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1. 20:3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다면, 지나간 작년도 있었고 다가올 내년도 있습니다.
어릴 적이 있었고 현재가 있다면 늙어 노후가 있을 것이니, 이를 과거, 현재, 미래라 한다면 지금 살아가는 금생이 있다면 과거 생이 어찌 없을 것이며, 이생을 마치면 내생이라는 다음 생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주인공은 끝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그래도 전생에 지은 바 선업이 있어 욕계라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으나,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세 가지 업으로 지은바 복들은 고만고만해서 중생 중생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은 좋은 일 한번 있으면 뒤따라서 궂은 일 한번 따라오고, 즐거운 일 한번 생기면 괴로운 일이 바로 찾아오니 이 모든 것이 다 과거 전생에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오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씨 뿌려왔던 과거 전생의 업으로 인함이라,
잘되면 자기 잘난 줄로만 알고, 주변사가 안 풀리고 꼬이면 다 조상 탓으로 돌리는 사람 사람들의 이기심이 스스로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번 8월 27일에 제 3차 천삼십일 기도를 회향했고, 이제 윤 7월 기도가 10월 8일에 회향을 하게 되면 잠시 쉬었다가 “생자와 망자를 위한 일체 업장소멸 십악참회를 위한 제 4차 천삼십일 기도”를 봉행하고자 합니다.
대저, 인간들 삶의 역사는 모두가 身口意 三業이라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윤회의 밭에 업의 씨를 뿌려 지금 이 순간까지의 자신의 삶을 꾸려왔고, 그 살아가는 모습은 생노병사와 희노애락 우비고뇌의 뒤범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욕지 전생사이면 금생수자시요, 욕지 내생사이면 금생작자시며 욕지 노년사이면 초년작자시라,”
지금 살아가는 현실의 내 모습을 보면 과거 전생에 운명의 밭에 내가 어떤 씨를 뿌렸었고, 어떻게 농사를 지었던 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죽어 다음 생이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에 어떻게 태어날 지는 지금 내가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내 인생의 밭에 업의 씨를 뿌리고 지혜로운 농사를 짓고 있는가를 스스로 느낄 줄 안다면, 다음 생에는 지금처럼 조상 탓을 한다거나 부모를 원망하는 박복한 인연은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부처님 회상에 출가하여 위로는 불전의 은혜와 아래로는 시주은혜를 갚고 요익중생을 하기위해 이번 기도는 인연되신 분들 모두가 신구의 삼업으로 지어온 열 가지의 십악을 참회하고 소멸시켜주는 일체업장 십악참회 기도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악 중에 신업이라, 몸으로 짓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살생을 한 악업과 도적질한 악업, 삿된 음행을 한 악업을 소멸시키고자 백일씩 나누어 삼백일 동안 세 가지 악업소멸을 위한 업장소멸 참회기도를 한 후, 다음 사백일 기도 또한, 구업이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침없이 해왔던 거짓말과 교묘하게 사기치고 이간질하고, 험한 말을 했던 입으로 지은바, 네 가지의 악업을 소멸시키고자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삼백삼십일은 모든 말과 행동은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행해지는 의업의 종인지라 일곱가지의 악업을 만들어내는 의업으로 인한 탐심과 화를 내는 진심과 자기가 주인이라면서도 유혹을 어쩌지 못하고 악업을 저지르고 마는 치심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질러온 악업을 소멸하는 백삼십일 업장소멸 참회기도를 봉행하고자 합니다.
“자비도량 참법”이라 하여 살아 있는 자신 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선망부모조상을 위해 업장을 소멸하고 죄업을 소멸하는 참회기도를 할 때는 이 참법을 위주로 참회기도 들을 합니다.
여러분들 눈으로 지금 앉아계시는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옆에 앉아계시는 낯익은 분들이 바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옆에 분들의 마음도 보이시나요?
아마 안보이실 겁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경계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으니 마음이고 생각이라 부르는 거지, 죽으면 그게 바로 귀신이고 영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자기 안에 귀신과 함께 있고 이 육신 안에 자기의 영혼을 담고 있으면서 귀신 따로, 영혼 따로 생사를 분별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제가 혼자 기도하면서 가만히 관을 하면 기도하는 제 뒤에서 무수한 영가 분들이 기도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육신이 없다 해서 다르게 보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 이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의 몸 안에 함께 있는 것이 바로 그 주인공들일 뿐인 것입니다.
당부드리건데 생사를 따로 구별 짓지 마시고 다만 육신이 없어 보고 듣고 말하고 접촉하고를 못할 뿐이지, 주인공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건만, 다만 입이 없어 말을 못하는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섯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분별작용으로 의업을 일으켜 신업과 구업으로 일상을 살아갈 뿐이란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리면서도 한 티끌도 머무름 없는 지극함이 우선되어야하고 영단에 잔을 한 잔 올리면서도 지극하고 간절함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일상은 밝아지고 인연된 영가들은 이생에 대한 애착과 집착과 원결들을 풀어버리고 가벼운 혼이 되어 제 갈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함께하고자 기도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도량참법은 10권으로 되어있으며 6세기에 양나라 무제에 의해 여러 학승들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의 이름은 자비로운 도량에서의 참회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전>에서는 무제가 황후 치씨의 죽음으로 하여 슬픔에 잠겨있던 어느 날, 큰 뱀이 나타나서 자기는 치씨의 후신이며 생전에 시샘이 많아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었기 때문에 뱀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지난 날의 온정을 생각하여 자기를 위한 공덕을 이루어달라고 하자, 무제가 스님들을 청하여 의논한 후, 스님들의 의견에 따라 여러 불경들에 실린 참회문들을 추려서 10권의 책을 편찬하여 기도를 해주자, 이로 하여 치씨는 도리천이라는 하늘 세상에 태어나면서 무제에게 다시 나타나 감사 함을 보였다는 내용으로, 양 무제와 황후 치씨의 인연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자비도량참법”으로 살아생전에 죄업소멸을 위한 기도를 한 사람은 그 죄가 없어지고 복을 얻으며, 돌아가신 선망부모 조상을 위해 그 영혼을 제도해주는 기도로 예로부터 행해왔던 기도법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만 하면 이미 저질러진 인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의문은 바로 여러분들이 기도 때 마다 줄줄이 외우시는 천수경에 답이 있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 죄의 자성 본디 없고 망령된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망령된 마음만약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도업도 없어지고 마음 또한 공하여야 바로 이를 이름하여 진참회라 하는 도다.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이처럼 입으로만 하는 건성참회가 아니라 일념즉시 돈탕제가 될 정도로 공의 세계에 들어갈 만큼의 일념참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비참법의 내용을 보게 되면 이 참법을 대하게 됨으로 스스로 기쁨이 넘치게 되니 자경(自慶)이라 하여,
오늘, 이 도량의 동업대중이여, 삼보에 귀의한 이후부터 지극한 도덕을 믿을 줄을 알고 의심을 끊어 참회하였으니, 죄업과 번뇌가 모두 없어졌을 것이요, 계속하여 발심하고 실행할 것을 권장하였으니, 원결이 이미 풀리어 소요자재하여 장애될 것이 없으리라.
어찌 사람마다 환희 용약하여 스스로 기뻐하지 아니 하리요.
이제 그 뜻을 말하리라.
경에 팔난(八難)을 말하였으니, 一은 지옥이요,二는 아귀요, 三은 축생이요, 四는 변지(邊地)요 五는 장수천(長壽天)이요, 六은 사람이 되었으나 난치의 병으로 불구가 됨이요, 七은 사견가 (邪見家)에 태어남이요 八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나는 것이니라.
이러한 팔난이 있으므로, 중생들이 생사에 윤회하면서 벗어 나지 못하느니라.
우리들은 여래의 말법 중에서 나서 부처님을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경사가 오히려 많으니라.
“난(難)”이란 말은 마음에 죄가 있음이니, 마음으로 의심하면 난이 아닌 것도 난이 되고, 마음에 의심이 없으면 난이 되지 않느니라.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여덟째의 난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나는 것을 난이라 하였거니와, 성동노모(城東老母)는 부처님과 한 세상에 나서 부처님과 한 처소에 있었으나 부처님을 뵈옵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마음으로 의심하면 난이 되고 다른 세상에 난다고 해서 난은 아니니라.
또 파순은 나쁜 생각을 가졌다가 살아서 지옥에 빠졌고, 용왕은 법문을 듣고 문득 도를 깨쳤으니, 반드시 천상이나 인간에 났다고 해서 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느니라.
마음이 진실로 선하지 못하면 태어남도 다를 것 없나니,
천상의 귀한 몸으로도 지옥에 떨어지고, 축생의 천한 몸으로도 도량에 오르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마음이 삿되면 가벼운 난도 무겁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무거운 난도 장애가 되지 않느니라.
오늘, 이 도량의 동업대중이여, 마음이 장애되는 탓으로 간 곳 마다 난難이 되거니와, 마음이 바르기만 하면 난도 난이 되지 않나니, 이 한 가지에 따라야 할 바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 앞과 부처님 뒤도 정법 아닌 것이 없고, 변지와 축생도 모두 도를 얻는 곳이니라.
이제 만일 마음이 바르면 八난이 다시없을 것이요,
만일 의혹하면 한량없는 난이 될 것인즉, 이렇게 기쁘고 다행한 일이 적지 않건마는 대중이 날마다 만나면서도 알지 못할세,
이제 대강 소견을 말하여 스스로 기쁘고 다행한 일을 보이리니, 만일 기쁘고 다행한 줄을 알면 모름지기 출가할 마음을 닦을지니라.
( 네 가지의 출가 )
어떤 것을 스스로 경행(慶幸)한 일이라 하는가.
부처님 말씀에, 지옥을 면하기 어렵다 하였으나 우리는 이미 이 고통을 면했으니, 첫째 경행한 일이요, 아귀를 벗어나기 어렵다 했으나 우리는 이미 그 괴로움을 여의었으니 둘째 경행한 일이요, 축생을 버리기 어렵다 하였으나 우리가 그런 과보를 받지 아니 하였으니 셋째 경행한 일이요,
변지에 태어나면 인의(仁義)를 모를 것인데 이미 근역(槿域)에 함께 있으면서 도법이 유행하며 친히 미묘한 이치를 들으니 넷째 경행한 일이요,(법회에 참석한 이치, 법문을 듣는 이치) 장수천에 나면 복을 지을 줄을 모를 것이나 우리는 벌써 좋은 인을 심었으니 다섯째 경행한 일이요,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고 한번 잃으면 다시 만나지 못하는데 우리는 각각 사람이 되었으니 여섯째 경행한 일이요,
六根이 불구면 선근에 참여키 어려운데 우리는 이미 청정하여 깊은 법문을 향하였으니 일곱째 경행한 일이요, 세상에 지혜 있고 말 잘하고 총명한 이는 도리어 난이 되는데 우리는 일심으로 정법에 귀의하였으니 여덟째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앞과 부처님 뒤에 나면 난이 되고, 혹은 부처님을 뵙지 못함이 더 큰 난이라 하는데 우리는 이미 좋은 원을 발하고 미래세에 중생을 구제하게 되었으니 여래를 뵙지 못한다고 난이 될 것이 아니며, 한번 형상을 뵙고 한번 정법을 들었으니 옛날 녹야원에서 설법함과 같느니라.
죄를 멸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만이라,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 해서 난이라 할 수 없으며, 부처님 말씀에 부처님 뵙는 것이 어렵다 하였으나 우리는 이미 불상을 대하였으니 아홉째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말씀에 법문 듣기가 어렵다 하였는데 우리는 이미 감로수를 먹었으니 열째의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말씀에 출가하기가 어렵다 하였으나 우리는 이미 불법에 귀의하였으니 열한 번째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말씀에 자기를 이롭게 하기는 쉬우나 남을 이롭게 하기는 어렵다 하였는데 우리가 오늘 한번 뵙고 한번 예배한 것까지도 모두 시방의 일체 중생 에게 회향하니 열두 번째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말씀에 애써 노력하며 괴로움을 참는 일이 어렵다 하였는데 우리는 오늘 각각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하였으니 열세 번째 경행한 일이요, 부처님 말씀에 경을 독송함이 어렵다했으나 우리는 경전을 무시로 읽고 보나니 열넷째 경행한 일이요,
좌선이 어렵다 하였으나 지금 잡념을 쉬고 뜻을 정한 이가 있으니 열다섯째 경행한 일이니라.
오늘, 이 도량의 동업대중이여, 이와 같이 스스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 진실로 한량이 없나니, 변변치 못한 말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괴로움은 많고 낙은 적으니,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즐거움도 오히려 얻기 어렵거늘, 우리가 이제 여러 가지 장애가 없음을 얻었으니 이것은 모두 시방 삼보의 위신력이니라.
각각 지성으로 이 은혜를 생각하고 다 같이 간절하게 오체 투지하고 일체 중생과 시주 단월과 선지식. 악지식과 천인과 신선과 호세 사천왕과 총명하고 정직한 선한 이를 권장하고 악한 이를 벌주는 이와 주문을 수호하는 이와 오방용왕과 팔부용신과 모든 마왕과 염라왕과 태산부군과 오도대신과 十八옥주와 그 모든 권속들과 삼계 육도의 무궁무진한 불성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지성으로 시방의 다함없는 모든 삼보께 귀의 하옵나니, 바라옵건대 자비하신 마음으로 기피하여 섭수하시며, 부사의한 신통으로 보호하고 구제하사 천인과 신선들과 일체 신중과 삼계육도의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오늘부터 생사의 바다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며, 행과 원이 만족하여 십지에 오르고 금강심에 들어가 등정각을 이루게 하여지이다.
수승한 자비참법의 요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약 16년 전에 제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 경기도 일원의 소도시에서 조그만 포교원을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거주하는 신도가 전화가 왔었습니다.
한국에 왔는데, 내일 일본에 들어가기 전에 스님 뵙고 불사금을 시주하고 싶다는 전화였습니다.
지금도 어렵지만, 당시 어렵게 꾸려가는 살림에 돈 준다는데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당장 가겠다고 하고 택시를 대절해서 서울의 약속장소를 가는데, 그 때가 약간 늦은 밤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합승을 해도 되겠냐고 묻기에, 아! 기사님도 수입이 좋으셔야죠, 하고 합승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기억으로는 술이 거나하게 드신 중년의 샐러리이었는데, 택시를 타더니 뒷좌석에 제가 있는 것을 보고는 감사하다, 죄송하다
를 연발하더니, 근데, 스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 말씀하십시오. 하고 저는 속으로 불교에 대해서 뭘 물으려는 줄 알았더니 웬걸, 묻기를 스님 혼자 사냐? 그럼 혼자 살지요. 당시에 포교원에 공양주가 없어서 대중이 없이 혼자 지내고 있었고 법회 땐 신도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빨래는 어떻게 하느냐? 제가 세탁기가 다 해주죠.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 먹게 되면 먹고 주로 생식을 합니다. 했더니, 근데, 스님 딱 한 가지만 묻겠다는 거예요.
택시기사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됬다는 식으로 라듸오도 꺼버리고 취객과 저와의 대화를 듣기만 하고요.
스님, 남자지요? 예!
그럼 스님 인간적으로 묻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더니 스님도 남잔데 가끔은 생각이 나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뭐가요? 했더니 아, 스님도 남잔데 여자 생각은 않나느냐고요, 하더니 그게 발끈 서면 어떻게 해결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망설임도 없이 뱉어주기를, 설 일을 안 만들면 되지 왜 만들어 놓고 해결을 못해 괴로워하냐니깐, 그때부터 그 양반이 자기 내릴 때가 됬는데도 안 내리면서 저를 붙잡고 한 시간만 이야기 좀 하자, 안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했더니 그럼 십분만, 그도 시간이 안됩니다. 했더니 연락처를 달라고 해서 명함을 줬으나 그 뒤로 꿩 궈먹고 말았는지 소식이 없었습니다만,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저지르지 않으면 일일이 호시일이건만, 부질없는 눈앞의 탐욕이라는 욕심으로 저질러진 다음에 괴로움에 떨어지고야 맙니다.
지혜로움과 편안함은 자기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망념된 자기욕구를 이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전백장과 후백장의 불낙인과와 불매인과의 고사)
오탁악세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떠오르지도 않은 업을 소멸한다고 참회기도 날을 정하여 신행생활을 하건만, 세상은 어찌 이리 어지럽고 뒤숭숭하고 살아가기는 더욱 어려워지는지 이 시대에 부처님이 계셨더라면 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과연 어떠한 가르침을 해주셨을 지가 저의 화두입니다.
북한 핵문제로 전 세계가 시끌벅적하고 미국은 핵우산정책으로 자기네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는데 북한에서 핵을 소유하게 되면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각국이 자구책으로 핵을 보유하게 될 것은 자명한지라 이리도 뒤숭숭한 세계정세에 국내 정치는 소위 좌파 정권이라고 들어 내놓고 비판을 받고 있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고 일반 서민들이 내집 장만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혼탁한 현실에서 황혼이혼은 증가하고 있고 사회는 더욱 문란해지고 시대는 더욱 암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런지 싶습니다.
북한과 미국이 떠드는 핵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하는 동업중생이 되어 공업에 휘말리게 되고, 오직 편리함이라는 말초적 욕구들로 지구촌의 환경은 더욱 황폐해져 남극의 오존층이 최대의 크기로 구멍이 뚫렸다는 이 시대에서 지극히 초라한 자기 자신이라는 자화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모두가 살맛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속어가 있듯이 현재 우리의 현주소가 이와 하등 다를 바 없다 할 것입니다.
죽어 가보지도 못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구원사상이나 휴거나, 일념이면 극락을 갈 수 있다는 왕생정토나,즉신성불론이나 이 모든 것들이 어찌보면 종교만이 가질 수 있는 극단적인 사기극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IMF나 북한의 핵이나 이런 모든 것들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지극히 미진에 불과한 우리 자신들이건만,
그로인한 피해와 자극은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받게되는 공업의 현실 가운데 존재하고 있듯이, 자신의 운명 또한 아무리 노력하건만, 뜻대로 안되어 가는 삶이기에 우리에게는 삶에서 겪게 되는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지혜로워져야 하며 또 슬기롭게 이겨내야만 하는 별업을 닦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은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자세이며 신앙을 등불삼아 살아있는 동안 희노애락과 우비고뇌로부터 덜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관세음보살보문품 경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법화경의 제 25 품으로 되어있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보게 되면,
“무진의”라는 보살이 부처님께 이 세상 중생들이 겪게되는 모든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중생들을 구제해준다는 관세음보살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무진의 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편 어깨를 올리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말씀을 하되,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이름이 관세음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이르시되,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 천 만억의 모든 중생들이 고뇌를 받을 때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듣고 다 해탈(解脫)을 얻게 하느니라.”
오탁악세를 살아가야만 하는 지극히 나약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짓이 아니고 참된 진리라고 믿고 따르는 불제자라면 우리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극히 과학적인 부처님의 경전에서 답을 찾고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게 되면 여기서 일념이나 일심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데, 이 일념과 일심에는 티끌만한 의심과 삿된 견해나 망념이 없이 오로지 지극, 간절한 마치 참선수행의 몽중일여나 동중일여와 다를 바 없는 정신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일념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행자의 일상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관세음보살의 기도가피가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가피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에는 칠난이라 부르는 일곱 가지의 재난(災難)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그 첫째는 화난(火難)이라, 만일 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가지는 자는, 가령 큰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리니, 보살의 위신력(威神力)에 의한 까닭이니라.
둘째는 수난(水難)이니, 만일 큰물에 빠졌을지라도 그 명호(名號)를 일심으로 부르면 곧 얕은 곳을 얻으리라.
셋째는 풍난(風難)이요, 만일 백천 만억의 중생이 금과 은, 유리와 자거, 마노, 산호, 호박과 진주 등의 온갖 보배를 구하기 위하여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가령 흑풍이 불어서 그 배가 표류하여 멀리 나찰귀(羅刹鬼)의 나라에 떨어지게 되었을지라도, 만일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이 모든 사람들이 다 나찰의 환난을 벗어나게 되리라. 이 인연으로써 이름을 관세음이라 하느니라.
그 넷째는 도난(刀難)이라, 만일 사람이 해를 입게 될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해하려는 자가 가지고 있는 칼과 막대기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벗어나게 되리라.
다섯째는 악귀난(惡鬼難)이라, 혹은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 중에 가득 찬 야차와 나찰이 와서 사람을 괴롭히고자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념으로 부르는 것을 들으면, 이 모든 악한 귀신이 능히 악한 눈으로 보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더욱 해를 입히겠느냐.
여섯째는 가쇄난(枷鎖難)이니, 가령 사람이 죄가 있거나, 혹은 죄가 없거나, 고랑을 채우고 칼을 씌워서 그 몸을 결박하였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다 끊어지고 부서져서 곧 벗어나리라. 하였으며,
일곱째는 원적난(怨賊難)이라 하여, 혹은 삼천대천 국토중에 가득 찬 원적(怨賊)이 있을 때, 장사하는 주인이 모든 상인을 데리고 값진 보배를 가지고 험한 길을 지나갈 때,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불러 말하되, 모든 선남자야, 겁내고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를지니라.
이 보살은 능히 두려움 없는 것을 중생에게 보시(布施)하시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 원적(怨賊)에서 마땅히 벗어나리라.
모든 상인이 듣고 함께 소리를 내어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그의 명호를 부르면, 그 명호 부른 연고로 하여 곧 해탈을 얻으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마하살의 위신력(威神力)은 이와 같이 높고 큼이니라.” 하셨습니다.
원전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있더라도 그 해석을 의역해서 가령, 호랑이에게 당하는 호액을 자동차 사고로 비유를 한다는 식으로, 이 시대에 걸맞게 맞혀본다면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또 관세음 보살님을 향한 기도를 일념으로 수행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세계를 병들게 하는 세 가지의 삼독심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됨을 밝히셨으니,
그 첫째는 탐욕심(貪欲心)이라, 만일 중생이 음욕(淫欲)과 온갖 물질에 탐하는 생각이 일어날 지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욕을 여의게 되며,
그 둘째는 진에심(瞋恚心)이라, 성내는 마음이 많을지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성내는 마음에서 떠나게 되며,
세 번째는 치심(癡心)이라 하여, 어리석음이 많을지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게 되느니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큰 위신력이 있어 요익되게 하는 바가 많음이니, 이런고로 중생은 항상 마땅히 마음에 생각할지니라.” 하셨습니다.
무진의야, 만일 여인이 아들을 구하고자 하여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곧 복덕과 지혜를 갖춘 아들을 낳으며, 혹은 딸을 구하고자 하면, 곧 단정하고 어여쁜 딸을 낳되 숙세(宿世)에 덕본(德本)을 심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공경을 받으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힘이 있느니라.
만일 중생이 관세음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면 복(福)이 되어 헛됨이 없으리니,
이런고로 중생은 다 마땅히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받아 가질지니라.” 하셨습니다.
이렇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현실에서 넋 놓고 있다거나, 그로인해 좌불안석이 되어 현실을 살아가야하는 삶의 다리마저 흔들거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절은 신묘장구 대다라니라는 대비주기도 도량인지라 역시나 이번 기도에도 대비주만을 주로 하게 됩니다.
이 대비심 다라니 주는 “일체중생의 안락함을 위함이며, 일체중생의 병을 없애고자 하는 까닭이며, 수명장수와 부귀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일체악업과 중죄를 멸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의 장애되는 바를 벗어나게 하기위해, 모든 청정한 법과 공덕을 증장케 하기 위해, 선근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리고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고, 구하고 원하는 바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관세음 보살님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대비주를 최초로 관세음보살에게 내려주신 부처님은 무량억겁 전의 “천광왕정주여래(天光王靜住如來)”이셨고 이 여래께 대비주 심주(心咒)를 얻어 받은 관세음보살이 현겁의 네 번째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부처님 앞에서, 보타락가산의 관세음궁전에 모든 천상의 보살과 천룡팔부 등의 천신과 신장들, 스님들이 모인 가운데서 그 유래를 설명하시며 널리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을 갖추게 된것도 이 주문을 들으면서 마치신 발원이 즉시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 주문을 천광왕정주여래 뿐만이 아니라 과거 99억의 항하사 모든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신비한 공덕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99억의 항하사 모든 부처님들께서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는 까닭에 이 다라니를 외워 지니는 사람은 부처의 몸을 갖추게 되고 지니게 된다는 것이 천수대비주의 위력인 것입니다.
다라니는 온갖 지혜와 삼매를 뜻하며,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되는 무량한 공덕이 있으므로 다라니라 하는 것이며 짧은 구절은 진언, 또는 주(呪)라고 불리지만, 긴 구절로 된 진언은 다라니, 또는 대비주(大悲呪)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공업의 파도에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별업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부터 진실로 간절하게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지어온 십악 중에서 첫번째인 살생업을 소멸시키고자 기도가 시작됬습니다.
모두가 일념으로 작정하고 한번 덤벼보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일체가 다 마음의 조화라
정부에서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서민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모두에게 열린 정치를 하다고 열린 우리당이라고 하더니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서민들 살기는 각박해져 오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싶기만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사는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 살아계시던 재세시나, 예수님 당시에도 중생들의 삶은 생노병사와 희노애락 우비고뇌로 뒤범벅된 천층만층의 다양한 삶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 싯달타 태자였을 때를 우리가 유추해본다면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출산으로 인해 세상을 하직하셨고, 비록 이모일지라도 의붓어미의 손에서 자라나는 과정에서 어찌 사춘기의 방황과 고뇌가 없었겠습니까?
이로 인해 싯달타 태자는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불확실성들로부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온갖 수행을 다해보고 온갖 스승을 다 찾아다녔지만, 올바른 가르침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고오타마 수행자가 시행착오에 가까웠을 지라도 그동안의 절치부심의 수행과 간절한 원력으로 일체개고 아당안착이라는 깨달음의 도를 성취하시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근본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생노병사의 근본을 꿰뚫고 이를 진리의 말씀으로 남기시어 고구정녕 구구절절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다운 삶을 위한 지혜의 메세지를 전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끼리도 스스로 과거 생에 지은 바 업이 다른지라 생각도 다르고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도 다릅니다.
이 도리를 어찌 받아들이실 겁니까?
잘난 사람도, 잘나지 못한 사람도 눈 귀 코 입은 다 달렸고, 손과 발은 멀쩡하건만, 한번 뿐인 인생들을 살아가는 데는 왜 그리도 여러 가지로 삶을 살아가는 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헌데, 이렇게 살아가던 이들도 마지막 가는 길엔 “공수래 공수거”라 죽은 다음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몸뚱이를 찾아주는 이가 있든 없던, 영결식을 거창하게 하든 말든 결국에는 북쪽에 있다는 망산을 가는 것은 차별이 없는데, 그 몸뚱이의 소식은 마치 휘발유 가득 찬 자동차도 운전수 내려버리고 나니 주차위반으로 한강변 둔치로 끌려가 처박히듯, 이 몸 또한 그리도 무상하건만, 차에서 내린 기사는 자기 차가 어디 처박힌 지도 모르고 동서남북 헤매다가 통장에 예치금이 많으면 다음 생에 더 좋은 차를 탈 수도 있을 것이요, 통장에 잔고가 없이 마냥 쓰기만 했다면 자가용은커녕, 버스타기도 힘들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이 이 꼴은 아닌지를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형제를 원망하고 환경을 한탄하기보다는 싯달타 태자가 그러한 자신만의 고뇌 속에서 껍질을 깨버리듯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한 도전이 없이 주변 탓만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다음생마저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화엄경을 보게 되면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이라, 오온실종생이니 무법이부조라”(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이라, 五蘊實從生이니 無法而不造라) 이와 같습니다.
“이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그려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로 이 마음 따라 생겨나니 그 무엇도 만들지 못할 것이 없다.” 하는 말입니다.
이 지구촌에서 누리고 있는 첨단문명의 이기가 만들어진 근본 에너지는 발명이라 부르는 중생들의 마음이 빗어낸 작품들인 것입니다.
“심생즉 종종법생이요. 심멸즉 종종법멸이라”
(心生則 種種法生이요. 心滅則 種種法滅이라)
이 한마음이 동하여 일어나니 갖가지 법이 생겨남이요.
이 한마음이 동하여 스러지니 갖가지 법이 멸하드라 하는 뜻인데, 이를 풀어서 의역을 하자면,
“내 주변의 가족과 인관관계, 그 모든 삶의 조건들을 내 마음에서 좋게만 생각하고 이 보다 못했을 때를 생각하며 지금 만큼에도 만족할 줄 안다면 눈에 보이고 내 몸에 스치는 모든 것들에게 좋은 감정만 일어날 것이나,
지금 내 마음이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왜 저놈 보다 못한가라는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꽉 차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불평과 불만으로 내 곁을 무언가 조금만 스치기라도 할 량이면, 일어나는 것은 시비와 성냄 뿐 이다” 는 뜻입니다.
자작자수라 제가 짓고 제가 받는 것이니, 지금의 나의 삶이 어떨지는 저는 매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기도 때마다 독송하시는 “지장본원경약찬게”를 한번 들여다보세요.
이 모든 게 다 인과의 도리인지라, 지금 나의 삶이 여기의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살펴본다면 내가 과거 생에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 어떤 업의 씨앗을 뿌려 박복의 농사를 지었는가를 아실 것입니다.
이제 지장보살 본원경의 약찬게를 마음의 눈으로 보시고 각자 자신의 현실의 업이 어디에 해당되는가를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지장보살본원경 서구중생약찬게”
사랑으로 선을 쌓고 중생구제 서원하사 어두운길 밝히시고 죄의 뿌리 아주 끊어 부처님이 아니 계신 악도 중에 대신하여 중생교화 하옵시는 지장보살 마하살님!
이제오늘 저희들이 조촐한 맘 기울여서 향 사르고 불 밝히고 공양물을 준비하여 보살님께 올리옵고 오체투지 절하오니 저희들의 간절한 맘 굽어 살펴 주옵소서.
지장보살 본원 경을 열세품에 갈무리니 도리천궁 신통 품이 첫머리를 장엄하고 둘째로는 분신집회 셋째품은 관연이며 지옥명호 네 번째요 업감품은 다섯째라,
여섯째는 여래찬탄 일곱째는 이익존망 염라왕궁 찬탄품은 여덟 번째 품이로다.
칭불명호 아홉째요 공덕연품 열 번째며 열한 번째 지신호법 열두 번째 견문이익 촉루인천 열셋째로 십삼 품이 완연해라.
어머니를 위하시어 도리천서 설법할 때 동서남북 사유상하 한량없는 모든 세계 너무나도 많이 모여 설명할 수 없는 청중 광명구름 놓으시고 미묘 음성 내시오니 하늘과용 귀신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사왕천과 도리천과 야마천을 비롯하여 도솔천과 화락천과 자재천중 모여들며 범중천과 범보천과 대범천이 함께하고 소광천과 무량광천 광음천이 손을 잡고 소정천과 무량정천 변정천이 들어오고 복생천과 복애천과 광과천이 자리 앉네.
엄식천과 무량엄식 엄식과실 천중들과 무상천과 무번천과 무열천이 미소 짓고 선견천과 선현천과 색구경천 어깨하고 마혜수라 비상천과 비비상처 함께 했네.
바다신과 강물의신 하천신과 나무신과 산신지신 곡식신과 냇물신과 수렁신과 하늘허공 낮과 밤신 음식신과 초목신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설법도량 모여들고 악한 눈에 피를 먹고 정기 먹는 귀신들과 자심귀왕 복리귀왕 애경귀왕 갖가지 신 이들 모든 청중들이 지장보살 분신이라 백천문수 대보살도 헤아릴 수 바이없네.
천만억년 헤아려도 알 수없는 서원이여 사자분신 부처님과 각화자재 여래 시에 어머니의 온갖 고를 구원하는 딸이 되고 일체성취 여래 시와 청정연화 부처님 때 국왕되고 광목되어 죄고중생 구제하되 지옥만일 아니 비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널리 법계 모든 중생 제도하는 인연으로 부처님의 크신 은혜 갚으리라 생각하고 오무간옥 아비지옥 자진해서 들어가니 불화살이 날아오고 산과창이 좁혀들고 무쇠수레 무쇠평상 무쇠 옷과 칼날이며 무쇠 말에 멍에 메워 구리 밭을 갈게하고 불 던지고 목을 꺾고 다리 태워 씹어먹고 달군철환 철주들을 안 먹는다 부라리고 아비규환 혀를 뽑고 똥오줌을 먹게 하고 불덩어리 코끼리와 미친 불개 소와 말과 불타는 산 타는 돌과 활활타는 독수리가 톱날같은 부리로써 가죽벗겨 쪼아먹고 팔과다리 불에지져 이리저리 난자하다 활활타는 이리에게 던져주어 먹게하네.
팔만사천 지옥문을 한번열고 들어가면 하루 낮과 하룻밤에 일만번을 죽여살려 잠시라도 쉴새없이 티끌겁을 지내가되 벗어났다 싶은 중에 다시 그속 들어가네.
만일 선을 지은이는 경계따라 천당가고 성품의식 흔들리면 악한갈래 떨어지고 살생하면 단명하여 횡사보를 받게되고 사음한자 음란하여 원앙참새 몸을받고 악담하면 권속들이 서로서로 투쟁하고 비방하고 헐뜯는자 혀없거나 언청이고 성질내면 추루하고 독사피부 받아나고 인색하고 탐욕하면 음식기갈 보를받고 사냥하고 방자하면 결국미쳐 가게되고 부모에게 패역하면 천재지변 목숨잃고 산림초목 불태우면갈곳없이 죽어지고 낳은부모 기른부모 악독하게 내버리면 다음 생에 부모되어 오늘앙화 되받으리.
그물던져 생포하면 골육들이 흩어지고 삼보비방 하게되면 눈귀멀고 벙어리고 부처님법 업신여겨 교만하면 악도로세.
비리로써 옳지않게 상주물을 받아쓰고 스님네를 꼬드겨서 파계하게 하는 자는 지옥축생 돌고돌며 그치기만 기다리네.
삶고볶고 불태우고 칼로베고 자르는자 나고죽음 바뀌면서 그과보를 모두받고 재와계율 깨트린자 새와짐승 몸을받아 언젠가는 굶주리고 비천한보 받게되고 아만심에 이간질에 제잘난체 하는이는 혀없거나 백개혀로 변두리에 태어나니 가지가지 인연이며 가지가지 인과설로 짧은순간 본성열어 깨우치게 하느라고 가이없는 모든여래 찬탄하고 계심이라.
유명세계 교주있어 그이름이 지장이요 남섬부주 교화주로 위대하신 보살이라 만월처럼 참한용모 맑은강물 눈동자여 ,
손바닥의 마니구슬 부처과위 보임이라 염라대왕 대전뜰의 업경대에 나타난이 하나하나 증명하여 공덕주가 되옵시는 크신사랑 크신원력 크신성자 지장보살 거룩하신 분이시여.
지옥부처 님이시여.
누가만일 이와같은 지장보살 본원경을 베껴쓰고 읽고외고 널리유포 하는이는 세세생생 인간천상 태어날일 잃지않고 부모자식 서로서로 화합하고 수순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부부간에 화목하고 약한자는 건강하고 수명날로 늘어나고 가난한자 복을얻고 눈먼자는 눈을뜨고 이와같이 가이없는 무량공덕 얻게되네.
지장보살 크신성자 뛰어나신 위신력은 항하사겁 설하여도 다하기가 어려워라 보고듣고 우러르고 예경하는 일념간에 인간천상 이익된일 헤아릴수 전혀없네.
하늘과용 귀신들이 서로서로 옹호하고 성인경지 뛰어올라 온갖악업 소멸하며 부처님이 보호하사 깨달음을 증득하고 본원력을 늘리우고 숙명통을 얻으리라.
의식주가 넉넉하고 역병감히 오지않고 수재화재 풍재없고 도적난도 일체없고 남이보면 공경하기 왕과재상 딸과같고 단정해라 그모습은 제왕과도 다름없네.
손바닥위 밝은구슬 너무맑아 싸늘한데 제스스로 색을따라 여러모양 나타내네.
몇번이나 타이르고 몸소분부 하건마는 어두운방 아이들은 노는데만 정신없네.
본래면목 청정하신 마음지닌 지장보살 무궁무진 부처님의 대자비의 존자시여 남방세계 피어오른 무량무수 향기구름 향기비와 꽃구름과 꽃비내려 적셔주고 보배비와 보배구름 셀수없는 보배꽃과 부사의한 길상으로 두루두루 장엄하매 하늘인간 그원인을 부처님께 질문하니 부처님이 말씀하되 지장보살 왔느니라.
삼세간의 부처님이 한가지로 찬탄하고 시방세계 보살들이 모두함께 귀의하니 나도어쩜 지난생에 선근인연 심었는가 지장보살 참된공덕 칭찬하고 찬양하네.
마하반야 바라밀로 마하반야 바라밀로 마하반야 바라밀로 모두회향 하오리다.
이와 같습니다.
뿌리면 거두고 심으면 나는 것은 아무리 하찮다고 여기는 풀 한포기라도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질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짓밟게 되는 어린 묘목들은 지극히 보잘것 없어 보일지라도 세월이 갈수록 웅장한 아름드리가 되어 여름되면 길 가던 이들이 그늘에 쉬어가도록 공덕을 짓건만,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다들 잘났다고 너스레를 떨던 사람들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쪼그라 들고 볼 품 없어지는 이 도리를 깨달아 진실로 겸허하게 일상의 발걸음을 헛디디면 안 되실 것입니다.
약찬게에 나오는 지옥의 일상이 별개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 다음 생에 누굴 보고 저, 개새끼 하거나 듣거나 하게 되면 결국에는 다음 생에 구업으로 인하여 그 몸을 한번 받을 것이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인과의 도리입니까?
그래서 전생의 빚을 갚고자 후생에 축생의 몸을 받아 후세 중생들의 식탁에 오르기 까지 받는 고초가 바로 지옥고인 것이지 달리 지옥고가 아닙니다.
길가다 엄청 많이 눈에 띄는 무슨 숯불구이다, 양념갈비다 하는 모든 간판 걸린 집들이 사실은 지옥입니다.
불판에 올려지면 화탕지옥이요, 뜨거운 튀김국물에 들어가면 열탕지옥인 게고, 냉동실에 들어가면 한빙지옥이요, 칼로 저미고 다지면 도산지옥이며, 푸줏간에 거꾸로 매달리고 팔 다로 다리 따로 팔려가니 모든 것이 중생들의 현실 속에서 지옥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남의 살은 불구덩이에 올려서 맛있게 입맛 다시면서도 타는 고깃점에서 뜨거운 기름 한방울 자기 살점에 닿기라도 할라치면 기겁을 하는 이 우스운 중생들의 놀음이 참 가관인 것입니다.
남에게 빚을 졌으면 갚아야 되는 것이듯, 금생에 내가 남의 살을 먹었으면 나도 다음 생에 그 몸 한번 받아서 먹혀줘야 할 것이니 이를 어쩐답니까?
그러나 즉심시불이라, 심외무법이라, 심불급중생이 시삼무차별이라 했듯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 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몸은 법당인 것입니다.
법당이 부실하면 불상이 비바람에 내동댕이쳐지듯, 이 몸이 부실해지면 마음 부처 또한 도를 이루기도 전에 동전의 뒷모습만으로 살다가 앞모습을 보기도 전에 끝없는 윤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도 수행자가 병이 들어 회복하고자 할 때는 육식을 하되 조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직접 죽이지 말고, 죽이는 것을 시키지도 말며, 죽이는 것을 보지도 말며, 수명이 다해서 죽은 축생의 몸만을 약으로 삼되 맛으로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의는 전혀 없이 타의에 의해 죽어 원하지 않는 공덕을 짓게 되는 축생의 몸을 탐욕과 어리석은 사람이 먹게되면 그 몸과 한 몸이 되어 어리석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요, 수행 잘하는 이가 한 점을 먹으면서도 진실로 원이차 공덕을 발원해주고 먹게 된다면 축생은 한 젓가락의 육신공양으로 선업을 짓고 천상계에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삶이 축생의 몸을 약으로 먹을 정도로 당당한가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작자수라 제가 짓고 제가 받기에 지금 우리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 답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화가와 같다고 말씀드렸듯이 이제 당당한 그림들을 그리시길 삼보 전에 축원드리겠습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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