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9. 22:3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오늘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의 본질과 그 용심에 대해서 경전에 나오는 게송을 가지고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게 되고 도움을 주게 되면 그날 하루는 왠지 즐겁고 뭔가 뿌듯하고 기분도 좋습니다.
이러한 삶은 선행을 한 것에 대한 즐거움인지라 느낄수록, 중증이 될수록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게 되고 사회는 밝아질 것입니다만,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이런 사구 게송이 있습니다.
본디 사구게란 사구게는 고대 인도의 詩형식으로 산스트리트語로는 슐로카(sloka)라고 하는 네 구절로 이루어진 시인데, 1구(句)는 8음절로 되어 있어 하나의 사구게 음절수는 모두 32 개로 이루어집니다만, 여기서 게(偈)는 불교의 가르침을 운문으로 표현한 짧은 시구(詩句)를 말하고, 산스크리트 가타(gatha)에서 음을 따 한자어로 표현한 것으로, 가타를 번역하면 송 (頌)과 같은 뜻으로 게송(偈頌)이라고 합니다.
모든 경전마다 그 핵심사상이나 가르침을 네 구절로 함축 시켜놓은 사언절구의 게송입니다만, 게송을 보면,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 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눈에 보이는 형상/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 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 맛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과 옳다는 견해)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했다는 생각에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하는 게송입니다.
우리가 보살심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고 돕고 하드라도 마음속에서 기쁨이 일어나고 뿌듯함이 일어나는 것이 지나쳐 자기만족으로 인한 교만심이 생기는 것을 경계해주는 불교만의 심오한 철학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했다거나 해주었다는 생각마저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불교적인 지극히 고차원의 독특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때는 전생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해주고 남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받을 때는 다음 생에 빚 갚을 생각을 하게 된다면 중생의 삶에 죄악이란 없을 것인데 거꾸로들 사니깐 문제겠지요.
또 다른 사구게송은 이렇습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 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여래(부처/진리)를 찾으려들거나 보려하거나 음성으로서 여래를 구하려는 이런 사람은 삿된 신앙을 찾으려드는 사람이라 이런 사람은 능히 여래(진실/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하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생활화하다보면 꿈도 항상 좋은 꿈만을 꾸게 되고 어떤 때는 하늘에서 음악소리도 들리고 온갖 상서로운 눈앞에 신기루처럼 하늘 사람이 보이기도 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만 해도 예전에 오로지 기도로만 살 때, 잠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삼존불이 나타나 기도를 잘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몽중에 수기도 받아보았고,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온통 금빛의 통가사에 상호는 너무나 빛이 찬란하여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그런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제 왼 손목에 백팔금강염주를 손에 감아주시고는 한 아름의 난초 잎과 꽃을 소여물 먹이듯이 제 입에 틀어 넣어주시던 때도 있었고, 한 겨울에 하루 다섯 번을 법당에 기도를 들어가 한번 들어가면 두 시간씩 기도를 했었는데 기도 회향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희열이 복 바치면서 기쁨의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니 제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체험도 했었습니다.
허나,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니 바로 위의 사구게송을 보면서 신비한 기도체험에 빠져 있었던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이제는 달을 볼 뿐이지 가르키는 손가락에 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것도 지나치는 과정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께서도 간절한 기도로써 체험해보시되 다만, 기도를 통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금강경의 게송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교라는 종교를 신앙으로 웬만큼 생활하신 분들은 제방의 큰스님들의 법문 귀동냥이 이제는 박사인지라 다들 누가 뭐라 하면 입에선 “마음” 하고 나올 정도지만 허나, 진실로 이 마음의 실체를 알고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사구게를 보게 되면 법과 마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이라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본래부터 항상 고요하고 있는 그대로 이니, 부처의 세계에 들어온 이들이 이 도리를 알려 들고, 알아 행한다면 다음 생에 부처의 세계를 얻으리라. 하는 게송입니다.
우리가 엊그제 단풍놀이를 간다고 내장산이며 설악산을 찾았지만, 설악산이나 내장산은 나보러 오라고 한 적도 없건만, 보이는 형상에 중생의 마음이 끄달려 온갖 표현들을 해댄 것 뿐이란 말입니다.
산은 시공을 초월해 그대로 이건만, 보는 우리들의 분별에 따라 달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는 자기 주변의 모든 대소사가 자기 자신으로 인해 일어나는 업의 소산이건만, 자신의 업의 씨앗은 생각지를 않고 주변만을 탓하게 되고 주변의 인간관계 역시 나의 마음 분별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란 말입니다.
화엄경의 게송 또한 같습니다.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라(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 法界性 一切有心造)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도록 모든 부처를 알고 싶거들랑 응당, 자신의 불성. 성품을 관조해보라.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자신의 한 생각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바로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당나라로 유학길을 가다가 밤비를 피해 들어갔던 분묘 속에서 자다 자리끼로 마셨던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이 그렇게 달게 마셨건만,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밤에 자리끼로 마셨던 물이 해골바가지의 빗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똥물까지 토해내며 구역질을 하다가 퍼득 깨친 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였던 것입니다.
“어젯밤에는 그토록 달게 마셨던 자리끼가 해골바가지안의 물이었다는 것을 본 순간에 분별심과 차별심으로 인한 구역질임을 깨닫고 그 순간에 원효대사는 분별과 미추와 소유와 선악이라는 일체의 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대 자유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기가 하열하여 깨달음을 얻은 조사스님들의 근기에 미치지는 못한다 해도 경전을 통해 알고 익혀 버릇이 굳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몸에 배여 들게 되면 업이 되듯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가 준비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관련된 갖가지 인연과 비유, 본생담 등을 여러 경전에서 뽑아서 한데 모아 놓은 잡보장경이라는 경전에서 나온 구절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일상에서 여기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게 사신다면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닦아서 행한다는 “수행” 인 것입니다.
수행은 산사에 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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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 없이 살 줄 알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미워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를 부려 만용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라.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모두 버려 지혜롭게 중도를 지켜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보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니라.
우리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아도, 아직 우리의 기도와 꿈이 이뤄지지 않아도,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번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니라.
- 잡보장경(雜寶藏經) 중에서
====================================================================다들 아시겠지만 “보왕삼매론”도 전해드리겠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 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어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저 앙굴마라와 제바달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된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케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의 교만을 순종케 함이 아니며, 저가 방해한 것이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가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슬프지 아니하랴. - 보왕삼매론에서-
이와 같이 일상의 앎이 행함이 된다면 우선 스스로 마음 부자가 되고 만나는 모든 이들이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바로 “주처정토”에서의 모습일 것입니다.
굳이 어렵고 난해한 경전을 공부하려들지 마시고 일상에서 언제든 생활화시킬 수 있는 부처님의 일상의 도리를 몸에 익히신다면 어디에건 걸림 없이 바로 보살의 삶으로 살아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 모두 이차인연공덕으로 인해 삶이 달라지시고 성불하십시오.
어떤 사찰의 큰스님들 법문과 견주어도 법의 무게와 혜량하기 힘든 비교의 기준을 이미 떠난 견처에서 법문을 준비하여 들려드리고자 불전에 지극히 향을 사루며 법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安心法問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우리절에 부임하여 매주 일요법회에 법문을 하고 이렇게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법문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만,
어제 저녁에 법문을 준비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법문을 전해 듣는 이들이 이 법문으로 인하여 일상을 살아가시면서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생의 삶은 오늘이 있다면 어제와 내일이 있을 것이요, 금년이라는 한 해가 있다면 작년과 내년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과거현재미래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나라는 이 모습이 있다면 어찌 과거생의 또다른 모습의 나란 실체가 없었을 것이며, 이 한생을 살다 죽어 어찌 다음 생이 없겠습니까?
다만, 현실세계에서는 과거의 추억과 미래를 향한 상상과 유추는 인정하면서도 금생이 아닌 과거 생이나 미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는 인정하질 않고 떠오르질 않고 기억되질 않는다고 없다고들 하고 맙니다.
이렇기에 우리는 중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욕지전생사이면 금생수자시오, 욕지 내생사이면 금생작자시라, 여기에 늙어 노후 복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니 제가 하나 더 붙여서 욕지노년사이면 초장년작자시라, 하고 하나 더 붙이겠습니다.
평소에 잘 나갈 때는 연락들도 없더니 사는게 어렵다보면 불쑥 찾아와 하소연하는 이들이 참 많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항상 하는 말이 살면서 남 해꼬지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고, 남 불편하게 죄 지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 때 제가 해드리는 말이 바로 전에 이 말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삶을 보면 과거 전생에 어떤 밭에 어떤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었는가를 알 수 있고, 지금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 다음 생을 훤히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동시 작업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운명을 부정하셨습니다.
과거 생에 비록 농사를 잘 짓지 못했다 해도 부처님의 지혜로움을 받아들여 등불로 삼아 살아간다면 다가오는 온갖 시련들을 무난하게 헤쳐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하가섭이후, 인도 남천축국의 셋째 왕자인 보리달마가 반야다라 존자에게 불법을 배우고 중국으로 건너가 대승선을 제창하여 선법을 전파하여 중국 선종의 창시자이며 부처님의 법을 전수받은 수순으로는 28대조이나 중국선종의 초조이자 한국불교 조계종 조사선의 종조이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마대사라고 하는 분이 제자인 혜가에게 해주었던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안심 법문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혜가대사의 성은 희씨(姬氏)로 이상한 광체가 집안에 비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광광이라했는데, 30세에 향산사에서 보정스님에게 출가했었고, 40세 되던 해에 어느 날 밤 신인이 나타나서 깨달음을 얻으려면 남쪽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이름을 신광이라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숭산 소림사에서 지내던 중, 숭산의 소림굴에서 혼자서 면벽하고 인연을 기다리던 달마대사를 만나게 됩니다.
큰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오로지 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는 달마대사께 신광이 가르침을 청하자, 법을 구함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며 딱 잘라 신광을 무시해버리는 달마대사의 핀잔에 신광은 왼팔을 잘라서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 비로소 제자로 허락받고 혜가라는 법명을 받게 됩니다.
열심히 수행하던 어느 날 스승이 말하는 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뜬 구름 잡는 것만 같아 괴롭고 불안하여 혜가는 달마대사의 방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스님 저 혜가입니다.” “들어오너라. 그런데 무슨 일이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요.” 하자 달마대사는 “그래? 편치않은 네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겠다.”
스승이 말하길 편안하지 않은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자 혜가는 아무리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불안한 마음이 도통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자, 달마대사에게 다시 가서 사실대로 말합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편치않은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달마대사는 대뜸, “내가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케 해주었느니라.” 하고 맙니다.
달마대사의 이 말에 혜가는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한번 여기에 답해보십시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 받아 법의 증표로 부처님 가사를 받게 됩니다.
달마는 혜가에게 도를 펼 때 늦게 배우는 사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런 사람이 마음을 돌리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했는데 혜가가 법을 펴던 어느 날 한 처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마흔 살은 족히 넘어 보였는데, 처사는 자신의 병이 전생의 나쁜 업 때문이라 생각하였으며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대 도인이라고 소문난 이 스님은 자신의 죄를 없애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죄만 없앤다면 병은 나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처사가 말하기를 “저는 풍병으로 오랜 세월을 앓고 있습니다. 아마도 숙세의 죄업인가 봅니다. 대사께서 저의 죄업을 소멸시켜 저를 좀 구해 주십시오.” 하자, 일찍이 혜가 자신도 달마대사께 마음의 병을 말끔히 털어냈듯이, 혜가 대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의 죄업을 이리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가 깨끗이 소멸시켜 줄 터이니,”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거사는 혜가스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죄를 찾느라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하기를 “아무리 찾아도 끝내 죄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혜가스님이 말하기를 “그대의 죄업은 이미 없어졌느니라, 이제부터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수행하도록 하라.”는 혜가스님의 말에 거사는 문득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 온 미혹의 사슬에서 풀려남을 느꼈으나, 하온데 “지금 대사를 뵙고 승보는 알겠습니다만 무엇이 불보이며 무엇을 법보라 합니까?” 하고 묻자, 혜가스님은 말해줍니다.
“마음이 부처요 또한 마음이 법이니라 부처와 법이 둘이 아니며 승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자 거사는 벅찬 가슴으로 대사 앞에 엎드려 제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과 밖에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음도 알았으며 불보와 법보가 둘이 아님을 알겠나이다.” 하고 감사의 절을 올리게 됩니다.
혜가대사는 기뻐하며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찬란히 빛나는 구슬과 같은 스님이라는 뜻의 僧璨이란 법명을 내렸고, 이 분이 바로 제 3조 승찬 대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혜가대사는 한때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이를 보고 지방유지가 “덕이 높으신 스님께서 왜 머슴살이를 합니까?” 하고 물으니 “내 마음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하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심수행과 중생의 교만심)
또 어느 날 객이 찾아와 묻기를, “저에게 번뇌를 끊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자, 혜가대사는 “번뇌가 어디에 있기에 끊으려 하는가?” 하고 되물었습니다. 객이 답하기를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하자 “어디 있는 줄 모른다면 허공과 같은 것인데 어떻게 끊겠는가?”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대 도인도 못되고 현실에 쫓기고 일상에 일어나는 온갖 마장들과 주변의 잡스럽고 흉악한 일들로 뒤범벅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없이 끄달리며 살아가는 길에서 어찌 이렇게 도인놀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찌 무슨 답을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기도 때 마다 “원멸 사생육도법계 유정다겁생래 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극하게, 그렇게 하면서 주변의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이지만, 그로인해 내 마음까지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서 바로 금강경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는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이라는 스승님의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야지 싶다가도 막상 부딪치면 안되는데,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을 어디에 머무르도록 해야하며 그런 나쁜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어떻게 항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대목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의 현주소일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면 행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 닦아서 행한다는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생활 속의 수행임을 명심하고 살아가십시다.
성불하십시오.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일 없는 사람은 가는 세월이 늦다고 할 것이고 바쁜 사람은 너무 빠르다고들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변함이 없는 자연의 섭리건만,
중생들의 인간관계는 모두가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눈높이에서만 바라보고 이해하려들기에 가장 가깝다는 부부사이만 보더라도 자신의 인연이 악연인지 선연인지도 모르고 생판 남으로 살던 처지들이 이삼십이 다되도록 키워준 부모님도 마다하고 님이 되어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변해 살아가지만, 어제까지 한 지붕 밑에 살던 부부도 모음에 점하나 변했다고 웬수로 변해지고 주변의 인관관계도 서로가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고 이해하고 아껴주기 보다는 우선 자기의 욕구에 끄달리고 자기가 옳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서로 부딪치고 떠밀리며 악다구니를 쓰고 서로가 원망하고 비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일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깐 부시와 빈 라덴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부시와 빈 라덴의 공통점은 독실한 종교인이라는 점입니다."
유일신 종교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이 믿는 신념체계는 절대자가 친히 내려주신 절대 계시이므로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주의자들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종교를 잘못 믿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 잘난 이 나를 낳아주시고 존재하도록 길러주었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과 부모님이 예수 안 믿었다고 지옥에 갔다는데 그 분들이 죽으면 귀신이 됐다고 제삿날은 고사하고 명절차례에 나를 낳아주신데 대한 감사의 절도 하지않는 그런 좁은 소견머리로 자기의 뿌리는 외면하면서도 기필코 천국에는 가겠다는 그 마음이 지옥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법회 때마다 지장전에 독송하시는 지장본원경 약찬게에 나오는 지장보살님의 서원에 “지옥 아니 비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하신 지장보살의 마음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우리가 종교를 잘못믿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론 이슬람의 종교는 마호메트가 말하기를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을 들라.” 코란을 믿지 않으면 모두 죽이라는 것이 마호메트의 이슬람종교라고 옛날 윤리시간에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요즘 기독교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과 다를 것이 하등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서양식 종교관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받으며 진실로 옳고 그름이 없이 서양의 기독교 종교학자들이 써놓은 종교학을 예전의 선생님들은 무비판적으로 제자들에게 무책임하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생긴 오류는 세계사 책에 나오는 “종교개혁”이란 것도 정확히 말하면 “교회개혁”인 것이지 어찌 종교의 개혁이 될 수 있습니까?
종교가 기독교 하나밖에 없었습니까?
제가 보았던 글에는 “한 손에 검, 한손에 코란”이란 문구에 대한 오해를 설명해 놓았는데, 흔히 해석되는 마호메트의 “믿을래, 죽을래”는 서양인들이 기독교적 편견과 증오심에서 곡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한 손에는 코란을 들어라. 만약 코란을 들지 않고 검만 든다면 너희는 짐승이 될 것이다”라는 게 원뜻이라고 합니다.
마호메트 시절 이슬람교가 번성한 것은 이슬람 군대의 힘이 아니었고 이슬람 군대가 가는 곳마다 자비가 실현된 것이 정복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들여 먹힌 것이라고 합니다.
또 불교에 대해서는 한 스님이 쓴 글을 읽고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일화도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스님은 “오늘 엄청난 교회에 가서 부처님을 만났다. 설교하는 부처님, 듣는 부처님...”이라고 썼다며 “과연 어떤 목사가 이런 생각을 가진 적 있는지 묻고 싶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목사님들에게는 스님들은 모두가 다 사탄이요, 불상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그런 사고를 가지고 모여든 기독교 신자들의 정신세계에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신자들의 영혼의 양식을 편식에 빠져들게 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그릇된 기독교관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금생에 다행히 불법을 만나 이렇게 모든 사물을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여기 마음이 찔리는 글을 좀 들려드릴까 합니다.
“복이 적은 사람이 욕심을 크게 가지면 과욕으로 인해 사업이 망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지어야 재물이 따르는 것이라,”
“죄업장이 많은 사람은 마음을 넓게 쓸 수 없고, 인과가 많은 사람은 그릇된 성품을 참지 못하는 것이며 죄업이 많은 사람은 언행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깨닫지 못하면 행복은 행복이 아니며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닐세. 행복인가 하면 괴로움이요, 사는 것인가 하면 죽음이라,”
“남을 이겨야만 산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산다는 생각을 가지라, 그러면 지고서도 이기는 복록이 올 것이니,
“자신의 죄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을 원망하지 말아라. 나의 죄업이 없으면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조차 않느니라.”
“남에게 재물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거나 일확 천금으로 욕심을 부리다 사기를 당하는 것이나 남을 위하여 보시를 하는 거나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거나 하는 재물은 일체가 전생 빚을 갚는 것이니라.
그러나 성현의 도량에 시주하는 시주금이나 보시금은 내생에 복을 쌓는 것이니 소원을 이루고 성취를 하는 재물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야 하느니라.”
끝에 대목은 우리절에 시주 많이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장본원경 약찬게 71쪽 하단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비리로써 옳지 않게 상주물을 받아쓰면 나고 죽음바뀌면서 그 과보를 모두 받는다는 대목 말입니다.
바로 선업의 씨앗을 금생에 심고 인연을 지어두라는 것입니다.
“극선극악은 당래인과”라 하듯이 인과의 도리가 대단하다면 당래에 그 과보가 있다고 했지만, 요즘은 다르다고 봅니다.
지구촌에서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듯이 사람들의 삶도 인터넷이라는 온라인을 통해 지구촌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전 상의 여섯가지의 신통들도 이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한 제자가 부처님의 도량을 빠져 나와 혼자서 독각수행을 하다가 물 위를 걷는 신통을 얻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세존과 여러 대중들에게자랑하고 싶어서 세존께서 이웃마을에 법문을 가시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세존의 일행들이 나루터에 다다르자 호수를 뛰어들어 자랑스럽게 물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를 보시더니 한동안 보이지 않던 제자임을 알아보시고 그를 불러 묻습니다.
“너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더냐?” 수행자는 자랑스럽게 “예! 저는 혼자서 수행을 하여 이러한 신통을 얻었습니다. 이제 저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여깁니다.” 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동안 혼자서 수행을 했다는 것이 고작 은자 몇 잎의 공부를 했더란 말이냐!” 하며 탄식을 하십니다. 이와 같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도 돈만내면 비행기가 날도록 해주고 돈만 내면 물속도 물위도 심지어 우주까지도 갈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중생의 눈에는 물위를 걷는 신통력이 대단하게 보이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마외도들도 여섯 가지의 신통 중에 다섯 가지는 이룰 수 있느니라, 그러나 일체의 번뇌를 끊고 윤회를 벗어나는 누진의 신통은 여래의 법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들 마음을 비운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들을, 어디에있는 줄도 모르는 마음들을,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마음들을 어찌 비운다는 말입니까?
이 얼마나 뜬 구름 잡는 말입니까?
이름을 마음이라 불러서 마음인 것이지 그게 어찌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
허나 마음은 있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본디 청정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삼천대천세계를 다 품어도 남는 것이긴 하지만, 볼래야 볼 수 없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 입니다.
맹자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 하고 순자는 성품이 악하지만 교육에 의해 결정지어진다고 했지만, 둘 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본디 마음은 본질이고 마음을 포장한 포장지는 성품이라 부르며 포장지의 질에 따라 성격은 결정지어지는 것이고 일상은 그에 따라 세월이 흘러 인생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누진수행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 한번에 원수도 증오도 미움도 다 용서할 수 있고 생각 한번에 한 지붕 밑에 살던 몇 천겁의 인연도 서로 점하나 붙여 웬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예전에는 뒤주에 쌀 그득하고 부엌에 연탄 그득히 쌓아두고 김장 김치 담아두고 된장, 고추장, 간장만 넉넉하면 마음마저 훈훈하게 가족들 모두가 오손 도손하게 지냈던 시절이 불과 1970년대에 우리 주변 이웃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이었는데, 요즘은 눈만 뜨면 아귀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변에 널브러지게 벌어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아침방송에는 자식들에게 매 맞는 부모들에 대해서 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래 이렇게 혼자 사는 내 팔자가 천만다행이다 싶었습니다만, 이런 일들이 남의 일이라고 여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요즘은 이른 봄에도 제비들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지만, 예전에 방문 앞이나 처마 밑에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다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을 보면 한 시도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가 배고픈 저는 잊어버린 채, 서너 마리 되는 새끼들의 입에 갖다 물려주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그걸 볼 적마다, 그래, 중생의 몸은 업연중생인지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 살자고 남의 목숨이 필요한 것이니 누구의 편에 들어 누구를 탓하랴 싶은 마음에 그런 모습들을 쳐다보면서 중생계의 끝없이 이어지는 중생들의 업과 연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일체 번뇌와 윤회를 벗어나는 누진통을 얻지 못하면 이러는 저도 또다시 업보 따라 사생과 육도윤회의 길에서 어디에 떨어져 어떤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생을 받을지 모릅니다만,
미물인 제비들도 한 동안 쳐다보면 새끼 때는 그토록 제 배고픈 줄 모르고 새끼 먹이기 바쁘더니 얼마 지나 새끼들이 날개가 돋아나고 힘이 뻗치기 시작하면 가정교육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절에서 키우던 진돗개가 새끼를 낳는데 주인인 제가 다가서도 눈에 불을 켜던 녀석이 새끼들이 웬만큼 크고 젖을 땔 때가 되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어미 개가 먹기도 전에 어미 밥그릇에 주둥이를 댈라치면 으르렁거리며 제 새끼들을 혼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미물들도 그들 나름대로 새끼들에게 홀로서기 교육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건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식을 낳아 안 먹고, 안 입고, 못 쓰고 밤 잠 못자고 죽어라 자식들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들여놨더니 요즘 자식들이 부모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치매에 들거나 능력이 없으면 공원에 고려장을 당해야 할 판이니 어쩌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사는 세상이 이리 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가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심으면 나고 뿌리면 거둔다는 인과법이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법칙이요, 우주의 질서인 인과의 도리가 인간세상에서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일말의 양심도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가르침인 불법이 거짓이 아니라 진리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 도리를 실천하고 생활화하여 인과법이 가족 모두 마음에 깊게 심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병술년 동지기도입재가 일요법회에 맞추어 해야하기 때문에 6일간의 기도기간입니다만, 백일 씩 끊어서 십악을 소멸하는 천일기도 중에 지금 살생업장 소멸을 위한 백일기도 기간이기에 동지기도가 더욱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작년에도 이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24절기는 보름마다 절기가 바꿔지는데 입춘(立春)부터 시작해서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으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오늘 오전 9시22분(작년03시24분)에 동지가 들어옵니다.
절기 중 아홉 번째인 하지로부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고, 다음 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날인데, 동지는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년 중 가장 긴 날로, 이 날이 지나면 하루 낮 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습니다.
중국 주(周)나라에서도 동지를 설로 삼았는데 이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들께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국세시기에는,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고도 했는데,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풍습으로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고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게 된다고들 했었습니다.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 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죽을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리고 각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게 되는데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로,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기에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다는 같은 의미이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도 팥죽, 팥떡, 팥밥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지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았고, 동지가 초승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금년은 초삼일 애동지)했습니다.
그런데,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라는 책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해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짓날에 궁 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족을 고아, 여기에 백강,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었는데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했답니다.
또,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동문지보)라는 어새(御璽: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 그래서 오늘 달력을 나누어드리게 됩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동짓날이 부흥과 부활을 뜻하고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서로 달력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매년 동지 무렵이 되면 제주목사는 특산물로서 귤을 임금에게 진상했었고 궁에서는 대묘(大廟)에 올린 다음에 여러신하에게 나누어주었고, 멀리에서 바다를 건너 귤을 가지고 상경한 섬사람에게는 그 공로를 위로하는 사찬(賜餐)이 있었으며, 또 포백(布帛) 등을 하사하고 임시로 과거를 실시해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황감제(黃柑製)라고도 했습니다.
우리절에서도 제주도에 사는 신도님들이 보내주신 귤이 와서 오늘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게 됐습니다.
작년에도 말씀드렸듯이 동짓날의 부적으로 오행과 방위에 따라 뱀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고,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동지한파” 추위가 닥치기 전 보리밟기를 보리뿌리가 떠오르는 것을 막고 보리의 웃자람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엔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리밟기를 하기도 했고, 동짓날 한겨울 기나긴 밤에는 새해를 대비해 복조리와 복주머니를 만들어 새해부터 정월 대보름 까지만 복조리를 팔았고, 대보름이 지난 뒤 팔러 다니면 상놈이라 욕을 먹기도 했는데, 복조리를 부엌 부뚜막이나 벽에 걸어두고 한해의 복이 가득 들어오기를 기원했던 우리의 풍속이 없어지는 요즘입니다만,
서서히 음이 양으로 바뀌는 아세를 맞이하는 병술년 동지를 기해서 우리절 가족모두의 가정마다 모든 일들이 원만해지고 소원성취들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인과의 도리를 마음 깊이 새기시고 부디부디 성불하십시요.
유대인들의 조상인 예수님께서 서구인들의 전도로 저 멀리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곳곳에 전도되어 세계적인 성인이 되셨습니다만,
가만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발상이 일어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탄생일이자 그리스도교의 축일이라는 12월 25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대중적인 공휴일이기도한 이날이 정해진 유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유래는 교양정도로 알고는 있어야할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 역서(曆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동방지역에서는 하느님이 1월 6일에 예수의 탄생과 세례 때 나타났다고 하여 기념했고, 예루살렘에서는 탄생만 기념했다고 합니다.
4세기에는 동방교회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시작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를 반대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게 됐고, ‘노아의 방주’가 물위를 떠돌다 도착했다는 아라라트 산이 있고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것이 로마보다 더 빨랐다는( 301년) 아르메니아 지역의 교회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했지만, 동방교회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하고, 1월 6일은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의공현대축일”로 정하자 서방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주의공현대축일”로 삼아 기념하는 축일이 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해진 유래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異敎)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교축제는 농경사회였기에 바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절기를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사 및 태양 의식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념이 합쳐져서 생겨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로마에서는 농경신 사투르누스를 기념하는 축일인 “사투르날리아”(12.17)에 흥겹게 지내며 서로 선물을 교환했고, 아브라함의 서자손인 이슬람교의 이란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신비로운 신, 미트라(정의의 태양)의 탄생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로마력 설날(1월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했고,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이교든 그리스도교든 겨울 축일은 언제나 따뜻함과 꺼지지 않는 생명을 상징하는 불과 연관을 지어 중세부터는 생존의 상징으로 상록수가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담삼아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은 계절은 춥고 마구간의 구유를 배경으로 삼아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대신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헌데, 싯달타 태자의 탄신일은 꽃피는 4월에 탄생의 배경은 부족함이 없는 왕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탄생과 성장의 배경과 부처님의 탄생과 성장의 배경은 참으로 역설적으로 다릅니다만,
두 분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불가사의하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두 분이 다시 현신하신다면 아마, 지구촌의 중생 모두를 지구에서 떠나도록 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진리추구의 방법이나, 나 아닌 다른 중생들을 위해 사랑을 헌신하든 보살행을 구현하든 이 땅에 성인들이 보여주셨고 남겨주신 가르침은 위대했건만, 지금의 우리는 그 분들의 가르치심과는 전혀 다르게 십만팔천리로 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궁극적 진리는 하나인 것이고,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인간들은 궁극적 진리에 대해 서로 네 종교보다 내 종교가 우월하다거나 자기 종교의 교세확장을 지상과제로 삼아 정작 참다운 가르침은 뒷전이고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 간에 아직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하고 서로를 위해 어떻게 상생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들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세상은 종교의 종류도 많고 미신도 많으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종교백서에 신도 수를 기준으로 세계 1위는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스정교를 한데 묶어서 그리스도교가 차지하고 있고, 2위는 이슬람교, 3위는 힌두교, 불교는 세계 4위순입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으시고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가르치시다가 열반하신지, 2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 진리로서 지구촌의 모든 중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을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구상에는 종교적·이념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요즘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다 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정토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정토라고 하면 대부분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는 왕생정토(往生淨土), 갈왕(往), 날생(生), 깨끗할 정(淨), 땅 토(土)라는 죽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이해하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극락은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죽어 살아생전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씨를 뿌려 인과로 인하여 새로 태어나게 되는 세상이 여섯세계라 돌고도는 윤회의 세계가 있어 세 곳의 좋은 곳이 있어 이를 삼선도라 하여 천상과 인간과 수라(신들의 세계)세계가 있고, 삼악도라 하여 지옥과 아귀세계와 축생세계의 세계를 합하여 육도라 하는데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소위 천국은 삼선도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천상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인과의 증명인 것입니다.
원인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이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정토는 영원히 윤회가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정토는 꼭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생전에는 망나니짓만 하고 살다가 생전에 돈이 많아 그 가족들이 큰 절에서 스님들 모셔다가 크게 재를 올리고 천도기도를 한다고 생전에 악행만을 하던 그가 그 기도의 힘으로 극락에 태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사람들을 핍박하고 살던 제후들이 마지막 죽을 때 사제를 불러 임종을 위한 종부성사를 하면 천국에 간다는 중세의 종교관이나 현실세계에 힘 있는 변호사를 의뢰해 “유전무죄”를 만드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살아생전에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어찌하고 살아 갈 것인가 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열가지의 죄를 참회하는 기도문이 나옵니다만, 참회는 당연한 것이고 열가지의 악업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소극적인 선행인 것이고 적극적인 선업은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 나보다 못한 이를 궁휼히 여기며 서로 돕고 살아가는 보다 적극적인 보살행을 실천해갈 때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극락왕생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바로 주처정토(住處淨土)를 누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을 보면 극락은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면 있다하였는데 바로 이 “십만억”이라는 거리의 개념은 바로 열가지의 십악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세 가지의 죄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의 죄업과 생각으로 짓는 세가지의 죄업들이 바로 열가지가 되는데 한 가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극락과는 일만억씩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나 생각으로 짓는 죄업은 각기 세 가지인데, 입으로 짓는 죄업은 네 가지나 되니 예로부터 사람의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하여 그토록 입조심을 시켰던 것입니다.
노무현대통령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은 모두가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 생각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완전한 인격자가 되도록 해주는 도구이자 수단인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야하듯,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도, 부처님의 말씀도, 공자님의 가르침도 모든 성인의 가르침들은 한 인격체가 이 세상에 나와 모든 이들에게 이로운 삶을 살다가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과서이자 영양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에 빠져 허우적거려야한다는 말입니까?
불가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야하고 조사스님들보다도 더 뛰어나야한다는 말입니다.
유교에서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여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한세상을 살면서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야 하고 예수님보다도 더 뛰어나야 하건만, 중생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 분들은 우리처럼 과학이 발달하지도 못했던 시대에 살았었고, 공부하는 자료도 없던 고리타분한 시절에 살았던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발달한 과학만능이라고들 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고리타분한 구시대에 살았던 분들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정토회의 법륜스님의 글을 여러분들께 들려드리면 서 오늘 법문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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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위한 재화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다 재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함께 모여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혼자 사는 것보다는 모여 사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을 누군가 알아주면 좋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많고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고 다른 사람이 많이 알아주면 잘 사는 것이라는 관념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부귀요 명예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부귀와 명예를 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농사꾼은 농사지으면서 괴로워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면서 괴로워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직장 다니면서 괴로워합니다.
또 모여 살아야 유리한데 모여 살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부부간에, 부모자식 간에, 형제간에, 그리고 직장동료 간에 일어나는 갈등으로 괴로워합니다.
저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니 온갖 경쟁에 시달립니다.
일을 해야 살 수 있는데 일을 하니 괴롭고, 함께 살아야 유리한데 함께 사는 데서 갈등이 생겨 괴롭고, 남이 알아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이 생기고 괴롭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괴로움을 주는 일로부터 벗어나고 가족관계에서 벗어나고 경쟁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이 다른 일을 찾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다시 또 새로운 경쟁을 합니다.
이렇듯 문제의 원인을 계속 밖에서 찾고 밖을 고치려 하지만 또다시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을 안으로 돌려보면 어떨까요?
갈등과 괴로움이 생길 때 괴로움의 원인을 안에서 찾는 것을 수행이라 합니다.
이렇게 자기 내면을 살펴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보면 괴로움은 다름 아닌 자기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화두선이든 관법이든 염불이든 수행법의 핵심을 잘 살펴보면 시야를 자기 내부로 돌림을 알 수 있습니다.
앉아서 안으로 보나, 소리 내면서 안으로 보나, 괭이를 들고 일하면서 안으로 보나, 운전하면서 안으로 보나, 안으로 살펴보는 원칙만 알면 됩니다.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더 잘 하려고 하면 인간관계가 많아집니다.
인간관계가 많아지면 갈등의 요소도 많아집니다.
일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갈등도 커집니다.
갈등이 커지고 일이 잘 안 되면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시비분별이 일어납니다.
시비분별이 커지면 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효율도 떨어집니다.
관계 맺고 협동하면 일이 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갈등이 생기니 관계를 끊으면 일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분별심과 갈등이 커질 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해보면 그 갈등이 사라지고 일은 잘 됩니다.
그래서 일을 최대로 열심히 하는 것과 수행이 최대로 잘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부지런해야 수행정진이 됩니다.
최대한 열심히 일을 할 때 갈등과 모순 역시 최대가 되고 마침내 바늘 끝만 갖다대도 터질 듯 팽팽한 상황에서 한 생각 돌리면 정확하게 보입니다.
갈등과 모순, 괴로움이 최대가 되고 그 원인이 절대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 때 눈을 안으로 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어려운 때 눈을 한번 안으로 돌려보면 괴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수행에 대한 확신이 듭니다.
이 수행법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일을 잘 하려고 하면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볼 때는 일을 안 하고 돌아보는 데만 열중합니다.
자신을 살펴보는 것을 일로 삼든 아니면 일만 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 즉 전문수행인이 되든 세속적인 삶을 살던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두 길은 사실 하나의 길입니다.
수행한다고 일을 못하거나 일한다고 수행을 못한다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과 수행은 어떤 모순도 없습니다.
그것은 일과 수행이라는 별개의 것을 통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그대로 수행이고 생활이 그대로 수행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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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습니다.
자신의 일상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일상의 그 자리가 바로 머무르는데서 누리게 되는 주처정토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사람의 나고 죽음이 이와 같은지라, 아침에 해 뜰 때, 시작이요 해지고 달 뜰때, 끝이라는 시종을 사람의 나고 죽음과 같이 보고 이제 겨울이 오고 있음에 내년의 봄을 기다림은 끝없는 윤회를 건너 볼 줄 안다면 삶에 있어 참으로 겸손해지고 살아 있음에 그리고 건강함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다시 산다는 것에 떠밀려 겸손과 감사와 존재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면 안타깝게 보이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고 아깝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며 미운마음이 일어날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눈뜨고 하루를 맞이하는 순간에 주어진 시간과 세월은 흘러가고 맙니다.
아무리 귀한 것도 돈으로 다 살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시간과 세월은 돈으로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귀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며 곱고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항상 매일 순간순간 주변을 바라다 볼 수 있다면 삶은 진솔해지고 진지해질 것입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아침에 건너 산을 바라보면 더운 여름엔 푸른 옷을 두 겹 세 겹 두른 채, 푸르름을 자랑하듯 울창한 숲을 만들어 눈을 시원하게 하더니, 추운 겨울이 오는데도 산은 벌거벗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을 오르거나 들판을 지나다 어린 묘목이 발길에 걸리면 지나는 길에 불편하여 무심코 짓밟고 간 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산에 오르셨던 분들은 그런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토록 쉽게 여겼던 잡목의 어린 묘목이었을지라도 세월 가면 보잘것없게만 보이던 잡목의 묘목은 아름드리가 되어 동네 앞의 당산나무가 되어있기도 하고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나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면서 세월을 보낼수록 때깔 나고 폼 나건만, 사람이라는 만물의 영장이요, 세상에서 젤 잘났다고, 세상에서 한자리 한다고 했다고, 으시대고 살았다고 거드름을 피우던 사람들은 세월이 가면 참으로 볼품없어지고 어떤 이는 늙어 노후에 경제력이 없어지고 자식 복이 없어 초라해지고 추레해 지고 마는 것이 우리 잘나갔던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 본다면 우리가 잡목에 불과했던 저 어린 묘목보다 나을게 무엇입니까?
헌데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나다, 하는 교만에 떨어져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들의 생명들을 가볍게 여기고, 업수이 여기며 온갖 거짓과 위선과 독선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 자신부터도 여기에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과 천주님의 말씀이 전해진 곳들에는 어김없이 교회라는 성전은 들어서 있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들을 보고 거룩한 찬송을 하고 있을 것이고 부처님의 법이 전해진 곳에는 산사이고 도심 포교원이고를 막론하고 법당에는 향과 초를 공양하고 예불을 드리며 선지식들의 법문을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스러운 사람들만 모인 이 지구촌은 왜 이렇게 전쟁은 끊이질 않고 이렇게 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젤 많고 세계 최대의 10대 교회 가운데 다섯 개가 있고, 천년고찰이 명산대찰 마다 들어있는 이 대한민국의 이 시대, 이 사회는 어찌 이리도 어지럽고 흉폭해지고 범죄는 갈수록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어미가 자식을 자식이 어미를 죽이는 이런 지경까지 되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지 않았다 해도 이보다는 더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지식들이라는 큰스님들이 법상에서 주장자를 들고 설해 왔는데도 해도 지금 이 사회의 오탁악세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나 부처를 떠나고 각자의 종교와 신앙을 떠나 한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지키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한번쯤 자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할 것입니다.
이제 가정은 아이들의 교육다운 교육이 없어져가고 있고, 학교는 학교대로 제대로 가르치려다 보면 학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착심에 문제발생이 있을 것 같아 제대로 교육도 시키질 않고 방임에 가까운 교육풍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네 살아가는 현주소입니다.
방송에선 무슨 웰빙 바람이 불어선지 연일 서로가 맛있는 집 찾아 삼만리로 먹거리 프로그램에 열을 올리고 살아있는 온갖 생물들을 맛을 돋운다고 산채로 솥에 넣고 삶아대며 좋다고 헤헤거리는 이 어리석은 무명의 중생들이 남의 생명은 산채로 끊는 물에 집어넣으며 좋다고 헤헤거리며 냄비에서 뜨거운 국물 한 방울 제 살에 닿을라 치면 기겁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를 다음 생에 어찌 저 과보를 받을려나 하는 생각으로 채널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 시대가 이렇게 잘못 되어가는 것은 손쉬운 회개와 가벼운 참회가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승속이 따로 없고 어느 종교인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종교의 교조를 팔고 위대한 성인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아 든든한 통장을 만들어 또 다른 미명으로 부의 확대재생산은 하고 있지 않은지를 참으로 자기 내면의 자성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기만하고 합리화 시키고 있지는 않는지를 말입니다.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성의 오류에 빠져들고 있을 때 사회는 병들어 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 사회는 지금 인과의 도리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병들어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손쉬운 회개와 참회들로 인하여 인과는 철저히 무시된 채, 자신은 회개를 통하여, 참회를 통하여 거듭 태어났다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져버리는 지극히 인간본위적인 자기합리화에 능숙해져버린 현대인들일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달을 가르키면 손가락을 보질 말고 달을 봐야하듯, 부처의 경전에, 예수의 말씀에 매이지 말고 그 말씀들이 무엇을 실천하라는 것인가를 깨달으며 생활 속에서 실현될 때, 자기 자신의 삶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고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도 두려움이나 애착 없이 여여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날을 죽는 순간까지 교회에 가고 새벽예배에 빠지지않고, 새벽예불을 거르지 않고 천팔십 배 절을 달 걸이로 해왔다 치더라도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 뭉겨진다는 경계에 부딪치거나, 자기와 견해가 다르고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그 모든 이를 만나더라도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지혜가 생겨있지 않다면 그동안의 신행생활은 비록 공덕은 될지언정, 다음 생을 이끌어가는 자성의 도리에는 깜깜절벽이요, 천 길 낭떠러지에 서있음에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부처와 예수가 전해주고자 했던 지혜와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길 벗어나, 지극히 교학적이고 난해하고 학문적인 유식한 언어는 문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을 평생을 모르고 살았다 한들 이 경계를 한 평생 실천하고 살아왔다면 그는 바로 보살일 것입니다.
헌데, 어찌 이런 분들이 믿지 않았다고 불신자 지옥이라는 이런 허무맹랑한 독사의 혀와 같은 말을 뿜어댄다면 그것을 내뱉도록 한 의업은 다음 생에 어떤 몸을 받게 될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천지자연의 이치요 우주의 순리인 인과를 무시하고 인과를 인정치 않는 어리석음이 빗어내는 교만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하여, 제가 권해드리고자 하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출가하여 맨 처음 대하게 되는 책이지만, 초발심시 변정각이라 듯이 첫 발심했던 마음이 변치 않으면 바로 그 자리가 깨달음이라했듯 무릇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면 죽는 순간까지 어느 경전보다도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자신을 점검해야할 책입니다.
바로 고려의 국사였던 보조지눌 스님이 남기셨던 “계초심학인문”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에 근간으로 삼으신 모든 분들이 기둥으로 삼으셔야할 “발심수행장”,고려 말에 야운선사께서 남기셨던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경책하라는 "자경문"이라는 책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묶어서 “초,발심,자경문”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져 불문에 들어온 모든 발심수행자들의 윤리와 수행의 기초를 다져주는 책입니다만,
이 시대 요즘 자녀들 교육에 가장 필요한 책일 것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올바른 자녀를 교육하고 싶거들랑, 당장에 구입해야 할 것이고 여러분들마저도 가까이 하시면서 금생의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지내시거나, 각 가정에 항상 비치해두고 대물림을 해두셔야 할 만한 책입니다.
요즘 무너져 가는 가정윤리와 이 사회에 이러한 가르침이 노소를 불문하고 올바른 가정교육을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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