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무량대복을 어디서 찾나/무비스님

2009. 10. 23. 23: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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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주머니 속 무량대복을 어디서 찾나
범어사 승가대학 학장 무 비 스님
 
 

오늘 조계종출판사에서 제가 쓴 『신심명』 강의 출판을 기해 여러분들에게 『신심명』이란 어떤 책인지 소개도 하고 곁들여 불교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자리를 마련해주어 참으로 오랜만에 여러분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지극한 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至道無難)’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도’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라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전제조건을 달고 시작합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신심명』의 저자 승찬 스님은 사십대의 중년 나이에 이조 혜가 스님을 만나서 비로소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소개받게 된 분입니다. 승찬 스님은 나병(한센병),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며 밥을 굶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오던 바로 그 분이 사십대 중반에 혜가 스님을 만나 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병든 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입니다.

 

 

 

 

승찬 스님은 서기 600년경의 사람인데 지금부터 1400여 년 전에 그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형상을 한 이에 대한 대우가 어땠겠습니까. 그런 처참한 인생을 살며 스스로 자책하기를 ‘분명 큰 죄를 지어 이런 삶을 사는 것’이라 결론을 내고는 세상에 큰 도인이라 알려져 있는 혜가 스님을 찾아가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참한 과보를 받고 삽니까. 도사께서 나의 죄를 참회 시켜 주셔서 병은 낫지 않아도 좋으니 죄만이라도 벗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은 “그대가 천만근의 무게로 느끼고 있다는 그 죄를 드러내놓기만 하면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승찬 스님은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던 자신의 ‘죄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고 그런 승찬 스님에게 혜가 스님은 “그대가 스스로 찾아도 진정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대의 죄업은 이미 다 참회가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혜가 스님의 이 말씀에 승찬 스님은 눈이 훤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동안 죄업이라는 환상을 한 짐 짊어지고, 그것을 천만근의 무게로 지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환상이었다. 내가 수고로이 왜 그것을 찾으려고 했던가.” 승찬 스님은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죄가 많아 고통을 받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분의 고통은 저를 포함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불자님들의 크고 작은 고통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 4년 동안 힘든 병고를 겪어 냈습니다. 그 힘든 병고를 겪으며 승찬 스님의 아픔을 어느 정도 느끼고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승찬 스님에 버금가는, 그것과 비슷하게 심적으로나 물적으로 고통을 겪고 살지도 모릅니다.

 

 

 

승찬 스님은 그 한 말씀에 깨닫고는 팔만대장경에 버금가는 이 『신심명』을 저술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시형식의, 몇 글자 안 되는 글이지만 승찬 스님의 그 삶을 생각해 보면 저는 이 책이 팔만대장경보다도 더 묵직한 무게의 책으로 느껴집니다.

 

 

 

 

서두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삶, 견성, 성불이니 하는 것들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유혐간택(唯嫌簡擇)’이라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는 것만 경계할 뿐’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전부 차별로 봅니다. 차별로 보니까 거기에서 취사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승찬 스님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모습, 얼굴에 흠 없는 모습, 완전한 손가락, 완전한 발가락, 그런 몸을 얼마가 갖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승찬 스님이 눈을 뜨고 보니 그렇게 부러웠던 삶과 짐승보다 못했던 병자로서의 삶이 결코 취사선택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취사선택을 경계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만 하면 무책임한 말입니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취사선책을 안하느냐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자든, 건강하든, 남자든, 여자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가난하든, 부자든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것은 털끝만한 문제도 되지 않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 숭고하고 지극히 높고 가치 있는 그 세계를 당신은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차별이 소용없는 ‘이것이야 말로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그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자신감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음은 끝없이 요동치는 파도

 

 

 

승찬 스님이 보신 초월한 그 세계란 다름 아닌 말하고 소리 듣고 이름 부르면 돌아보고 배고프면 식사하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바로 그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 그 사실은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문둥병 환자도 정상인도 똑같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참으로 값진 존재고 위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데, 오직 외모만 보고 차이나는 것에 너무 가치 기준을 두어 집착하고 매달리며 그것을 갖고 차별하고 자신을 비하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보면서 늘 습관적으로 가치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합니다. 물론 육신이 병들면 당장 사는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음이 활동을 멈춘다면 건강한 모습은 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많이 갖고 높은 자리에 있다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가치, 참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뜨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다, 기도다하여 온갖 방편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방편입니다. 『신심명』에 ‘불식현지 도로염정(不識玄旨 徒勞念靜)’이라 ‘인간 존재 실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서 쓸데없이 수고롭게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위빠사나니 간화선이니 염불이니 진언이니 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고 흔들리게 돼 있습니다. 인연 따라 잘 움직이고 흘러가는 것이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잡아 묶어 집중시키려하니 그게 됩니까. 수천, 수만 명이 마음을 집중시키려 하지만 하루 종일 10분이 안됩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흘러가는 것이 마음의 본색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했습니다. 본래 머물지 않는 마음이니까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입니다.

 

 

습관버리고 참생명 눈떠야

 

 

 

이 세상에 생각 고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직 조계사 기둥이 고요할 뿐이지요. 고요하면 그것은 죽은 사람이지요. 간화선이니 위빠사나니 해서 마음을 집중시키려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몹쓸 일입니다. 마음이 언제 고요해지던가요.

 

 

혹 운이 좋아 고요해졌다 해도 흙탕물을 가라앉힌 것과 같아서 바람이 불거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다시 흙탕물이 일어납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물살이 흐르듯 우리 마음은 끝없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중일여, 정중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하는 이런 무시무시한 관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바라는 그런 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그 무시무시한 관문에 도달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철에 ‘참선프로객’들이 2천명이 넘고 재가신도들까지 해서 요즘은 만이천명쯤 되는 불자들이 참선을 한다는데 하루 중에 단 10분이 일념이 안 됩니다. 우리마음은 본래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원리가 흘러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 그런 인간실상의 내면을 여실히 알아버리면 인연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구업녹이며 사는 것. 그런 이치만 알면 복은 저절로 자라나고 업은 저절로 녹게 돼 있는 것입니다.

 

 

 

 

소승불교가 시대에 맞지 않다하여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고 그것도 시대적 대안이 안된다고 해서 폐기처분하고 선불교가 일어나고 다른 곳에서는 비밀불교 일어나고, 또 전쟁이 일어나니 선불교니 대승불교니 다 폐기처분하고 호국불교가 등장했습니다. 이제 또 살만하니 호국불교는 물러가고 기복불교가 일어나 너도 나도 다 기복하지요. 시대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갈아입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옳습니다. 봄 됐으면 봄옷 입듯이 여름 되면 여름옷 입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승찬 스님의 『신심명』과 연관시켜 이 시대의 불교로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불교라고 하는 것. 인간 개개인이 완전무결한 부처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 개개인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인간 개개인이 아주 존귀하고 높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 의지할 것도 없고 더 새로운 것을 찾을 것도 없이 인간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해서 그 실상에 맞게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법화경』을 보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으로 섬기고 받들고 존경하며 예배드렸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이제 이 시대에 맞는 표현으로 인간불교시대라 하고 ‘인간 그대로가 다 부처님’이라는 수기를 여러분께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갈등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우리가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의 진수를 마음에 담지 못한 채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야말로 부처님 문 앞에만 와서 서성대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무량공덕에 눈을 떠야 합니다.

 

 

 

늙었든 젊었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병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무 관계없이 인간 개개인 누구나 갖고 있는 무량대복이 있습니다. 육조 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마디가 “본래 불생불멸인 것을 내 그것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내 자신이 본래 불생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것을 알았다”고 하고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이라. “내 자신이 본래 아주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고 토로를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불교 공부한다고 하지만 이 가르침, 이 관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얻긴 뭘 얻습니까. 본래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오늘 인간 불교 시대를 나름대로 선언하는 것은 우리 인간 개개인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인간 개개인 그대로가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확신을 가져서 당당한 삶의 길을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무비 스님은

범어사로 출가, 해인강원을 졸업하고 월정사 탄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갱백이다. 범어사승가대학과 통도사승가대학 학장(강주)으로 및 종립승가대학원장, 조계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범어사 승가대학 강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yumhwasil)를 이용해 대중에게 감로법문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불문』『반야심경』『금강경강의』『화엄경강의』『지장경강의』 등 다수가 있다.


법보신문 894호 [2007-03-28]

 

 

 

*普賢코멘트--------------------------------------

 

1.차별을 한다는 것은 '조건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조건붙이면 모두가 어두워진다고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립지요?

 

 

2.승찬스님이 깨치신 법문은 '안심법문'이라 합니다. 달마부터 육조까지는 순선 시대, 또는 여래선 시대라 하는데, 이 시대의 선사들을 '능가사'라고 부릅니다.

능가사들이 주로 닦은 가르침이 '안심법문'입니다. 마조 이후에 보이는 조사선처럼, '깨침'이 아닙니다. 깨침을 주로 삼는 참선은, 한참 뒤에 나옵니다.

 

 

3."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문둥병 환자도 정상인도 똑같이 갖고 있는 것!"

->이 말씀도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밝은 불성은, 외부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본래 밝은 겁니다. 수행을 해서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사바에 산다고 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정상인이라고 더 있고, 몸이 불편하다도 해서 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본래 밝은 우리의 무량한 모습을 잊고,

자꾸 스스로 한계를 짓고 스스로 어둠을 자초합니다.

 

업보 중생이라 한계 짓고, 못났다고 자책하며, 본래 밝은 등불을 그만 꺼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꾸 세상이 어둡다고 울고 한탄합니다.

 

그래서 밝은 등불 다시 킬 생각은 못하고, 업장 참회한다고 밤새 기도를 가고,

복을 구한다고 하염없는 성지 순례도 떠나고 그러하십니다.

 

 

4.유혐간택(唯嫌簡擇)->버릴 것은 오직 차별하는 마음, 조건 붙이는 마음, 그 뿐입니다.

그러할 때 그 즉시 우리는 밝아집니다.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겁니다.

 

5.얻긴 뭘 얻습니까. 본래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수행의 공덕을 구하지 말라, 공덕이 없는 것이 진실한 공덕이다! 라고 일전에 말씀드린 것, 기억나시지요?

 

 

6.'인간 그대로가 다 부처님’

정말 요 부분이 옥의 티(?)입니다. 인간이 부처,라 하시자 말고 온 만물이 부처!라 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을...

' 인간이 부처'라는 건 법화의 사상이고,

'온 만물이 부처라는 것 화엄 사상입니다.

법화와 화엄은 여기서 차이가 납지요...

 

 

7.그대로 부처님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본래 부처가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인 것입니다.

 

 

8.그러나 이런 보현행원은, 깨달음만 구하는 분, 선정에 드는 것을 제일로 하는 분등은 이해 못하신다고 화엄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9.무비스님의 오늘 법문은 제가 보기에 정말 살아있는 활구 법문이십니다.

활자로 읽는데도 제 가슴이 다 시원해집니다.

다만 정말 아쉬운 한 가지는, 저 말씀이 바로 '화엄'이요 '보현행원 사상'인데,

그 말씀이 한번도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스님같으신 분이 보현행원을 말씀하시면,

저같은 사람이 택도없이 나설 필요가 없을텐데...

 

 

 

 

*수행에 관한 저의 의견을 더 보고 싶으신 분들은, 본 카페(화엄경보현행원) 게시판 중

 

1.지유게시판->공지 사항 밑에서 세번째 '일상 생활에도 수행이 있다.

2.질문과 답변->111, 수행하면 밝아지는가? 59, 수행하지 말라는 말에 의문이..

3.보현명상언어->'수행'으로 검색하시면 많은 글들이 나옵니다.

 

*"수행의 공덕을 구하지 말라"는 글도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제가 올리고도 못 찾겠네요...*^*^*_()_

 

 

 

 

*********[추가]***불교신문에서***************

무비스님 ‘신심명’ 출간기념 조계사 강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선물한 꽃 한 송이”

‘사람이 바로 부처님’ 인간불교 사상 역설

  법회 시작 30분 전부터 대웅전 가득 차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스님은 지난 17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신심명’ 출간을 기념해 특강을 갖고 불자들의 수행정진을 당부했다.

 

 

 

저서 〈신심명(信心銘)〉에서 “모든 것이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이라고 웃어 넘겼던 중국 선종 제3조 승찬스님은 나병(癩病) 환자였다.

 

 

 

 

 

 

 

 

 

신체적 고통보다 끔찍한 ‘문둥이’라는 낙인. 학대와 멸시가 일상화된 한계상황에서 스님은 어떻게 거짓말처럼 초연할 수 있었을까.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무비스님이 〈신심명 강의〉(조계종출판사) 출간을 기념해 지난 17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특강을 열었다. 그 동안 숱한 경전해설서를 출간했지만 스님에게 이번 책은 매우 각별하다. 스스로 이야기하길 “승찬스님과 비슷한 처지에서 써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법회는 지난 2003년 12월 허리디스크로 교육원장에서 물러난 후 3년 3개월 만에 펴는 대중법문이었다. 법상에도 오르지 못한 채 맨바닥에 책상을 놓고 강의를 진행하는 모습에서 여전히 진행형인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스님의 병고는 한때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오죽하면 자살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수행자의 입에서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는 고백이 터져 나왔을까.

 

 

 

 

와병을 접고 근 4년 만에 나선 나들이였기에 스님의 강의에 대한 불자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법회 시작 30분전부터 대웅전은 만원이 됐다. 자필 서명을 받으려 구입한 책을 들이미는 신도들 통에 스님은 한참 동안 지팡이를 놓아야 했다.

 

 

 

스님은 불법의 정수를 선시 형식으로 풀어낸 〈신심명〉의 문헌적 의의로 서두를 열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려할 뿐이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는 첫 구절로 유명한 〈신심명〉은 많은 불자들이 즐겨 읽는다. 방황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안성맞춤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곧바로 예쁘게 단장한 마음 아래 웅크린 비명과 고름을 끄집어냈다. 화두는 ‘고통’이었다.

 

 

 

“〈신심명〉은 뛰어난 내용 못지않게 승찬이라는 개인이 가진 이력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입니다. 승찬스님은 출가 전 우리가 으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한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도인을 만나면 병이 나을까 하는 생각에 선종의 2조인 혜가스님을 찾아갑니다.”

 

 

 

 

어렵게 혜가스님을 만난 승찬스님은 이렇게 부탁했다. ‘저는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어떻게 참회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그러자 혜가스님이 답했다. ‘그대가 죄가 많아서 그런 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그 죄를 나에게 보인다면 그 죄를 내가 참회시켜주겠다.’

 

 

 

 

이 장면은 혜가스님이 스승인 초조 달마대사를 찾아갔을 때 주고받던 문답과 비슷하다. 혜가스님도 달마스님 앞에서 스스로 팔을 잘라가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구했으나 달마스님은 ‘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오라’고 응수했을 뿐이다.

 

 

 

혜가스님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지 못했듯이 승찬스님 또한 죄를 내보이지 못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찬스님이 ‘죄의 실체가 없다’고 말하자 혜가스님은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다’고 진단을 내렸다.

 

 

 

 

‘있지도 않은 것에 괴로워 말라’는 충고다. 천형(天刑)이란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편견일 뿐이니 현혹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혜가스님의 한 마디에 승찬스님의 육체적 고통과 죄에 대한 강박관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물론 혜가스님의 안심(安心) 법문 뒤에도 계속 손가락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어느 누구의 것이든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다만 승찬스님의 육체가 좀더 빨리 시간과 친해졌을 뿐. “‘모두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하여 수고로이 붙잡으려 하는가.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모두 다 놓아버리라’는 신심명 구절은 승찬스님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토양으로 아름답게 핀 꽃 한 송이일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창시한 조사선의 진정성은 모든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단순히 손에서 수갑을 빼내는 것을 넘어 구속당했다는 마음으로부터의 근본적 해방이다.

 

 

 

 

아쉽게도 마음을 이기는 뾰족한 수는 없다. 원래 마음의 본성이 늘 어지럽고 헝클어지는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스님은 〈신심명〉의 핵심적인 구절을 소개하면서 ‘그냥 놔두는 것만이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했다.

 

 

 

 

“‘깊은 뜻을 알지 못하면 한갓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不識玄旨 徒勞念靜)’…. 깊은 이치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앉았을 때는 잠깐 조용하다가 금방 흔들려버립니다. 그게 무슨 공부입니까.

 

 

 

불교 공부는 그렇게 마음 가라앉혀서 겨우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깊은 뜻을 알지 못하면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그저 앉아 있어봐야 내내 그대로입니다. 평생 그렇게 10년, 20년, 30년 앉아 있으면 내내 그 모양일 뿐입니다. 처음 했을 때 망상이 부글부글 끓듯이 30년 60년 해도 망상은 부글부글 끓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을 한 곳에 붙잡아매려고 하니 그게 될 일입니까.”

 

 

 

 

스님은 그간의 저서에서 인간불교 사상을 일관되게 역설했다. ‘사람이 바로 부처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똑똑하거나 어리석거나, 비장애인이나 장애인 모두가 부처라는 선언이다.

 

 

 

 

“‘유를 보내면 유에 빠지고 공을 따라가면 공을 등진다(遣有沒有 從空背空)’ …. 우리들이 지나치게 ‘있음(有)’에 걸려 있으니까 불교에서는 있다는 것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空)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유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공이라는 약이 좋지만, 그 약은 마치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소금과 같아서, 맛을 낸다고 많이 먹으면 결국은 공도 또 하나의 병이 됩니다.

 

 

 

그래서 유도 좇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에 빠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가치로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것을 더 낫다고 추켜세울 것도 없습니다.”

 

 

 

 

일평생을 경전의 문자와 씨름해 온 대강백이 전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 이채롭다. 점수(漸修) 이론에 길들여졌다면 ‘본질을 직관하지 않으면 수행도 군더더기이거나 오히려 장애일 따름’이라는 발언이 낯설 수도 있다. 절망에 대처하는 정공법에 도리어 속 시원하다는 반응도 보였다.

 

 

 

중요한 것은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증언하는 불의 뜨거움이라는 점이다. 고통은 내가 나임을, 겨우 나임을, 결국 나일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그것이 진실이고 부처라고 일깨운다.

 

 

 

스님이 삶을 지탱하는 좌우명으로 ‘감(堪, 견딤).인(忍, 참음).대(待, 기다림)’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마치 불을 만진 듯 귓가에 쟁쟁하다.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312호/ 3월24일자]

2007-03-21 오전 5:09:44 / 송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생각 나누기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아침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습니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 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그대들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전단지를 살짝 떼어 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 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입니다.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 가시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 좋은생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