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20:4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열반경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다
사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님 오신 날의 참 뜻을 말해 달라는 불자들의 응석에
큰스님께서 답하시기를
“뭔 의미? 공휴일이라 푸욱 쉬게 해 준 것이 의미라면 의미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으로 멋진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멋있긴 뭐가 멋있어?
기껏 쉬게 해줘서 좋다는 말을 범부도 아니고
큰스님이라는 사람이 말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아니면 아무런 종교를 믿지 않든 상관없이
부처님 오신 것을 계기로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하루를 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아가 큰스님은 공휴일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달아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 주셨으니,
‘깨닫는다[覺, 佛]’는 말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쉬는 것[休, 歇]’이다.
이치를 알게 된다는 말이 곧 깨달음의 의미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다른 말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잘 모르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지 않겠는가?
그것을 표현하는 대목이 ‘마치 개미가 사방팔방으로 왔다갔다하는 것과 같다似蟻巡還’고 하여
「시식문施食文」에 나온다.
흔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다람쥐가 아니고 원래는 ‘개미 쳇바퀴 돌듯’이 맞다.
먹을 것을 찾아 체 안에 들어간 개미들이
길을 찾아 쳇바퀴를 따라 빙빙 도는 모습을
사람에 빗대어 이르는 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왔다갔다하는 몸이나 마음은 어떠한가?
헐떡이지 않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여기에 먹을 것이 있는가, 저기에 해답이 있는가?’ 하며
찾아다니는 모습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없는 중생의 실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경전에서는 고기를 잡으려고 하거나
좋은 곳을 찾아 여행 나선 배가 뒤집어지거나
풍랑을 만나 고생하다가 쉬려고 섬을 찾거나,
먼 길 떠난 나그네가 하룻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한밤중에 험한 산길을 헤매다 피곤한 가운데도
짐승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가슴 졸이며
민가의 불빛을 찾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때에 찾아낸 섬이나 등불은 생명을 이어 주고
다시 살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휴식처요, 안식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섬이나 등불이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니, 진정으로 의지하고 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 섬이
바닷물에 잠기어 버리거나, 섬인 줄 알았는데 고래의 등이었다면
그 상실감은 어쩔 것인가?
저 떡 파는 노파에게 혼났던 덕산선사德山禪師가
용담숭신龍潭崇信선사에게 밤늦도록 가르침을 받고 자기 처소로 가려 하였다.
사위가 어두워 등불을 받아 들고 막 등불에 의지해 걸음을 떼려는 순간
용담선사가 입으로 불어 등불을 꺼 버리는 그 순간,
그 절벽 같은 칠흑의 어둠은 어떻게 뚫고 가야 하는가?
그래서 붓다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꼭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기를 “스스로를 섬洲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법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얻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그것이 ‘한 번 크게 쉬는 것一大休歇’이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뜻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내용이
붓다의 생애를 역사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충실히 기록한 경전인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온다.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성도 등 일대기와 제자들의 귀의에 관한 인연을 기록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에 의하면 “여래께서 태어나실 때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씩 걸을 때마다
발을 떠받치는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했으며,
일곱 걸음씩을 걷고 나서 동쪽을 보고 말하기를
“세상에서 내가 제일이다. 오늘로써 태어남은 끝이 났다.
이것이 보살의 드물고 기이한 일이며 더 있기 어려운 놀라운 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누리에 제일 높은 내가 모든 이를 괴로움에서 벗게 하리라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는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열반경』에 따르면 일곱 걸음마다 뜻이 있다고 했다.
동쪽으로 한 일곱 행보는 중생이지만 제도를 시작했다는 뜻이며,
남쪽으로 걸은 뜻은 모든 중생을 위해 더없는 복전이 되고자 함이었다.
서쪽으로의 일곱 행보는 나고 죽음을 영원히 끊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고,
북쪽으로의 일곱 걸음은 이미 모든 중생들의 생사를 제도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바닷물을 다 마셔 보고 나서야 짠지 싱거운지를 알겠다고 하면 가운데 수준이요,
그러고도 모르면 아래 수준이며, 한 번에 척 보고 안다면 맨 위 수준이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 하신 이 말씀은
이미 평생 동안 하는 공부와 중생 제도를 마친 것이라는 엄청난 표현이다.
쉿!
고암큰스님
늘 살펴주시는 부처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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