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장을 알면 윤회의 끝이보인다

2009. 12. 23. 23: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요즘 살아가는 세상을 보게 되면 총체적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재임기간 중에 자료를 빼돌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가며 광우병 소고기나 환율정책의 실패와 같은 정책의 실수들로부터 어떻게든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고자 하는 현 정권의 개그에 가까운 퍼포먼스에는 답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 장로가 대통령됐다고 아래 것들은 교묘하게 불교에 대한 탄압에 가까운 미망에 찬 불이익과 차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천민에 가까운 차별과 도성 출입금지까지 당해가면서도 국난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가며 나라를 위해 싸워온 불교가 겨우 임기 5년의 전과 14범에 제멋대로인 장로 대통령 시절이랍시고 온통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지옥세계로 만들어 예수 팔아 배불리는 종교의 탈을 쓴 저들의 업보가 얼마나 지중하게 될런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몇 생을 두고 환생을 하셨다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까지 추앙을 받고 계시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께서는 고뇌에 빠져 계신다고 합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지금의 티벳사람들의 중국정부에 대항하는 책임을 달라이 라마에게 책임전가를 시키고 티벳의 국민들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에 실망하고 달라이 라마에 대한 신뢰가 점점 약해져 간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업의 논리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범어로 카르마(karma), 팔리어로는 캄마(kmma)라고 하는 업(業)이란 말은 소위 뭔가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입으로 짓는 말과 동작인 행위의 두 가지 업의 뿌리가 되는 생각, 즉 뜻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 자체와 그로인해 발생되는 파동의 에너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업은 짓는다는 의미이지만, 생각하는 의념의 작용으로 의념이 뜻을 결정하고 선과 악이라는 업을 짓게 해서 그로부터 발생되는 파동에너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업은 이 시대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천정부지로 오르는 기름 값에 시달리는 것을 공업(共業)이라 부르고 그 속에서도 기름 값으로 돈 버는 유전업자들의 업이나 기름 값 감당을 못해 출어를 포기하는 어부들의 업이나 기름 값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업이 바로 별업(別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구별해서,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내부의 의업(意業)을 말하는 것이고,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후에 외부로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을 말하지만, 이 세 가지 업들이 밖으로 나타나 표현되면 이를 표업(表業)이라하고 밖으로 표현은 안했다 쳐도 신구삼업으로 인한 선업과 악업이 유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업이란 말은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 인과응보(因果應報)니, 업보(業報)니,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들 하는 말은 모두 업과 관련된 불교적인 용어들입니다.

 

하지만, 업과 윤회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전통사상으로, 선한 삶을 살면 죽어서 하늘에 태어난다는 일종의 생천사상(生天思想)이었습니다.

 

한국적인 “예천불지”의 기독교사상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소박하도 할까요? 단순하다고 할까요? 이런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를 떠나 가장 인도적인 전통으로서 그들의 삶의 한 배경이 되고 있기에 아직도 인도에서는 민중봉기나 반란이라는 말들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인 생천사상과 업설을 받아 들여 그것을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업설은 불교에 수용되어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나 윤회 좋은 업을 쌓아서 하늘세계에 태어나 편안히 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청정히 해서 마침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그 목적이 있기에 불교의 업이나 윤회설은 단순한 생천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인들로서는 이러한 불교의 견해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차제설법(次第說法), 즉 단계적인 가르침을 펼치신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베풀고 계율을 잘 지키면 생천하지만, 악한 일을 하면 좋지 않은 곳에 태어난다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업보설을 가르치고 난 후, 다음으로는 그릇된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을 청정히 하도록 한 다음,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이 진리에 눈을 뜨도록 했던 것입니다.

 

대중들이 이해되기 쉽게 전통적인 업과 윤회설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부처님의 지혜롭고 자상하신 가르침의 차제방편설법인 것입니다.

 

업이란 무엇인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업(Karma)이란 우리들이 짓는 행위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의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신구의 삼업(三業)그 자체인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와계신 이 자체도 바로 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업과 일반적인 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행위라고 말할 때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직업 속에서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리키지만, 불교에서는 생각으로 짓는 것을 가장 무거운 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도 중요하지만 생각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은 말이나 행동의 뿌리가 되는 말과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이 청정해지면 말이나 행동도 청정해지지만, 마음이 거칠고 욕심이 많으면 말과 행동도 거칠고 탐욕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에 금강산관광에 북한군의 총격에 숨진 관광객의 사건이나 강화도 모녀 피살사건의 모든 것들이 이 한 생각이 일어나 벌어진 상황들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영향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행위와 다른 것입니다.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일으키는 말 한마디나 손짓 한 번의 결과는 그대로 자신의 잠재의식에 종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과거 행위의 종자는 소멸되지 않고 다음 생이나, 아니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우리들의 생각이나 말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의 힘이 쌓이는 곳을 부파불교에서는 일미온(一味蘊), 또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했던 것니다.

 

소위 부파불교라고 하는 근본불교에서 이러한 심층의식, 잠재의식을 중시한 것도 이러한 업의 이론이 발달한 결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은 각자의 운명을 창조하는 중요한 과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말, 행동은 업이 되고 업의 힘이 쌓여 있다가 다음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우리의 생각이나 말, 행동은 자신의 삶에서 습성이나 습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행위나 생각의 결과가 바로 오늘의 현주소인 것이고, 지금의 행위는 미래의 나를 창조하는 중요한 에너지가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이나 한 나라라고 하는 공동체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주적인 에너지의 파장을 일으키게 되고 그 파장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하다못해 키우는 개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주인의 행동이 개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 것이며 양계장에서 음악을 틀어놓았더니 닭들의 산란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의업의 에너지 파장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좌충우돌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한 나라를 일개 기업정도로 생각해서 나를 따르라!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일을 저지르고 본다면 국민들의 사고는 어떻게 변해 가겠습니까?

 

자기의 운명을 창조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업을 별업(別業)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적인 차원의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 둘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볼 것인가의 차이일 뿐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구성원들인 국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를 하는 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이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황금만능주의에 쫓겨 물질만을 추구했던 우리 사회 전체의 생활습성이 이제는 도덕불감증에 걸려 전과자인 사람도 대통령이 되어 취임 한지 채, 백일도 안 되어 공사장에서 관리 소홀이나 부실시공 일 때 나타나는 불신임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할 때 갖추어야할 도덕적인 부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황금만능에 떨어졌던 이 나라 국민들이 함께 겪어가야 할 공업인 것입니다.

 

불교의 업에는 업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한 어떤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업보(業報)의 원칙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나는 어제 만들어 지었던 나의 생각이나 행동의 결과인 것입니다.

 

조직이나 한 나라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제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 온 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오늘 정치권과 이 나라의 공무원들과 국민 대다수가 하는 짓을 보면 답은 나오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