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머리에 웬 붕대를 감고 계세요?/벽산큰스님

2009. 12. 20. 18: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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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머리에 웬 붕대를 감고 계세요?
 -벽산 큰스님을 기리며...-

  (↓은 아래 주석이 있음)


                    -광덕사 산문-
상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살지 만 수행자들은 세상의 영화를 뜬구름 같이 본다.

 

그들이 일의일발(一衣一鉢;옷.밥그릇 하나)로 외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오직 생사에 자재하고자 함이요,

한평생을 한장 좌복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다만 깨달음을 향해 일체 욕망을 산문 밖에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벽산스님을 만나기 까지

내가 산문(*↓)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사십여 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해가 더해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먹빛 빨래에 풀 먹여 손질하는 일이 오십이 넘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인 터인데,

그것이 조금도 싫지 않으니 아마도 전생부터 익혀온 일인가보다.

다행히 숙세의 선근이 있었는지 많은 선지식을 가까이 섬길 수 있었으니

그러한 것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

나를 출가의 길로 인도하신 분은 속가로 종조부가 되는 청주 용화사 벽산(碧山)스님이다.

나에게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던 분이다.

 

벽산스님의 크신 종적

벽산스님은 일제 시대 암울하기만 했던 소년시절, 절에 가면 마음껏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직지사로 입산했다.

앉으나 서나 경전을 읽었고 날이 갈수록 경전 읽는 일에 재미가 난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다가 코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날이 빈번했다.

법주사에 가서도 경전읽기에 몰두한 스님은 십대 말의 나이로 법주사 강원의 강사가 되셨으니

법주사 역사상 ‘최연소 강사’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찍부터 포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도시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청주 용화사 주지로 부임해 학생포교와 교도소 포교에 헌신했다.

대처와 비구가 싸움을 하던 정화 때는

“불교인끼리 싸우는 것은 자멸이 있을 뿐”이라며 화합을 주장했다.
스님께서는 불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처든 비구든 싸움을 하면 스스로 불교를 갉아먹는 일이다.

 불자로서 서로 싸우는 사람들은 사자몸 가운데 벌레다.

승가는 화합이 생명이니 절대로 싸워서는 안된다.

싸워서 얻은 힘은 싸움으로 망한다”라며 싸우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정화가 끝난 뒤 조계종 종회의 초대, 2대, 3대 종회의원이 되어 통도사의

조용명스님과 함께 화동파(和同派)의 기수가 되셨다.

 

항상 종단을 걱정하시고 젊은이들을 포교하는데 앞장서신 분이다.

또한 전쟁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했다.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셔서 일찍이 학생법회를 시작했다.

그 학생회 출신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현재 재가법사로, 출가해 스님으로

전국에서 포교하고 계신다.

벽산스님의 자비심은 유별났다.

승속을 막론하고 사람을 대할때는 언제나 존경의 예를 다했다.


걸인에게도 허리 굽혀 큰 절

젊은 스님들을 만나도 먼저 삼배를 올리고, 본사의 스님들과 전화통화 할 때는 전화기를 들고

“안녕히 계십시오”를 몇 번이고 거듭하며, 머리 숙여 절하곤 했다.

“스님, 전화기에다가 절을 하면 상대방이 보기라도 합니까” 하면

“누가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면 내가 편안해 지니까 하는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시는 얼굴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허리 굽혀 절을 하는 스님은 걸인에게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예사였다.

초파일 때나 특별 행사가 있을 때는 걸인들이 수도 없이 찾아와 스님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스님의 주머니는 돈이 들어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권속들에게는 엄격하여

백 원짜리 하나라도 이유 없이 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연세가 많으셔서도 매주 교도소에 가서 교화하셨다.
사상범을 교화해 출가시켜 제자를 만들기도 했다.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출감하는 죄수들은 대부분먼저 스님을 찾아온다.

차비를 얻어가고 목욕비를 타간다.

스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주시는데 부엌 사람들에게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어서 짜증을 내면

“오랫동안 따뜻한 밥 한 그릇 못 먹어 보았을 뗀데 

 지바심을 배운다는 사람으로 어찌그리 인색하냐?"며 오히려 타이르시곤 했다.

 

내가 강원을 졸업하고 인사차 들렀을 때

“너 정말 중노릇을 할거냐?”고 물으셨다.

“중노릇 말고 다른 것 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답을 드렸더니

스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놈아, 중노릇을 하려면 여자를 조심해라!” 하셨다.

 

용맹정진, 죽음, 세번예언... 그리고 좌탈입망

이 말씀은 다른 분에게서 들은 어떤 법문보다 내 가슴에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스님은 일제 말기, 당시 상황에 따라 결혼을 했다.

그러면서도 조계종 승적을 취득하셨고 조계종에서 활동했다.

조계종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 대처를 했다는 것은 큰 결점이 아닐 수 없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대처를 하는 것이 흠이 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그렇게 하였겠지만

“중노릇하려면 여자를 조심하라" 는 말씀은 천가지,

만가지 법문보다 나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도 남았다.

젊은 시절, 내게도 이성에 대한 갈등이 없지 않았다.

이성에 대한 갈등과 그리움은 언제나 강한 숙제였다.

그럴 때마다 스님의 한숨어린 이 말씀이 욕망을 자제하게 했고,

나를 이 외길로 걷게해준 힘이 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신앙심이나 수행력은 어떤 스님보다 뒤지지 않았다.

조석 예불을 거르는 일은 한번도 없었고, 기도를 올릴 때나 불자들의 불공을 올릴 때는

그 염불소리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듣는 이들의 가슴으로부터 신심을 일어나게 했다.

스님은 자주 용맹정진 기도를 하셨다.

그럴 때면 소금 탄 물을 들고 법당에 들어가셔서 이틀, 삼일을 꼬박 새워가면서 염불을 하셨다.

어쩌다 목탁소리가 끊어져 조용하여 법당을 들여다보면 목탁은 저만치 굴러가 있고

스님은 졸고 계셨다.

 

“스님, 이제 주무시고 하십시오.

 몸을 돌보셔야지요”하면 스님은 한숨을 길게 내시면서,

“내가 또 졸았느냐?

 기도를 하려 하면 잠이 오니 어떻게 하면 수마를 이길 수 있겠느냐?

 대답 좀 해보아라” 탄식을 하셨다.

그런 탄식을 보며 수행자의 길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고,

나의 게으름을 돌이켜 보곤 했다.

 

스님 머리에 웬 붕대를 감고 계세요? 

한때 강화 보문사 주지를 하신 적이 있다.

인사차 찾아갔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무를 심고 계셨다.

“왜 붕대를 감고 계십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도량에 와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무슨 업장이

 이다지도 두터운지 잠이 이렇게 오겠느냐.

 잠 깨라고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려서 깨졌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스님의 목소리를 듣는 내 가슴은

 벼락을 맞고 천갈래 만갈래 갈라지는 고목나무 처럼 무너졌다.)
 

일주일간 잠을 주무시지 않고 용맹정진을 하니 당연히 잠이 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참선곡에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가’ 했는데

스님께서는 잠오는 것 성화해서 목탁자루로 머리를 너무 세게 쳐버린 것이다.

스님의 기도 정진은 이와 같았다.

 

오랜 세월 외국생활을 하면서 기도다운 기도 한 번 제대로 못하며 살아온 나는

스님의 용맹정진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가끔 신심이 해이해 질 때는 스님의 깨진 머리를 회상하며 나의 머리를 쳐보기도 하지만

깨어지도록 때려 본적은 한번도 없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국가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고 부모를 선택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죽을 때는 다소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수행자의 경우에는

더욱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있다.


수도자에 있어서 그 죽음을 보면 그의 평생 수행을 점수매길 수 있을 것 같다.

앉아서 입적한 스님은 무수히 많고, 서서 돌아가신 분도 많다. 
거룩한 수행을 하신 분들은 가고옴에 걸림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주변을 떠나시는 어른들의 모습을 볼 때 나의 죽음이 두려워진다.

명성을 얻었던 이름있는 분들께서 보여주신 임종마저 정말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젠 살아온 날에 비하여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이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탄성 큰스님의 경우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제자 문도들이 병원에 입원하자고 했을 때,

“이제는 갈 때가 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면 수도자의 마지막을 망신시키는 일이다.

 이대로 가려하니 그리 알아라”

하시고는 입적하셨다 하니 참으로 대단한 어른이다.

 

지난 87년 봄 입적하신 벽산스님은 당신의 임종을 세번 예언하셨다.

임종 3년 전에 ‘3년밖에 못산다’ 하셨고,

3달 전에 한번 더 말씀하셨고,

3일 전에 ‘3일 뒤에 간다’ 고 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입적하시기 3일 전까지도 화단을 정리하실만큼 건강하셨으나 일을 하시다

나무를 붙들고 갑짜기 쓰러지셨다.

 

놀란 문도들이 병원으로 모셨지만 의식을 회복하시자

"너희가 나를 시중의 웃음거리로 만들려 하는구나! 어서 절로 돌아가자!”

 라고 단호히 말씀하시고 절에 오셔서 목욕하시고 장삼을 수하고 앉아서 입적하셨으니

 좌탈입망(坐脫入亡;*↓)하신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수행력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다.             
             
좌탈입망:   서옹큰스님                          한암스님                            양익선사

 

모든 세속적 욕망을 산밖에 던져버리고 좌복에 앉아 올곧게 살아온 수행자로서는
갈 때도 곧게 앉아 가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허덕거리지는 않고 떠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래가 이 세상 떠나시는 것을 ‘선서(善逝;*↓)’라 하는가 보다.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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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산문이란?
절의 누문(樓門), 또는 삼문(三門)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본당을 열반(涅槃)으로 비유하여 건물의 문은 하나이지만

산문은 열반에 이르는 3가지 해탈문(解脫門)을 말한다.

 

즉,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이다.

한편,

산문은 절의 상징으로 쓰여 절을 뜻하기도 하며,

종단의 한 문중(門中)을 뜻하기도 한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로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법력의 경지에서나 가능하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제3조 승찬(僧璨)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당(唐)의 등은봉(鄧隱峰)스님은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曉峰)스님 외에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스님,

백양사의 만암(曼庵)스님,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九山)스님,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스님 등이 모두 좌탈입망하셨다.

 

*.선서(善逝)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가운데 하나인 '선서'는

'올바른 길을 가신 님'이라는 뜻으로,
빠알리어 '쑤가따'를 번역한 말입니다.
니르바나(열반)에 이르신 분이라는 뜻도 된다.

 

 

서울의 축제/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  

 

 

 

 

 

 

 

 

 

 

 

 

 

 

 

 

*축제의 서울*/김영래

 

서울에 밤은 찬란하다

날씨는 쌀 쌀 하고

주머니는 날씬한

 

눈이 부시게 빤 짝 이며

네온 불빛이 사람들 을

불나방 처럼 끓어 모은다

 

이미 선물을 잔뜩 실은

교통은 꾸물거리 며 

거북이처 럼 기어가는데  

 

도무지 축제의 기쁨을

감지하지 못하는 나의 가슴은

혼돈 속 의 불확실 때문이리라

 

증산층 도 빈곤층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 함으로  나는무엇인가 ?

 

아마 낭만 결 필증 인가

갸우뚱 거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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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길
어리석은 사람만이 성급하다 하지요
하지만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어요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내가 머물러야 할까요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면
그건 죄가 될까요?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 things aren't meant to be
강물이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그대여, 사랑도 그래야 하건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답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내 손을 잡으세요
내 모든 인생도 가져 가세요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는 없으니깐요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 things aren't meant to be
강물이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그대여, 사랑도 그래야 하건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답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내 손을 잡으세요.
내 모든 인생도 가져 가세요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는 없으니깐요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난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는 없으니깐 말이에요
 
지나간 첫 사랑의 추억처럼 달콤하고 그리운 곡 ..
잔잔하고 로멘틱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보이스 칼라 '안드레아 보첼리' ..
마치 머라이 케리를  연상케하는 매력 넘치는 '캐서린 맥피' ..
이 곡은 ..
팝과 클래식의 멋진 하모니가 또 다른 느낌을 받게 하고 ..
무슨 뜻인가 몰라 간혹 번역된 가사를 쳐다보기도 ..  
볼륨은 좀더 높이니까 
음악이 더욱더 내 가슴속으로 다가옴을 느끼는 이 순간입니다.^^
 
 
 Edited by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