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스님 일대기

2010. 1. 20. 18: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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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삼보 하옵고.

천년고찰 국사암에서 쌍계사 대중 스님을(선원, 강원,) 모시고 1월 30일

대중공양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섭대승교왕경(攝大乘敎王經)>에서 “선남자 선여인들이여,

만일 마음을 돌려 신앙하고 복을 닦고자 하면 세 가지 복밭(福田)이 있다.

첫째는 불보(佛寶)요, 둘째는 법보(法寶)요, 셋째는 승보(僧寶)이다.

 

승보를 공양하면 그 복이 백배로 늘어날 것이요, 법보를 공양하면 그 복이 천배,

불보를 공양하면 그 복이 만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삼보를 공양하면

무한한 복이 되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복전(福田)이라 불리는 수행자들을 공양하는 대중공양에

많이 동참하시어 수승한 공덕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문의전화 : 국사암(055-)883-8802

 

 

천년고찰 국사암

숭산스님 일대기

숭산스님 일대기    www.hwagyesa.org


 

 

 

생전에 티벳의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추앙받기도 했던 숭산 스님.

 

'오직 모를 뿐'이라는 지침을 바탕으로 생각의 전복과 마음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서양과 동양, 불교와 기독교를 넘어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었다.

 

숭산 스님은 40여 년 1972년 46세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가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 각지에

포교한 이래 현재 세계 32개 국 120여 개 홍법원을 개설하였다.

현각스님, 무량스님, 청안스님을 비롯한 전세계 5만 6천여 명의 외국인 불제자들의 스승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전통적인 한국 사찰 ‘태고사’를 건립하여 화제를 모았던 무량 스님,

전 화계사 국제선원장 무심 스님, 베트남 전쟁 세대로 반전운동을 하다 숭산 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한 대봉 스님,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 숭산 선사의 법문을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고 

출가한 무상 스님 등 제자들의 약력은 매우 다양하다.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몸에 의지하지 말라.
우리 모두 모르는 곳에서 왔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오직 모를 뿐이다”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2004년 11월 화계사에서 입적하셨다.


 

출가 - 수행 - 인가과정

 

1. 출가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2.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

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

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

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

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

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3. 득도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

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 / 오광수

 

 

맑은 이슬을 잔뜩 머금고

싱그러움으로 다가온

이름 모를 들꽃같이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다

 

어색한 속내 드러내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치장 하지 않고

있어야 할 자리 지키면서

해야할 일 하면서

분수를 아는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

 

산골 소식을 전해 주면서

낮은 곳으로만 찾아온

순리 아는 물과 같이

흐르는 길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모습이고 싶다

 

오만한 자리 앉지 아니하고

악한 자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가야할 길 마다 하지않고

섬기는 일 하면서

행복을 찾는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