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법(참선법) (1)

2009. 12. 22. 00: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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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선사(滿空禪師) 법훈(法訓) < 새벽의 소리 >



2. 나를 찾는 법(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바른 길을 가르쳐 주나니라.


    참선 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가는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인 것이니라.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거쳐하여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누우며,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조용한 가운데에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 된 사람으로
    불조의 혜명을 상속받은 분이니라.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 하듣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버려
    믿고 닦아 나가지 못하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를 받느니라.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에 공부가 성취 되나니라.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깨달음이 있게 되나니라.

    남음 없는 신심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이라면
    다음 생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렵게 되나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명안종사(明眼宗師)의 허락[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가 멸한 곳[심행처멸(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학령으로는 20세로부터 30세까지가 가장 적당한 나이니라.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상대(相對)가 끊어진 참구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에서 얻은
    한 낱 이것만 같지 못하니라.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으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장소[도량(道場)], 스승[도사(道師)], 도반(道伴)인 것이니라.

    도를 닦는 사람은 도에 절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에 절도를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느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다스리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친구[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참선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오랜 생, 오랜 시간동안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습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화한 곳에서 태어나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헤매는
    고통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모든 여자의 꿈은 혼자 여행가는 것이다/김이연 


     

    모든 여자의 꿈은 혼자 여행가는 것이다..

    여자 홀로 기다란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은

    생각 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매력으로 느껴진다.

    비행기 창가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여자도 역시 아름답다.


     Legend of the Sea


    바닷가를 혼자 걸어가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여자의 모습도 그림처럼 멋지다.

    이런 연출을 기대하면서 여자는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모든 여자의 영원한 꿈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둘이하고 싶은 여행보다는 혼자서 떠 나고 싶은 여행의 충동이 더 크다.



    원래 여자는 고독한 모습으로 존재 할 때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여자의 깊은 가슴 속에는 항상 메워지지 않는 빈 자리가 있다.

    부모도 형제도 사랑하는 사람도 메워줄 수 없는 자리이다.



    가을이나 겨울 같은 특정한 계절이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기분에 따라서 여자는

    영원히 혼자 떠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면서 산다.



    늘 가방을 꾸리기만 한다.

    혼자 태어나서 엄마의 감시를 받으면서 요조숙녀로 자라나

    겨우 어른이 되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었구나 했을 때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뒤 세월이 좀 지나면 아이들이 태어난다.

    아이들은 더 작은 눈으로 짠 그물이 되어서 여자를 조인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강하게 조여드는

    결박의 끈으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묶어놓고 만다.

    잠시도 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든다.

    스스로 나가지 않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못 나가는 것인지 안 나가는 것인지

    그 구분이 애매할 때가 있다.



    결국 아이들이 커서 모두 어른이 된 날 여자는 모든 그물에서 해방된다.

    그때 자기자신을 돌아다 보면

    이미 오십이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땐 여자가 홀로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도

    조금도 아름답지 않고 매력있어 보이질 않는다.

    청승스럽고 초라해 보일 뿐이다.

    아무도그 여자한테 말을 걸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다.

     

     


     


    말하자면 누구의 관심도 눈길도 끌 수 없는 여자가 되어버린 나이에야

    겨우 모든 그물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는 아무데에도 가고 싶어지지 않는다.

    무슨 옷을 입고 나서야 남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

    백화점에도 이름난 디자이너의 옷가게에도 몸에 맞는 옷은 없다.

    마음으로는 젊어보이는 옷을 고르고 싶은데

    그런 디자인의 옷은 몸에 맞는 사이즈가 없다.

    좋은 옷 입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제부터야말로 여자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 놓친 시간이 아무리 길고 아깝다해도 그건 생각하지 말기로 한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지워버리기로 한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가냘픈 허리에 기다란 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되는대로 틀어 올리고 기차 에서 내린다.

    황야를 달려온 속도없는 기차에서 내리면

    그 여자는 새롭고 낯선 아프리카의 공기를 몸으로 느끼면서 주위를 살핀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가 존재하고 싶은 자리에

    자기자신을 놓아두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인가.



    <김이연의

    '女子가 자존심을 버린다면 그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