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1:46ㆍ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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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명가문의 조건4 - 경주 최부잣집]
‘부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300년의 비밀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경주 최부잣집을 생각하면 두 가지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 더구나 전란과 민란, 외침, 식민통치, 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 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전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 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 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 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 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 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 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 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1)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1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2) 그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5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로스차일드? 엘리자베스? 록펠러? 빌 게이츠? 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선 당연히 경주 최부잣집이 메달 후보에 들어가지 않을까?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경주 최부잣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경주 최 부자 집 이야기
1. 경주 최부잣집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
‘부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300년의 비밀
경주 최부잣집을 생각하면 두 가지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 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 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 :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 :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 더구나 전란과 민란, 외침, 식민통치, 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 :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 : 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전(全) 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둑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 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 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 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 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 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 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 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2.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12대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는데,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 가문은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더 유명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진사는 일명 생진(生進)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소과(小科)의 종장(終場)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생원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일테면 생진과보다 더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두 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으므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자집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윈-윈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이 남았다.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는데, ‘적선지가(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해서,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면 수천명씩 굶어 죽던 시대에, 흉년은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니까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 된 논을 말하는 '' 흰죽 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인내하면서 ‘떨이’ 물건을 기다렸으나,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최부자 집의 창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처럼,이곳에 쌓인 곡식들은 최씨 일가만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0석은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 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또한,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준과 그의 둘째 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3. 경주 최부자 400년 富의 비밀은? -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독특한 철학이 전해 내려왔다. 흉년이 들면 자신들의 곳간을 헐어 이웃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 다른 부자들은 흉년을 헐값에 농토를 사들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지만, 그 집은 결코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았다. 또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노잣돈에다 양식거리까지 챙겨 보내는 인심을 썼다. 이들의 파시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이다. 병자호란 때 순국한 그는 정무공의 시호를 받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전란 이후 땅이 피폐해지자, 최부잣집은 관개시설을 확보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을 도입하고 노동력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소작농 관리법은 특별했다. 다른 지주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소작료를 받고 중간마진을 없애는 등 지주와 소작인이 상생하는 길을 모색했다.
일제 치하, 최씨 문중의 장손인 최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여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또 일제의 치열한 감시 아래에 자신은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하는 한편, 동생 최완은 대동청년단의 비밀요원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인재양성에 뜻을 품어 400여년 동안 모아온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계림대와 대구대에 기부했다. 최부잣집은 그로써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한 셈이었다.‘조선 최고 부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히 따라다니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4. '경주 최부자 300년 부의 비밀' 저자 전진문 씨.
3대를 못 넘기는 부자들아, 들어라!
최부자가 300년 부를 이어온 비결을 '경주 최부자 300년 부의 비밀' 저자 전진문 씨. "부자 3대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한국만 해도 가까이는 1997년 IMF 사태를 겪은 뒤 대우·쌍용·동아 그룹 등 내노라 하던 재벌들이 3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속설을 깨뜨린 집안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부잣집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부터 시작해 마지막 '최준'까지 12대에 걸쳐 부를 이었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9대조인 '최국선' 때 부가 정착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계산하면 10대를 이어왔다. 그렇다면 최부잣집이 이렇게 300년간 부를 이어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바로 이 집안 가훈에 들어 있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흉년기에 땅을 사지 마라 ▲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악착같은 '재산늘리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눔의 정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요즘말로 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철저했던 것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는 것은 양반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되 벼슬길에 나아가 당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뜻이다. 현대적으로는 철저한 '정경분리'로도 해석된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불법대선자금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고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정경유착'이었다는 점에서 최부잣집의 가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영학박사로 대구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를 지낸 전진문씨는 최근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황금가지)이라는 책을 펴냈다. 단지 최부잣집이라는 과거의 한 집안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현대 경영학적 관점에서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결을 풀어 해석했다. 전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9일 출판 된 이 책의 반응이 상당히 좋다"며 "아마도 최 부자의 후덕 때문인 것 같다"고 겸손해 했다. 저자 전씨는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제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9년부터 2003년 8월까지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의 교수로 재직했다. <회계이론>을 공저로 발간했던 전 씨는 지난해에 대구에 있는 경일약품(주)의 이사로 자리를 옮겼고 아직도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저자 전씨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최부잣집이 현대 한국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메시지를 받아봤다. 전씨는 "글로 얘기하면 되지 굳이 기사에 얼굴이 나올 필요는 없다"며 한사코 자신의 얼굴이 게재되는 것을 거부했다. 다음은 전씨와의 인터뷰 전문. - 지난 3월9일 처음 책이 출판되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책이 나오자 언론에서 관심을 많이 가져줘 나도 놀랐다. 전국의 각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책 소개를 해주고 관심을 기울였다. 최 부자의 후덕 때문에 독자들의 반응이 제법 좋은 것 같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 '황금가지' 관계자는 "출판된 지 20일 정도 지났는데 벌써 3쇄 1만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 경주 최 부자에 관한 글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경북 교육위원회가 펴낸 '내 고장 경상북도(역사편),1981'라는 책, 최해진(1997,1998) 교수의 논문 3편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고문서집성', 조용헌 교수의 '명문가 이야기(2002)' 등에서 최부잣집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경주 최 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0년 전쯤 대구에서 발간되던 계간 교양지 <나눔터>의 주간을 맡고 있을 때 한학자인 고 이수락 선생이 경주 최 부자의 가훈에 대해 기고한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 경주 최부잣집이 10대에 걸쳐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 가문에서 내려오는 독특한 철학의 표현인 가훈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청백리의 후예로서 '청렴성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의 '도덕적 정당성'이 있었고, 이웃을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사랑 정신 또는 공동체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최부잣집 가훈에 대해 현대적으로 보면 '정경분리 정신'이라고 높게 평가했는데…
"조선시대 진사는 벼슬이 아니고 일종의 양반 입문 자격시험이다. 즉, 학문을 하되 벼슬을 목표로 하지 말고 양반으로서의 기본 자격만 갖추라는 것이다. 벼슬을 하게 되면 당쟁에 휘말리게 되어 그 부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사를 가업으로 하는 사람이면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사업만 열심히 하면 될 일이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오늘날의 정경분리와 일맥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 현재 경주 교리에 남아있는 최 부잣집의 800석이 들어간다는 큰 창고. 최 부자는 흉년이 들면 이 창고의 쌀을 꺼내 굶주린 이웃들을 구휼했다.
- 최 부자 가훈 가운데는 '만석 이상을 하지 말라'는 말도 있던데…현대적으로 보면 최대 이윤을 확보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 아닐까?
"'만 석 이상을 하지 말라'는 가훈은 참으로 절묘한 원리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생산을 만 석 이상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1년의 소작료를 만 석 이상 받지 말라는 뜻이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한정지으면)최 부자의 땅이 자꾸 넓어질수록 개별 소작인들의 부담은 줄어들기 때문에 그들의 형편이 좋아진다. 이렇게 '적정한 수준'에서 만족함으로써 소작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에 최부잣집이 오래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한마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는 말씀이군요.
"오늘날 거의 모든 기업이 '극대 이윤'을 추구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구성원들의 만족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 보다 긴 시간으로 보면 어느 것이 더 많은 이윤이 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즉, 해마다 1만석씩 거둬 300년을 버티면 총 수입이 300만석이다. 만약 욕심을 부려 한 해 2만석씩 거둬들여 100년을 갔다 해도 결국 총 수입은 200만석에 불과해 '소탐대실'이 되고 만다."
-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도 있던데… 요즘처럼 인수·합병이 활발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싸게 나올 때 사는 것을 합리적인 경영활동으로 본다.
"물론 오늘날의 기업은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인수·합병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인수·합병 당하는 많은 구성원들에게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되고, 또 거꾸로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과거의 농업중심 사회에서는 '흉년에 땅을 사는 일'은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될 수 있다. 흉년이 들면 땅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이 많아 재산을 증식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최 부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지 않아 이웃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던 것이다."
-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요즘말로 하면 역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은 오늘날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어떤 사업이라도 종업원, 지역사회, 국가의 구성원의 협조 없이는 이룰 수 없기에 지역주민을 위해 베푼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백 리'라고 한 것은 당시 도보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가 그쯤 되었고, 또 최 부자의 땅이 그 정도까지 군데 군데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최 부자는 이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 최부잣집은 일체 마름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토지를 관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의미를 현대 기업의 조직관리와 관련해 설명한다면?
"조선시대 마름은 부재지주들이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둔 중간 관리자다. 그런데 이 마름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해줬기 때문에 마름의 횡포는 극심했다. 그런데 최 부자의 경우 재지(在地) 지주로서 그 지방에서 같이 살면서 직접 관리해 마름의 횡포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작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 최부잣집에서는 노비에게도 제사를 지내줬다고 하는데…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의 노복으로 '옥동'과 '기별'이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충성을 바쳤기에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제사를 지내주고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를 세워줬다.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보아 노비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일로 부하 사랑이 극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인이 노비를 인간적으로 대해줌으로써 하인은 더욱 주인을 따르고 최선을 다하여 가업이 더욱 번창했으리라고 생각된다."
- 최부잣집은 일제 시대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는데…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은 일제 시대에 부산의 지사 기업인 백산 안희제가 세운 백산상회에 출자하고 사장으로 취임해 이 회사를 근거로 상해로 독립자금을 보냈다. 이 일로 최준은 두 번에 걸쳐 일경에 잡혀가 고초를 당했다. 최준은 해방 된 뒤 남은 재산을 모두 털어 현재 영남대의 전신인 민립 대구대학을 설립했다."
- 조선말에 보면 경주 최 부자를 비롯해 각 도마다 1만석 이상의 유명한 부자들은?
"조선시대에 1만석 이상의 부자들은 여럿이 있었지만 오래 지킨 사람은 드물다. 조선 말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새로운 산업이 몰려오면서 갑작스럽게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몇 대 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걸로 알고 있다."
- 최부잣집 후손 가운데 현재 살아 있는 마지막 인물은 누구인가?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의 손자이자 주손인 최염 선생(72)이 현재 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으며, 아들인 최성길씨는 지금 판사로 재직 중이다."
- 경주 최 부자 말고 혹시 한국 역사상 기록할 만한 또는 존경할 만한 부자가 있나?
"남강 이승훈 선생, 백산 안희제선생과 유한양행의 유일한 선생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자다."
- 최 부자의 300년 부의 비밀을 요즘 현대적으로 설명하면 '윤리경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 "그렇다. '윤리경영'이야말로 기업을 오래 지키는 비결이라 말할 수 있다. 최 부잣집은 조상의 훌륭한 훈을 받들며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마지막에는 참으로 가치 있는 일(대학교 설립)에 전 재산을 기쁘게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된 것은 아주 훌륭하다." ====================================================================== [육연(六然) = 修身의 가훈]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자처초연 自處超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대인애연 對人靄然), - 평온할 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무사징연 無事澄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유사감연 有事敢然), - 성공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고(득의담연 得意淡然), - 실패했을 때에는 태연히 행동하라(실의태연 失意泰然). | ||||||||||||||||||||||
경주 최부자 집안 -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
강원행작 - 돌탑
♣ 너를 묻고도 -미나무 한 술 꾸역꾸역 밥을 떠 넣고 한 모금 억지 꿀꺽 물을 부어 넣는다. 너를 잃어도 산 짐승이라 배는 고파지는구나. 목에 붙은 목숨이라 목도 메는구나. 꺼억 꺼억 울먹이며 밀어 넣는 섬돌 같은 밥알이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속울음마저 꾹꾹 눌러 삭히기를. 울다 울다 온몸에 삼투압 일어 모든 물기 담배 연기처럼 다 날리고 하얗게 바랜 소금 기둥으로만 남기를. 살기야 살겠지 차츰 무디어지겠지 살기 바빠 가끔 잊을 때도 있을까. 꽁꽁 언 겨울 하늘에다 너와 나를 묻고 돌아서는 앙가슴에 눈바람 차던 수도암 돌탑이 영상 되어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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