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0. 17: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오늘부터는 염불을 통해서 끝없는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제목으로 법회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불법에는 종파가 없이 모두가 일불제자이나,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한 가장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불교종단이 조계종인데다 저 또한 조계종도이기에 조계종의 종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법장을 열고자 합니다.
먼저,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대한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종단이라는 국적성을 나타내고, 불교는 불교종단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천7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사에서 적지 않은 종파가 출현했지만 그 가운데 조계종(曹溪宗)의 종맥(宗脈)이 가장 길뿐만 아니라 조계종은 신라 말 고려 초에 민족의 정신문화를 혁신하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기원으로 통일신라 후기, 불교가 교학에 치우쳐 승풍이 정체되었을 때 도의(道義)국사가 중국에서 선법을 전수하여 온 이래 선풍이 크게 일어나 불교계와 민족사회가 쇄신하게 되었고 고려조에 구산선문이 흥망을 거듭하며 통합된 것이 바로 지금의 조계종(曹溪宗)입니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종파들이 중국 종명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조계종은 중국에는 없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종명으로 고려시대에 형성된 조계종은 억불정책의 조선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하다가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재건되었고, 해방 이후 1962년에는 일제의 잔재였던 대처승을 승단에서 정화하여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종단의 사상의 핵심이 되고 주(主)가 되는 것을 높여서 부르는 종지(宗旨)라는 하는데, 종단의 핵심적인 교의와 취지를 말하는 것으로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 覺行圓滿)을 근본교리로 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을 종지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 2조).
자각각타는 자신도 깨닫고 타인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며, 각행원만은 깨달음을 자타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계종의 세 가지 종지(宗旨)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은 직접 사람의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 성품의 본질을 깨닫게 하여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것으로,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있으므로 미혹함이나 의심을 없애버리고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법도생(傳法度生)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동시에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의 오묘한 법을 세상에 전하여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불법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는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나 혼자만 할 것이 아니라 남도 그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도록 함으로써 모든 중생이 고통이나 미혹함을 버리고 부처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법의 시대에는 똑똑한 사람과 못난 사람, 잘난 사람과 잘나지 못한 사람 등,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모인데다 종교 또한 다양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 말법시대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직지인심이라는 간화선만이 견성성불의 전제조건이 될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기도 다양하고 학식도 다양하고 모두가 천층만층의 업을 가지고 있는 이 말법의 시대에 오로지 이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식으로 “화두만이 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다.”는 식으로 간화선에서만 답을 찾으려 든다는 것은 유일신 사상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부처가 되자는 것인데, 왜 그렇게 어렵게만 가려고 할까요.
제가 전번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영명선사가 “사료간”에 이르기를,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머리에 뿔 달린 호랑이 같이 현세에서는 큰 스승이 되고, 내세에서는 부처나 조사가 되리라.
참선은 닦지 못했다 해도 염불을 열심히 한다면 만인이 염불을 해서 만인이 모두 극락에 왕생하나니 극락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함을 걱정하리요.
참선만 닦고 염불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열 명 중에 아홉명은 잘못된 길로 빠지나니 선정 중에나 몸을 바꿀 때, 망경계가 나타나면 잠깐 사이에 본심을 잃고 흘러 따라가 버리리.
참선과 염불 모두를 닦지 않는다면 지옥의 불타는 쇠침상에 누워 불타는 구리기둥을 안게 되리니, 이런 사람들은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지나도록 믿고 의지할 인연을 하나도 만나지 못하리라.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 있는 마당에 깨닫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영명선사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부터 전해드리려는 인광대사(印光大師) 스님은 중화민국 이십구년(中華民國 二十九年) 약 사십년 전 스님인데 젊은 시절에 유학을 좋아하여 이학파(理學派)라 하는 정호(程顥)·정이(程頤)가 창시하고 주희(朱熹)가 집대성했다는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면서 유생(儒生)들이 불교를 비방한 글을 보고 자기도 그것을 본 따서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써보았는데 갑자기 눈병이 나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람되이 성인의 가르침을 비방하여 그 죄로 인해 앞을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잘못 함을 뉘우치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참회를 드렸더니 이상(異常)하게도 눈병이 곧 낫게 되어 전과 같이 앞을 보게 되자, 불법이 절대로 허무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불법의 진리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경전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경전을 보는 도중에 크게 발심이 일어나 스물한 살에 종남산 연화동에 도순장로에게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용서거사(龍舒居士)가 쓴 정토문(淨土文)을 보고는 생사를 해탈(解脫)하여 속히 불도를 성취함에는 염불법(念佛法)외에는 다른 수승한 방법이 없음을 알고 법우사라는 절에서 육년 동안 불철주야 염불(念佛)을 하고 마침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증득(證得)하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인광대사님께서 실체적 수행경험으로 남겨주신 인광대사의 정토법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 몸 얻기 어렵고(人身難得), 문명의 한 가운데 태어나기 어렵고(中土難生), 부처님 법 듣기 어렵고(佛法難聞), 생사윤회 끝마치기 어렵다(生死難了)”고 하셨소.
우리들은 천만다행으로 사람 몸 얻어 문명의 한 가운데 태어났고, 부처님 법까지 듣고 있소. 다만 불행히도 죄악이 많고 업장이 무거워 스스로 미혹을 끊고 삼계를 벗어나 생사윤회를 벗어날 힘이 없으니 몹시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런데 또다시 천만다행으로, 우리 여래께서는 철두철미한 대자대비심에서 임기응변의 대방편의 권법(權法)을 설하셨소.
천하의 모든 중생들에게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정토법문을 열어놓으신 것이오. 이를 보고 듣는 것은 정말로 행운 중의 막대한 행운이오.
무량겁 이래로 착한 뿌리를 깊이 심어온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불가사의한 법문들 들으며, 나아가 단박에 진실한 믿음을 내어 극락왕생할 수 있겠소?
내가 듣건데, 정토는 부처님의 본래 회포를 궁극적으로 다 털어놓으신 법문으로, 일체의 선종, 교종, 율종 등의 법문을 훨씬 초월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두 총망라한다고 하오. 간략히 말하자면 한 마디 한 구절이나 한 게송 한 경전으로 남김없이 포괄하지만, 자세하게 널리 말하자면 비록 삼장 12부의 심오한 교법이나 오종 역대조사들의 미묘한 논설로도 다 해석할 수 없다오.
설령, 천하의 모든 중생이 함께 정각을 이루어 광장설(廣長舌)을 드러내고 신통력과 지혜로 한 티끌 한 찰나마다 쉼 없이 치열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다할 수 있으리오. 진실로 정토법문이 본디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라오.
경전을 한번 보시오.
화엄경은 삼장 가운데 임금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맨 끝 편에서 십대원왕으로 귀착되지 않소?
또 법화경은 심오하고 미묘하여 모든 경전의 으뜸이라고 꼽히는데, 듣는 즉시 극락왕생하여 등각(等覺)보살과 가지런한 지위에 오른다고 설하지 않소?
그러니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도처에서 정토에 귀의하도록 가리키는 것도 모두 유래가 있지 않소?
그래서 문수보살이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보현보살이 권장려하며, 여래께서 대집경(大集經)에서 “말법시대에는 이 법문이 아니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고 수기하셨소.
용수보살도 십주비바사론에서 “행하기 쉬운 길이니 빨리 생사윤회를 벗어나라.”고 간명하게 보이셨소.
역대고금의 성현마다 한결같이 정토로 귀향하는 것을 권장함이 어찌 터무니없겠소?
진실로 부처님의 한평생 설법이 모두 염불법문의 주석(註釋)이나 다름없소.
교법은 부처님 말씀이고, 참선은 부처님 마음이며, 계율은 부처님 행실이오.
실제로는 마음과 말씀과 행실의 세 가지를 결코 서로 떼어 구분하기가 어렵소.
다만 각자 전문으로 치중하는 내용에 따라 교종, 선종, 율종의 명칭을 붙인 것에 불과하오.
그 가운데 오직 정토법문만은 그 출발이 범부중생들의 불도입문을 안내하는 방편으로 비롯되었으나, 실질상으로는 모든 종파 수행이 궁극 귀결점이 되는 독특한 가르침이라. 그래서 아비지옥에 떨어질 극악죄인도 맨 끝자리나마
참여할 수 있고, 부처와 다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 보살들조차도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한다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천만 근기의 중생들을 다 함께 교화시켜 모든 갈래의 가르침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소. 그러나 부처께서 열반하신 뒤 법을 전하는 제자들이 각각 자기가 가장 뛰어난 한 가지 법을 선택하여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한 법문으로 깊이 들어가(一門深入) 모든 법이 궁극적으로 서로 하나로 통함을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이오.
비유하자면 제망(帝網)의 천개의 구슬이 각자 서로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한 구슬이 천 구슬에 두루 비쳐지고 천 구슬이 모두 한 구슬에 모여들어 서로 연결되나 뒤섞이지는 않고, 각자 독립되어 있으나 서로 떨어지지는 않는 것과 같소.
현상적인 자취에 얽매이는 자는 일체의 법이 법마다 따로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오. 그렇지만 본질적인 이치를 잘 깨닫는 자에게는 일체의 법이 법마다 서로 원융회통하게 되오.
마치 성의 4대문이 열려있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까운 문을 출입하는 것과 같소. 문은 비록 다르지만 성안을 드나드는 것은 다를 리가 없소.
만약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어찌 오직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설하신 몹시 심오한 가르침만 근본 지리에 도달하고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법이라고 집착할 수 있겠소?
세간의 오음(五陰), 육입(六入),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칠대(七大) 등 모든 것이 하나하나 근본진리에 도달하고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게 하는 법이 될 것이오.
나아가 이러한 모든 것이 각각 그 자체 진리이고 근본이며 마음이고 성품이라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 칠대가 모두 여래장이며, 미묘한 진여성품이라고 말씀하시는 게요. 이렇게 본다면 어느 한 법도 불법 아닌 게 없고, 어느 한 사람도 부처 아닌 이가 없게 되오.
그런데도 어찌하여 우리 중생들은 구슬을 옷 안에 가지고서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이오.
보배를 품 안에 품고서 걸식하는 중생의 곤궁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억울하기 짝이 없소.
여래의 마음을 지니고서 중생의 죄업을 지으며, 해탈의 법을 가지고서 윤회의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불법 가운데 방편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 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아주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에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참선과 염불은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하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爲山)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 따라 어느 순간 자성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으 이치라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 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반면에 정토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자리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할지 모르오.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 안거하고 있고, 시방세계가 끝없고 수없이 많으며, 한 세계마다 염불하는 중생들 또한 끝없고 수없이 많을텐데, 아미타불이 어떻게 한 몸으로 동시에 시방허공의 끝없고 수없는 세계에서 염불하는 일체 중생들을 두루 빠짐없이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가 평범한 중생의 지식견해로 부처의 경지를 추측하려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질문인데, 한 가지 비유로 그 미혹을 풀어보겠소.
달 하나가 하늘에 떠서 천만 강물에 제 모습을 각각 드리울 제, 달이 무슨 특별한 마음을 쓰겠소? 하늘에 단지 하나의 달 뿐인데, 큰 바다와 강물 및 작은 시냇물은 물론 작게는 한 바가지 한 방울의 물에도 온전한 달의 모습이 한결같이 비춰지오.
게다가 한 강물의 달이라도, 한 사람이 쳐다보면 하나의 달만 그에게 보이지만, 백 천만 억의 사람이 백 천만 억 곳에서 그 한 강물의 달을 보면, 각자에게 하나의 달씩 똑같이 보이지 않소?
또 백 천만 억 사람이 각각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움직이면, 달 또한 각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똑같이 움직이고 그들이 멈추면 달도 따라 멈추어 선다오.
그러나 오직 물이 많고 고요할 때만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은 이내 숨어버리니 달은 정말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바가 전혀 없소.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이 혼탁하거나 물결치며 흐르기 때문에 달의 모습을 받아 비추지 못하는 것이오.
중생의 마음은 바로 물과 같고 아미타불은 달과 같소.
중생이 믿음과 발원을 함께 갖추어 지성으로 염불하면 부처가 그에 감동하여 응답을 보인다오. 마치 물이 맑고 고요하면 달의 모습이 저절로 비추어지듯이 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거나 정성스럽지 못하고 탐진치와 어울리면, 부처와는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소. 마치 물이 혼탁하거나 움직이면 달이 빠짐없이 비추어 주더라도 그 모습을 드리울 수 없는 거와 같소.
달은 세간의 빛깔있고 형상있는 물건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미묘하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소. 하물며 번뇌와 미혹을 깨끗이 제거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어 마음은 허공을 다 감싸고 도량은 시방법계를 두루 포용하는 아미타불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화엄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중생 앞에 두루 나투시네. 인연 따라 나아가 두루 감응하면서도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머무시네.”
그러므로 모든 법계에 두루 감동하고 호응하더라도, 실제로 부처님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오고 가는 모습도 없다오. 단지 인연이 무르익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와서 그들을 맞이해 극락왕생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 뿐이오. 위와 같은 의심을 일으키는 자가 정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비유로 대강의 요지만 간추려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도록 권장 격려하는 거라오.
사실, 관세음보살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성불하시어 정법명(正法明)이라는 호칭을 얻으셨소. 단지 그분의 자비심이 너무도 간절하신 까닭에 비록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안주하시면서도 실보(實報), 방편(方便), 동거(同居)의 세 국토에도 모습을 나투시는 것이오.
또 비록 항상 부처님 몸을 나투시면서도 동시에 보살, 연각, 성문 및 인간, 천상 등 육도 중생의 몸으로도 두루 나타나신다오. 그리고 비록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면서도 동시에 끝없는 시방 법계에 두루 색신을 나투시고 계실 따름이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지 중생들에게 이익만 있다면 달려가 도와주지 않음이 없소.
마땅히 어떤 몸으로 제도해야 할 중생에게는 곧장 바로 그 어떤 몸으로든 나투어 설법을 해주시는 것이오.
흔히 보타산(普陀山)은 관세음보살이 몸을 나투신 곳이라고 일컫소. 그런데 이는 중생들에게 정성을 바칠 구체적인 곳이 있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이 산에 자취를 보이신 것뿐이오.
어찌 관세음보살이 보타산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안계실 수 있겠소?
달 하나가 물에 뜨면 모든 강물에 모습이 비치기 마련이오. 작게는 한 그릇의 물이나 한 방울의 물에까지 각각 온전한 달의 모습이 나타나오.
다만,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의 모습이 분명치 못할 뿐이오. 중생의 마음도 물과 같아서 오로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 염송하는 즉시로 보살이 은연 중 그윽히 나타나 가호해 주신다오.
그러나 만약 마음이 지성스럽지 못하거나 오롯이 일념을 이루지 못하면 관세음보살의 보호 구제를 받기가 어렵소.”
=============================================
이렇게 하여 인광대사께서 남겨놓으신 정토 법문을 들려드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토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 대목을 가슴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가족 모두가 이차인연으로 성불하시길 바랍니다.
|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불교교리·용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因緣/청담스님 (0) | 2009.12.20 |
---|---|
불교란 무엇인가?/성철스님 (0) | 2009.12.20 |
三 歸 依(삼귀의) 및 삼종삼보 (0) | 2009.12.18 |
순간에 임종을 한다해도 자신있게 사는법 (0) | 2009.12.18 |
사티(sati)라는 인도말의 우리말 번역어는 온 마음 (0) | 2009.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