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불상,불화를 모시면...

2010. 1. 5. 19: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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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부터 두 부부가 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절을 하고

온갖 기도문을 지극하게 하시던 분들인지라 내심 장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데,

차 한 잔 대접하면서 듣게 된 질문에 이거 큰일이다! 싶어 질문을 주제로 이런 말씀을

법문에 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처사님의 질문인 즉, 집안에 불상이나 불화(탱화)를 모시고 기도를 하고 싶은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리되면 집에 모셔둔 불상들 잡귀가 들러붙어 도리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이냐? 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들도 그러한 말들은 어디선가 들으셨던

기억들이 날 것입니다.

이름난 기도처나 큰절에 가거나, 절에 좀 다녔고 아는 소리께나 하시는 보살님들이

집에서는 지장기도는 하면 안된다는 둥, 신중기도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둥,

이런 말들을 자랑스럽게 내뱉는 경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주었다는 구원의 은총과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물이듯,

서양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대문 앞에 붙여두고 심지어

안방에도 걸어둡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도 잡귀가 들러붙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태어나서 자란 집안도 4대가 천주교 집안인지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신다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채, 매달린 형상을 방안에서

쉽게 보고 자랐습니다만, 서양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그런 형상들을

걸어두면서도 피한방울 안 흘리시고 여법하게 계시는 남의 종교의 불상은

우상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웃기는 중생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 법문으로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바라보게 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일체를 만들어내는 요술단지이듯,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명의

이기들도 다 이 한마음이 동해서 생각으로 나타나 지금의 문화와 문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생은 마음 안에 팔만사천 가지의 고를 가지고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가지의

고와 번뇌에 답을 해주다보니 팔만장경이 존재하게 됐듯, 팔만사천가지의 고와

뇌도 다 이 마음이 삐딱하게 동해서 만든 원인이요 결과인 것이며, 여기에 해결책을

제시하신 부처님의 팔만사천“지혜답”도 다 불심에서 나왔듯, 결국 이 한마음

안에 문제와 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어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카필라성의 모든 왕족과 백성들을

불교에 귀의시켰으나 당신을 출산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붓다를

기 전에 돌아가셨는지라 제도할 길이 없어 천안으로 마야부인영혼이 가신 곳을

살피다 보니 도리천에 계신지라 어머니를 제도시켜드리고자 보신으로 화현하시어

욕계 6천의 두 번째인 도리천에 올라가 계시는 동안 매일 아침 부처님을 뵙고 담소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던 우전국왕이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 아쉬움이 지나쳐 병으로

몸져눕게 되자, 그 나라의 가장 유능한 조각가를 불러 부처님과 똑같은 형상을 만들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왕의 병은 더욱 깊어져 갔고 이때, 도리천에서 욕계를

살피시던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제석천을 시켜 조각가로 내려가 전단향 나무로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해주자 왕은 그리움이 사무친 상사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석 달 동안 마야부인에게 천상의 경이자 윤회를

벗어나는 효도의 경인 지장보살 본원경을 설해드리고 보계를 타고 욕계에

내려오시는데 이때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했던 불상이 하늘로 치솟아 욕계로 내려오는

부처님께로 다가가 합쳐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부러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중생인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자 마야부인의 태중을

빌어 오셨던 것이고, 생사육신의 유한함을 그대로 나타내셔야 함에 따라

도리천의 3천년, 인간세계의 56억 7천만년이 지나 미륵불이 출현하실 때까지의

“무불시대”를 걱정하시고 불멸 후, 무불시대엔 이와 같이 나의 형상을 조성하여

의지하라는 유훈에 따라 부처님상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 상을 집에 모셔두면 귀신이 붙는다는 둥, 한다면 이것은 입으로

짓는 악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는 조각가를 불교에서는 불모(佛母)라 부릅니다만, 이런

불모가 부처님의 상을 조성해두기만 했다면 이것은 종교적인 성물이나 조각품,

예술품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그 불상의 내부에 사람의 오장육부와 같은 복장물이

모셔지고, 점안의식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훈에 따라

무불시대를 지켜주는 부처님을 대신하는 부처님의 성상인 것입니다.


이런 성상에 어찌 삿된 기운이 침범한다는 삿된 악구에 놀아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불자들이 이젠 좀 깨어야 합니다. 제대로 알고 알려고 들어야 하고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와 우리 의 갈림길 서로의 우정이 무척이나 깊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세상을 알기 위해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친구가 땅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야, 오늘은 나의 운수가 트인 날이구나!"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몹시 섭섭한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나' 라는 말을 쓰나? 이럴 때는 '우리' 하는 말을 쓰면 좋지 않은가?" 두 사람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나려 할 때 지갑을 잃어버린 주인이라며 한 남자가 뛰어왔습니다. 그는 두 친구를 보고 다짜고짜 "도둑놈 들!" 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자 지갑을 주는 친구가 옆의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다니... 우리는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을 뿐이오."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힌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나? 조금 전 운수가 좋을 때는 '나' 라 하고, 궁지에 몰리자 '우리' 를 찾으니 무엇이 진짜 우리 사이인가?"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 해도,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고단한 인생길에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나' 보다는 '우리' 를 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