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0. 19:5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마음은 무엇인가 / 라마나 마하르쉬
마음은 감성(감정), 지성(생각), 기억, 에고성을 총칭하는 말이다. 마음이 갖는 특성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따위이다. 마음은 우리가 먹는 음식의 미묘한 기운이 응집되어서 형성된다. 마음은 집착과 혐오, 욕망과 분노 등과 같은 감정과 더불어 성장한다. 마음은 순수의식인 참나의 한 대상이므로 <보이는 것>이며, 활동성이 없다. 비록 그 자체로 활동성이 없기는 하나 순수의식과의 연관때문에 자기가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영원하지 않으며, 분열되어 있고, 수시로 형태가 변한다. 그것은 현상계의 모든 원소들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오감기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들은 신체바깥에 있기에 외적 감각기관이라 불린다. 그리고 마음은 신체 내부에 있기에 내적 감각기관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안과 밖의 구분은 육체하고만 관련이 있다. 사실은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마음의 성품은 본래 허공과 같이 순수하게 머물러 있다.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현상적 존재들의 구성요소인 원소가 나란히 배치되어서 안과 밖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들로 이루어진 모든 현상들은 마음의 성품으로만 된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일체유심조) 바깥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의 상으로 변하여, 뇌 속에 있는 지식과 함께 오감기관을 통해 흘러서 뇌에 의해 관심대상들과 접촉하며, 이렇게 하여 대상들을 알고 경험하면서 만족을 얻게 된다. 이러한 실체가 바로 <마음>이다. 똑같은 하나의 마음이 어떤 실질적인 차이때문이 아니라, 밖으로 나타나는 양상의 차이때문에 감정, 지성, 에고, 기억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마음 자체는 일체의 형상, 즉 영혼, 신, 현상계로 되어있다. 그것이 깨달음의 知를 통해 참나의 상태로 회복될 때 해탈이 있으며, 곧 神의 성품을 갖는다. 마음의 본질은 순수성이고, 마음은 본래 구름 한점없이 맑은 허공처럼 순수하고 오염이 없으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神의 성품 (본성, 신성, 불성, 자성, 순수의식, 참나)으로 되어 있다. 마음이 그 본래적인 순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는 마음이라는 이름도 없다. 그런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空心 또는 無心이라 부른다. 그런 순수한 마음을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지 그릇된 앎일 뿐이다. 본래는 순수한 神의 성품(본성, 신성, 불성, 자성, 순수의식, 참나)을 지닌 순수성 마음이었던 것이 무지때문에 그 본래 성품을 망각하고, 어두운 성질의 영향을 받아 외부세계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마음은 활동성의 영향을 받아 "나는 육체다, 이 세계는 실재한다' 하는 생각을 하며 결국 애착을 가지고 현상계에 집착하며, 혐오, 분노, 욕망 등을 통해 선업과 악업을 짓게 된다. 또한 그런 행위들로 인해 마음에 각인된 인상(원습)을 통해서 생사윤회를 한다. 그러나 여러 생 동안 집착이 없는 사심이 없는 헌신 행위를 통해 오염(업)이 없어진 마음은 참스승으로부터 경전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며, 마음의 상이 참나의 형상인 본래 상태(행복과 평안)로 되돌리기 위해 명상을 한다. 꾸준하게 실천하면 어두운 성질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외부세계로 요동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없어지면 마음은 미묘해지고 움직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실재인 참나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고 어두운 성질과 활동성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고운 비단 천을 바늘이 아닌 굵은 막대기로 깁지 못하고, 신문의 작은 글씨를 바람에 깜빡거리는 등불로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생활속에서 꾸준한 명상에 의해 미묘하고 들뜨지 않게 된 순수한 마음 속에서는 참나(지복과 평안)가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체험도 있을 수 없으므로 극도로 미묘하게 정화된 마음은 참나의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참나의 본래 성품인 지복과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는 자신의 진아가 곧 神의 성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또렷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고통이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그때는 모든 현상이 마치 꿈처럼 나타날 것이며, 그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전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전면적인 참나의 체험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자, 요가이며, 명상이자, 깨달음이며, 진정한 수행이다. -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르쉬 -
마음은 감성(감정), 지성(생각), 기억, 에고성을 총칭하는 말이다.
마음이 갖는 특성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따위이다.
마음은 우리가 먹는 음식의 미묘한 기운이 응집되어서 형성된다.
마음은 집착과 혐오, 욕망과 분노 등과 같은 감정과 더불어 성장한다.
마음은 순수의식인 참나의 한 대상이므로 <보이는 것>이며, 활동성이 없다.
비록 그 자체로 활동성이 없기는 하나 순수의식과의 연관때문에
자기가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영원하지 않으며, 분열되어 있고, 수시로 형태가 변한다.
그것은 현상계의 모든 원소들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오감기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들은 신체바깥에 있기에 외적 감각기관이라 불린다.
그리고 마음은 신체 내부에 있기에 내적 감각기관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안과 밖의 구분은 육체하고만 관련이 있다.
사실은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마음의 성품은 본래 허공과 같이 순수하게 머물러 있다.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현상적 존재들의 구성요소인 원소가
나란히 배치되어서 안과 밖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들로 이루어진 모든 현상들은 마음의 성품으로만 된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일체유심조)
바깥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의 상으로 변하여,
뇌 속에 있는 지식과 함께
오감기관을 통해 흘러서 뇌에 의해 관심대상들과 접촉하며,
이렇게 하여 대상들을 알고 경험하면서 만족을 얻게 된다.
이러한 실체가 바로 <마음>이다.
똑같은 하나의 마음이 어떤 실질적인 차이때문이 아니라,
밖으로 나타나는 양상의 차이때문에
감정, 지성, 에고, 기억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마음 자체는 일체의 형상, 즉 영혼, 신, 현상계로 되어있다.
그것이 깨달음의 知를 통해 참나의 상태로 회복될 때 해탈이 있으며,
곧 神의 성품을 갖는다.
마음의 본질은 순수성이고,
마음은 본래 구름 한점없이 맑은 허공처럼 순수하고 오염이 없으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神의 성품
(본성, 신성, 불성, 자성, 순수의식, 참나)으로 되어 있다.
마음이 그 본래적인 순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는 마음이라는 이름도 없다.
그런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空心 또는 無心이라 부른다.
그런 순수한 마음을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지 그릇된 앎일 뿐이다.
본래는 순수한 神의 성품(본성, 신성, 불성, 자성, 순수의식, 참나)을 지닌
순수성 마음이었던 것이 무지때문에 그 본래 성품을 망각하고,
어두운 성질의 영향을 받아 외부세계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마음은 활동성의 영향을 받아 "나는 육체다, 이 세계는 실재한다'
하는 생각을 하며 결국 애착을 가지고 현상계에 집착하며,
혐오, 분노, 욕망 등을 통해 선업과 악업을 짓게 된다.
또한 그런 행위들로 인해 마음에 각인된 인상(원습)을 통해서 생사윤회를 한다.
그러나 여러 생 동안 집착이 없는 사심이 없는 헌신 행위를 통해 오염(업)이
없어진 마음은 참스승으로부터 경전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며,
마음의 상이 참나의 형상인 본래 상태(행복과 평안)로 되돌리기 위해 명상을 한다.
꾸준하게 실천하면 어두운 성질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외부세계로 요동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없어지면 마음은 미묘해지고 움직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실재인 참나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고 어두운 성질과 활동성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고운 비단 천을 바늘이 아닌 굵은 막대기로 깁지 못하고,
신문의 작은 글씨를 바람에 깜빡거리는 등불로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생활속에서 꾸준한 명상에 의해 미묘하고 들뜨지 않게 된
순수한 마음 속에서는 참나(지복과 평안)가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체험도 있을 수 없으므로
극도로 미묘하게 정화된 마음은 참나의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참나의 본래 성품인 지복과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는 자신의 진아가 곧 神의 성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또렷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고통이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그때는 모든 현상이 마치 꿈처럼 나타날 것이며, 그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전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전면적인 참나의 체험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자, 요가이며, 명상이자, 깨달음이며, 진정한 수행이다.
-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르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