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 정근/무상 세월을 벗어나는 삶의 지혜

2009. 12. 21. 23: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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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 정근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南無 南方化主 大願本尊 地藏菩薩
地藏菩薩
地藏菩薩

지장보살 멸정업다라니
地藏菩薩 滅淨業多羅尼

『옴 바라 마니 다니 사바하』(3번)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고아 일심귀명정례

故我一心 歸命頂禮

지장보살 위신력은 말로하기 어려옵고
잠깐사이 보고 듣고 한순간만 생각해도
그 복덕은 무량하니
이제 모두 귀의하여 정례 예배 드립니다.

 

옛말에 “숙석청운지에 차타백발년”이라(宿昔靑雲志 蹉跎白髮年)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밤마다 잠자리에서 청운의 푸른 꿈도 많았는데 넘어지고 헛딛으며 살다보니 어느새 백발이 되었도다. 하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온 삶들이었건만, 작금의 경제는 기성세대들에게 차타백발년이라는 말대로 넘어지고 헛딛으며 살아온 노년이라는 스스로 자조하게 될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300년 전 시대의 원효스님께서는 발심수행장에 이런 말씀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금일부진(今日不盡)이어늘, 조악일다(造惡日多)하고 명일무진(明日無盡)이어늘, 작선일소(作善日少)하며 금년부진(今年不盡)이어늘, 무한번뇌(無限煩惱)하며 내년무진(來年無盡)이어늘, 불진보리(不盡菩提)로다.

 

시시이이(時時移移)하야, 속경일야(速經日夜)하고 일일이이(日日移移)하야, 속경월회(速經月晦)하며 월월이이(月月移移)하야, 홀래년지(忽來年至)하고 년년이이(年年移移)하야, 잠도사문(暫到死門)하나니,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와생해태(臥生懈怠)하고 좌기난식(坐起亂識)이니라.

 

기생(幾生)이간대 불수(不修)하고 허과일야(虛過日夜)하며 기활(幾活)이간대 일생불수(一生不修)오. 신심유종(身心有終)하리니 후신(後身)은 하호(何乎)아! 막속급호(莫速急乎)며 막속급호(莫速急乎)아!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하루하루 악행은 많이도 짓고 내일 낼로 미루면서 선업은 쥐꼬리만큼이나 짓네. 금년도 다 가는데 번뇌는 끝이 없고 내년으로 밀어놔도 깨달음의 보리정진은 다가가질 못하네.

 

시간은 속히 흘러 낮과 밤은 빠르게도 지나고 하루하루 속히 지나 달을 넘기고 한 달 한 달 하다 보니 일 년을 흘낏 지나쳐 한 해 두 해 지나다보니 문득 죽음 문턱에 이르렀네.

깨진 수레 못 굴러가듯, 늙은 몸에 수행 닦음 있을 건가. 틈나는 대로 누워 뒹굴던 게으름에 앉아본들 혼미한 망상에 어지러울 뿐이라.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기도정진수행하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보내며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한 생의 헛된 몸뚱어리 수행으로 닦지 않는가?

 

허망한 몸과 마음 끝이 있으리니 죽은 다음 생은 어찌 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급한 것이거늘,” 하는 대목입니다.

 

금일은 영차사하고 명일은 조피사라(今日營此事 名日造彼事) “오늘은 이 일을 경영하고 내일에는 저 일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중생들은 뭔가를 열심히 하고들 살아가지만 부지불각에 사멸지(不知不覺 死滅至)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쓰러져 죽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무상한 삶과로사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환성(喚醒)이라는 호를 쓰신 지안 스님이 계셨는데 지안선사의 설법이 너무나 깊고 오묘하신데다 평소 신령스러울 정도로 기적적인 일들이 많아 스님 계신 곳은 많은 중생들이 모여들었는데, 말법 세상에 도가 천 길이면 마가 만 길이라 듯이, 유생들의 시기질투로 인해 지리산에서 참선수행 중에 계신 스님을 잡아다있지도 않은 죄로 날조해서 감옥에 5년 동안을 가두더니 무죄가 판명되었음에도 끝내 죄를 만들어 제주도 조천 연북정으로 유배시켜 영조 5년 7월 1일 도착해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가 7월 7석 오후에 순교하시니 3일 동안 한라산에서 굉음이 울리고 파도가 들끓었으며 영결식 하던 날 하늘에 무지개가 서고 서기가 빛을 내자 세인들은 성자의 입적이라고까지 전해오던 스님이셨는데, 한국불교의 법맥과 계맥은 모두 환성 지안선사의 맥입니다.

 

하루는 환성스님께서 서광사 큰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도중에, 웬 사람이 법당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눈은 주먹만 한 왕눈인데다, 눈방울은 일월과 같고 눈빛은 호랑이 눈처럼 화등잔 만한데 키가 9척 장신인 굉장한 사람이 법당 안을 불쑥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아이고, 대단하시네, 난 또 누구라고, 자치벌레 어르신네가 대단하시네.”하고 문을 닫아버리자, 대중이 어안이 벙벙하다가 “웬 사람이 스님을 보고 자치벌레 라고 하십니까?” 하고 묻자, 환성스님이 대답하시길, “그 사람은 영산회상에 계셨던 화엄신장이십니다. 영산회상에 화엄신장인데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당시, 나는 자치벌레였는데 자치벌레로서 부처님 발 앞에 붙어서 부처님 법문을 들은 인연공덕으로 수겁생 동안 몸을 바꿔 금생에 인간으로 환생해서 출가사문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 화엄 대법사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때의 화엄신장이 지나치다 설법소리를 듣고 누가 이리 설법하나 싶어서 문을 열어보고 간 것입니다.” 했답니다.

 

태양계의 지구는 한 번 자전이 24시간이고 한 번 공전이 365일 이지만, 명왕성이나 천왕성은 한 번 자전하는 것이 지구의 70년에 해당되기에 그곳의 1년은 인간 70년이 된다고 하니, 아미타경에 상방세계 하방세계 등의 모든 세계가 나옵니다만, 현대과학이 지금 태양계 밖에 또 다른 은하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가고 있잖습니까?

 

이렇게 부처님 당시 자치벌레에 불과했던 환성스님도 다겁생을 돌고 돌며 몸을 바꿔 금생에 화엄경의 대법사가 되셨듯이 금생에 사람 몸 받은 우리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기도정진수행하지 않고 낮밤을 헛되이 보내버리고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한 생의 헛된 몸뚱어리를 수행으로 닦지 않는가? 허망한 몸과 마음 끝이 있으리니 죽은 다음 생은 어찌 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급한 것이거늘,” 하는 말처럼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 늙어 노망이 나거나 치매에 걸린다 해도 입에선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잠재의식 정도가 아니라 몽중일여, 동중일여의 칠식 팔식까지도 염불이 훈습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정도가 돼야 삼매에 든다고 할 것입니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마음의 인식이므로 마음밖에는 따로 법이 없구나.” 했던 원효스님의 말씀대로 오직 하나, 기왕에 있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성불이 결정된 대승보살처럼 쓸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살아도 다겁생 동안 지어온 악업을 탕감하기에도 바쁠 것인데 사람 몸 받은 이 일대사 인연에 부처님 법까지 만난 한 생을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며 허송세월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열한 번째인 광학박구난(廣學博究難)처럼 자기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널리 배우려 들지 않거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다 깨달은 것처럼 자만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탐구하기 어렵고 아까 말씀처럼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와생해태(臥生懈怠)하고 좌기난식(坐起亂識)이니라 했듯이 배움에 게으름만이 아니라 기도정진에도 눈곱만큼 기도하고는 엄청 많은 기도를 한 것처럼 하는 것을 경계하는 대목이 바로 광학박구난입니다.

 

열두 번째는 금강경에서 그리도 경계하는 네 가지의 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뿌리로 한 소아적인 사고로 갖는 아만심을 없애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 멸아만난(除滅我慢難)이라 하는 것으로 지혜인은 순간순간 스스로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한 아만심은 없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열세 번째는 불경미학난(不輕未學難)이라 서로가 못 배운 죄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는 동병상련이요, 끼리끼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는 마음이라도 있지만, 조금 배웠다고 스스로가 뭔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 일수록 자기보다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기 어려운 것이 중생심인지라 아닌 것처럼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 감춰져 있을 때는 상대방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후일에는 자기에게 해로움으로 돌아오는 원인이 되기에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열네 번째의 심행평등난(心行平等難)에 있어서는 일상에 마음과 행동을 평등하게 갖기 어렵다는 것인데 매사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계합하고 부합되는 것을 심행평등이라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상에서 거짓 없고 꾸밈이 없을 때를 일미평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서편(緖編)으로 학문의 중요성과 공자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1 편인 학이(學而)에 “子曰, 교언영색이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니라.”하고 나옵니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 빛에는 어진 마음이 드물다고 했듯이 어떤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한 마음을 내기 어렵고, 이해와 손익을 따져 차등을 두지 않기 어렵다 했지만, 보편적인 중생심은 가진 자에게는 속으로는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굽신거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내기보다는 군림하려드는 것이 바로 제멸아만난과 불경미학난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심행평등난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만, 자기 안에 감춰진 보편적인 중생심을 알아차려 경계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길을 가는 삶인 것이지 중생심으로 사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난득에 불법난봉인 다겁생의 윤회길, 금생에 사람 몸 받아 불법을 만난 이 일대사 인연을 또다시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누구나 행복한 삶으로 역전할 수 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혹시 사는 이유 아세요?" "... 행복하기 위해서!" 바보처럼 다시 한 번 물어본다. "가장 원하는 게 뭐예요?" "아따, 행복이라니까 그러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키워드는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어떤 사람이 터프하게' 행복을 불러본다 "야, 행복! 이 빤질이 녀석, 왜 나만 살금살금 비켜가는 거냐?" 최첨단 마이크로 목청 높여 불러봐도 행복은 무소식, 고성능 현미경으로 하루 종일 째려보아도 행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충분히 촉감한다. 붉은 와인처럼 섹시하게 우리를 도취시키는 행복의 입술, 하얀 구름처럼 포근하게 우리를 껴안아주는 행복의 심장... "여기 행복 한 접시만 주세요!" "이 주소로 행복 1킬로그램만 배달해 주세요!" "여보세요, 나에게 당신의 행복 5분만 꿔줄래요?" 제아무리 가까운 친구, 부모, 부부 사이라도 이런 말은 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은 '매혹적' 인 것,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비매품 뛰어난 과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생산해낼 수 있는 자가 발명품이다 당신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록 힘든 일이 많을수록 ' 행복 발명가'가 될 확률은 높다 인생 역전에 도전할 기회가 많다 불평불만하고 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과감하게 뜯어고쳐 인생을 신장개업하자 절망을 희망으로 그래서 행복한 삶으로 인생 역전하자! -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