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 먹는 데도 여러 뜻이 있나니

2010. 1. 8. 22: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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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 먹는 데도 여러 뜻이 있나니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씨구 돌아간다아~ 저~ㄹ 씨구씨구 돌아간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각설이가 불렀다는 품바타령의 첫머리다.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거지 옷 입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그런데 얻어먹는 거지를 달리 부르는 말이 ‘동냥치’이고,

‘빈다’는 말을 ‘동냥한다’고도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냥치’는 동령動鈴을 하는 이, 즉 요령을 흔드는 이를 낮춰서 잘못 부르는 말이다.

‘동냥’은 경문을 외거나 불공을 드릴 때 요령을 흔드는 것을 한자로 표현하다 보니

한자를 모르는 이들이 그저 비슷하게 들리는 ‘동냥’으로 쓰면서 시작된 것이다.

탁발하는 스님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보시를 권유할 때

목탁이나 요령을 들고 다니며 경문을 외우는데,

목탁보다는 요령이 크기가 작고 가벼운 데다

소리는 크고 멀리 들려 요령을 들고 다니면서 흔들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스님에게 얻어먹는다, 빌어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구걸한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디 개인 소유를 엄격히 제한했던 부처님께서

음식물마저도 스스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얻어먹도록 함으로써

불교의 제도가 된 탁발은 아주 큰 뜻이 담긴

불교 수행의 중요한 한 방법이자 중생 교화의 방편이다.

그것을 『출법집경』에서는 ‘여래걸식삼의如來乞食三意’라 해서

빌어먹는 데에도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맛을 가리지 않고 멋도 가리지 않는다不貪珍味美惡均等’는 원칙이다.

탁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 바로 ‘일곱 집을 거쳐 한 그릇의 밥을 빈다七家食’는 것이다.

스님이 잘 사는 집과 못 사는 집을 가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신도들도 훌륭한 스님과 그렇지 못하게 보이는 스님을 구분하게 되는데,

이는 수행과 교화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집을 가리거나 거르지 말고 일곱 집을 차례로 들러 한 그릇을 채우라고 한 것이다.

만일 일곱 집을 들렀는데도 한 그릇이 못 되거나, 심지어 하나도 못 얻었다면 굶어야 한다.

그것은 탁발이 수행자는 양식을 얻고, 보시하는 재가자는 공덕을 얻어서

진리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높거나 낮거나 더불어 산다破我慢貴賤同遊’는 원칙이다.

내가 높다는 생각을 하면 빌어먹으러 나가지 않고 앉아서 가져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설사 뜻 있는 이들이 공양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복 지을 기회,

즉 공덕을 얻을 기회가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탁발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습,

어려운 형편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부수 효과이다.

이 문제로 사리불과 부루나가 논쟁을 하자,

부처님께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의 탁발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셋째는 ‘사랑은 고루고루, 이익은 크게 한다慈悲平等 大作利益’는 원칙이다.

본디 부처님은 배가 고프거나 아프지 않아도

중생들에게 공덕을 지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탁발을 거르지 않았다.

하늘의 비와 해의 볕이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내리듯이

그렇게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를 하는 이들의 삶이 한 단계 더 나아지기를 기원하는 자비를 늘 실천하셨다.

그것이 『자비경』의 정신이다.

 

미얀마 등 남방 불교권에서는 현재도 탁발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권력의 불교 탄압과 종권 분쟁 탓에 탁발을 금하고 있지만,

그 정신만은 기려 되살려야 한다.

길거리에서 불전함을 놓고 탁발을 하는 이들을 보고

가짜라느니 옳지 못한 일을 한다느니 하면서,

이를 바로잡는다며 이벤트성 행사로 탁발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빌어먹는 데에도 여러 뜻이 있으니,

수행자의 길은 참으로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의 길이다.

 

      별도 울 때가 / 조병화 한참, 별들을 멀리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별이 있었습니다. 별도 우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 멀리 오래 홀로 떨어져 있어서, 서로 만날 가망 없는 먼 하늘에 있어서, 아니면, 별의 눈물을 보는 것은 스스로의 눈물을 보는 것이려니 밤이 깊을수록, 적막이 깊을수록, 눈물을 보이는 별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