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罪) 종(侍從), 선(善), 벗(友)-죽산 성지 신부님의 강론

2009. 12. 22. 20:2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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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 종(侍從), 선(善), 벗(友)-카톨릭 죽산 성지 신부님의 강론)]

 

 

카톨릭 죽산 성지에 다녀 왔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고 싶었는데 19 년 동안이나 이곳에 있어 속상해(?) 죽겠다’는 농담 속에 주임 신부님은 ‘오늘 오신 분들 모두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쥐어 드리고 싶다’시며  강론을 하셨는데, 제가 듣기에 그 내용이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숨기고 가리게 되었다.
숨기고 가린 커텐을 치워야.
그 방법이 죄종 선벗.


마리아는 믿음이 굳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려 할 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처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뜻을 알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대답을 바꾸게 된다.

 

구약에서는 하늘을 보고, 신약에서는 세상을 보라.
성당에 올 땐 죄를 봉헌하라.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하느님을 떠난 죄인이다. 커텐으로 가리고 숨으려 한다. 그 죄를 하느님께 봉헌하라. 그리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라.


그렇게 죄를 봉헌하고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을 다짐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의 벗이 되어라. 이것이 천국에 가는 열쇠다."

 

 

신부님은 말미에, 이렇게 천국 열쇠를 쥐어 드리고 싶어도 제 말투가 꼭 약장수 같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어 속상해 죽겠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한번 더 폭소에 빠뜨리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부님의 말씀 하시는 투는 일반 신부님들과는 조금은 달랐는데, 소리의 높고 낮음이 없이 속사포처럼 쉴새없이 뱉으시는(?) 신부님의 말씀은, 비유하신 대로 영낙없는 시골 장터 약장수였습니다.

 


신부님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는데, 그것은 내용도 훌륭할 뿐 아니라 ‘체험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책만 보고 머리로 헤아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강론을 하시고 때로는 TV에서도 유명하신 신부님을 보지만, 오늘 이 신부님만큼 체험의 말씀을 하는 분은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지에 머무르는 동안 잠시 사제관을 가 보았는데, 터가 ‘몹시 외로운 터’였습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에는 매우 좋은 자리로 다가왔는데, 역시 이런 곳에서 19년 동안이나 계신 분이니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요약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것은 ‘마음은 부처님을 향하고 몸은 중생을 향하는' 보현행원, 또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원효의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과도 뜻을 함께 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늘을 보는 것’은 진리의 본체(眞)를 보는 것이고, ‘신약에서 세상을 보는 것(俗)’은 세간의 삶에서 진리를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몇 가지 면에서 보현행원이나 원효의 말씀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출발이 ‘죄인’입니다. 즉 ‘하느님 앞의 죄인’이며 여기서 종과 세상의 선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가르침으로 볼 때 틀린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부합되는 당연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운 말씀’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목적이 좋고 또 비록 카톨릭의 교리에 충실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는 밝은 가르침이 될 수 없으니 ‘생명의 절대성, 생명의 대긍정’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은 어둡게 되기 때문입니다.

 


종도 마찬가지. 좋은 뜻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의미로 종이란 단어를 쓰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종이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를 가리키므로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 생명이 진리 생명’이니 ‘진리 아닌 일’을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진리가 진리와 공명하게 하고, 우리 안에 울려 퍼지는 진리의 노래가 진리 아닌 일을 선천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진리 그 자체요 진리의 나툼'이니 진리를 신봉하고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보현행원이요 원효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불교는 결코 우리의 근본 자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온 중생이 성불한다, 우리는 이미 성불해 있다’ 등등의 불교의 가르침은 이런 불교의 특성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이미 완성되고 완전한 존재로 보는 것과, 그렇지 않게 보는 것은 인생관에 있어 큰 차이를 가져오리라 봅니다.


세상에 나가 착한 일을 하고 이웃의 벗이 되어라는 말씀은 불교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만선과 함께 진리로 돌아가며(萬善同歸), 이웃이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가 이웃의 좋은 친구(不請友
)가 되는 것은 마음은 부처님을 향하고 몸은 중생을 향하는, 그리하여 요익중생의 삶을 사는 불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신부님 말씀 중에 또 하나 깊이 새길 것은 ‘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한데, 이것은 보현행원에서 ‘번뇌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 ‘하느님을 떠나는 것이 죄’라는 말씀도, 어떤 경우에도 부처님을 떠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부처님을 떠나면 번뇌가 밀려온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부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깊은 수행을 아무리 하고, 높은 경지를 아무리 이루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부처님이 아니 계시는 순간 모두가 허사가 되고 맙니다.

 

 

나의 죄를 주님께 봉헌하고 나는 빈 몸이 되듯, 우리도 부처님께 우리의 번뇌를 공양올리고 밝은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신부님은 성당에 갈 때마다 죄를 봉헌하고, 주님의 종이 될 것을 다짐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선을 행하고 이웃의 벗이 되는 것, ‘죄종선법’ 이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열쇠라고 다시한번 강조하시며 말씀을 마쳤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꼭 쥐어 드리고 싶다는 신부님. 이렇게 애타게 말씀드려도 저를 보고 꼭 약장수 같다는 비평에 속 상해(?) 하시는 신부님. 그런 신부님의 말씀으로  시월 중순 맑고 푸른  일요일을 보냈습니다.

 

 

 


普賢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