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20: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비 오는 날은 마음 공부 하는 날
“빗소리 좋게 들리는 곳
띠집(茅屋)에서 낮잠에 드니
포구(浦口)에 비는 흩뿌리며
비스듬히 부는 실바람을 따르니
버들은 늘어져 푸르디 푸르고
꽃은 촉촉히 붉음을 머금으니
농부는 웃음으로 대하며
집집마다 풍년들기를 기대하누나.”
_정도전鄭道傳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은 비단 어린아이나 강아지뿐 아니라
윤기 있는 가슴을 가진 이들은 모두 좋아한다.
물론 교통사고의 위험을 걱정하는 이나
길을 내기 위해 눈을 치워야 하는 전방의 병사들,
산사의 행자들은 싫어할 수도 있다.
여름에 비가 오는 것은 어떤가.
작물에 필요한 비를 기다리는 농부는 반가울 것이요,
이야기에 나오는 짚신 장수 어머니는 미울 것이다.
이렇게 내리는 비나 눈을 보고도 각자의 처지나 하는 일에 따라
또 마음가짐에 따라 그 보는 눈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정도전의 시에서처럼 평화로운 기분으로 낮잠 자듯
마음 공부를 하고 풍년을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사람들에게 비오는 날 생각나는 것을 물으면
보통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 만화책 보기’,
‘지지직 자작거리는 프라이팬에 부침개 부쳐 먹기’,
‘막걸리 마시며 시 읊조리기’, ‘친구들과 고스톱 치기’,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서 클래식 음악 듣기’,
‘친구와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 마시기’……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의 뜻을 물으면
대개 그 의미를 안다는 눈치다.
흔히 ‘손해 보는 날’, ‘헛탕 치는 날’, ‘먹거리나 돈을 벌 수 없는 날’ 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말은
원래 ‘비오는 날은 공空의 진리를 궁구하고 다스리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쉽게 풀이하면 ‘비오는 날은 마음 공부 하는 날’이라는 말이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영조 때 낭파라고 하는 고승이 있었다.
‘물결 낭浪, 물결 파波’를 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도를 가르고 물위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도력(?)을 지닌 분이었다.
어느 날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궁궐 뜰을 거닐고 있는데
저쪽에서 오색찬란한 서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지 않은가.
신하들을 시켜 알아보라고 했더니
기운이 뻗힌 곳에서 어떤 꾀죄죄한 늙은이가
물지게를 베고 잠들어 있어서 데리고 왔다며 부복시켰다.
영조가 누구냐고 묻자 낭파라는 이름을 대며 승려라고 밝혔다.
궁금증이 더해진 영조가 계속 물었다.
“승려인데 그 복장에 웬 물지게인가?”
“승려는 도를 깨쳐 중생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아시다시피 태종 대왕 때부터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전할 수 없어서
이렇게 변복을 하고 물을 길어다 주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조는 기특하게 여기고 불교의 가르침을 청했다.
연기緣起의 진리를 통해 통치자와 백성의 도리를 배운 영조는
낭파 대사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사에게 물었다.
“소원이 무엇인지 말하면 들어주겠소.”
“무집착의 수행자에게 소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하나만 이야기해 주시오.”
“그러시다면 온 나라의 수행자들이 수행도 못하고
성 쌓고, 길 내는 등 나라 공사에 부역만 하고 있어서 걱정이니,
그들에게 수행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렇다고 나라 일을 하나도 안 하면 어떻게 하나?”
“매일 수행하면 좋겠지만 나라의 사정도 있으니,
비 오는 날만이라도 공 도리를 다스리는 치공일治空日로 정해주십시오.
그러면 밥 먹기를 잊고 마음 공부에 매달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오는 날은 공 치는 날이 되었다.
용맹정진하는 의미에서 밥도 안 먹게 된 것인데,
참뜻을 모르는 이에겐 밥 굶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도에서도 안거安居라 하여 우기 때 밖에 나다니지 않고
한곳에 거하면서 수행에 집중하였다.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더 나아가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3개월씩 안거를 하고 있다.
비오는 날은 그냥 흘려보내는 날이 아니라
‘공空 치治는 날’로 진리를 탐구하는 좋은 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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