왜 그들은 싯다르타처험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까. 똑같이 존재의 원리를 깨달았어도, 2600년전 인도의 갠지스 강변에서는 그런일이 가능했지만, 근대나 현대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고타마 싯다르타가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그동안 우리가 괴상하게 만들어 놓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달라이라마존자(14세)가, 자신을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앞에 놓인 잔의 물을 마셔 보이면서 “관세음보살이라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될 터인데, 나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관세음보살로 모셔지는 것을 막는 것처럼 싯다르타도 틀림없이 신격화되어 ‘우스꽝스럽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불교신문 2438호/ 6월28일자]

 

호진스님이 지안스님에게 보내는 서신〈2438호에 이어〉 

  부처님 참모습 찾기위해 신화 전설 등 제거돼야

몇 년 전 어떤 책에서,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때 무릎이라도 칠 만큼 기뻤습니다. 당장 이 말을 내 연구노트마다 첫 페이지에 커다랗게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사적인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기위해서는 신화와 전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 나의 공격 목표는 신화와 전설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다시피했습니다. 신격화와 전설이 싯다르타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죽이고 있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한때는 우리에게 그런 요소들 또는 그런 표현방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것들이 싯다르타를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격화, 역사적 인물 묻어버리는 일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런 허상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본질적인 것에 손상을 당하면서까지. 어느때 우리 선배들은 그 당시의 필요에 의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그런 이야기들을 꾸며도 내었는데, 지금에 와서 왜 그런 이야기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에게는 동화(童話)가 필요하지만 성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600여 년 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와 전설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적인 기적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부처님 전기를 쓰기로 계획을 하면서, 제일 먼저 3가지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1)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의 부처님, (2)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3) 신화와 기적같은 것이 완전히 제거된 모습의 부처님. 이와 같은 설정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달라이라마 존자는 이 3가지 점을 충족시키는 존재이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닙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이렇게 될 수가 없겠습니까.

종교에 ‘억지.무리’ 만들 필요 없어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신화나 기적같은 요소들을 없애 버린다면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활동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종교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억지와 무리를 해야 합니까. 종교가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종교를 위한 종교의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안스님,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신은 스스로 열을 받아 멈추기가 어려워졌는데, 스님은 지루해서 몸부림이 나지요. 하품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복사해서 보내주신 열한가지나 되는 초전법륜경들, 모두 잘 받았습니다. 수고롭게 해드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감사하고요. 얼마동안은 부처님의 정각 내용과 첫설법에 대해 몰두해보려고 합니다.

이곳은 매일 40도를 오르내리는 ‘준 살인적인 상황’인데, 그곳은 꽃보다 더 아름답고 화사한 신록이 분위기를 잡고 있겠네요.

  

“부처님 참모습 찾기위해 신화 전설 제거돼야"

 

몇 년 전 어떤 책에서,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때 무릎이라도 칠 만큼 기뻤습니다. 당장 이 말을 내 연구노트마다 첫 페이지에 커다랗게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사적인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기위해서는 신화와 전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 나의 공격 목표는 신화와 전설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다시피했습니다. 신격화와 전설이 싯다르타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죽이고 있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한때는 우리에게 그런 요소들 또는 그런 표현방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것들이 싯다르타를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격화, 역사적 인물 묻어버리는 일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런 허상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본질적인 것에 손상을 당하면서까지. 어느때 우리 선배들은 그 당시의 필요에 의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그런 이야기들을 꾸며도 내었는데, 지금에 와서 왜 그런 이야기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에게는 동화(童話)가 필요하지만 성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600여 년 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와 전설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적인 기적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부처님 전기를 쓰기로 계획을 하면서, 제일 먼저 3가지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1)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의 부처님, (2)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3) 신화와 기적같은 것이 완전히 제거된 모습의 부처님. 이와 같은 설정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달라이라마 존자는 이 3가지 점을 충족시키는 존재이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닙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이렇게 될 수가 없겠습니까.

 

종교에 ‘억지 무리’ 만들 필요 없어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신화나 기적같은 요소들을 없애 버린다면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활동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종교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억지와 무리를 해야 합니까. 종교가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종교를 위한 종교의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안스님,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신은 스스로 열을 받아 멈추기가 어려워졌는데, 스님은 지루해서 몸부림이 나지요. 하품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복사해서 보내주신 열한가지나 되는 초전법륜경들, 모두 잘 받았습니다. 수고롭게 해드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감사하고요. 얼마동안은 부처님의 정각 내용과 첫설법에 대해 몰두해보려고 합니다.

 

이곳은 매일 40도를 오르내리는 ‘준 살인적인 상황’인데, 그곳은 꽃보다 더 아름답고 화사한 신록이 분위기를 잡고 있겠네요.


2008년 5월28일 호진

2008-06-24 오후 9:48:20 / 송고

길을 가노라 사랑하는 이여!   벽천 .신선희


 
                                    민주의 숲 길을 가노라
                                    사랑하는 이여!
                             산을 지나고
                                    들을 지나
                                    사립문을 들어 설 때 까지
                                    평안도 고뇌도 없는 길을 걸어
                                    가야하고
                                    가고 있다오

 
                                    그 곳 넘어
                                    나의 집이 있고
                                    차마 산을 넘지 못하고
                                    산허리에 메인 
                                    부엉새
                                    두 눈이 붓도록 울어도
                                    아무도 살지 않고
                                    흔하지 않게
                                    살 지않는 그 곳을
                                    가는 이유를
                                    사랑하는 이여!
 
 
                              오늘 밤엔 묻지를 
                                      말아 주오
                                      날이 밝아 내일이 오면
                                      당신을 가슴에 물들이고
                                      강을 건너
                                      내 집이 보이는 저 편 언덕에 이르러
                                      내 님을 위하여 
                                      천 년의 사랑을 
                                      노래 하려네
                                    YoursPureland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