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2010. 2. 1. 20: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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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문은 기도시간이면 어김없이 함께 해 오신 고보살님도 계십니다만, 그동안 기도를 해왔고 동참해왔던 여러분들의 신심과 기도하시면서 과연 여러분들은 얼마나 일상의 삶들이 달라지셨는가를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적어도 천일기도를 해보겠다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시간에 함께 해 오신 고보살님의 대단한 말뚝신심과 주말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김없이 일요법회와 기도에 참석하여 법문을 듣고 가슴에 새기며 아! 저 말은, 저 법문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하며 공감을 해 오신 여러분들의 의업들이 얼마나 변화해 왔는가를 남에게 들키기는 죽기보다 싫은 나의 내면의 세계를 우리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되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절에서 천삼십일 기도를 세 번씩이나 동참하고 해 오신 소위, 대보살 축에 드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께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앉은 자리를 내려다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세 번씩이나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은 과연 얼마나 하고자 하는 바의 성취가 있었으며, 다음 생을 결정지어 스스로 씨를 뿌리는 자신의 의업은 얼마나 달라져 계십니까?


이 자리에서 과연, 나 이렇습니다. 나 이렇게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손 한번 번쩍 드실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십니까?


아마, 안계실겁니다.

왜냐, 이것에 끄달리고 저것에 끄달리고 이것에 매이고 저것에 매이고, 애들 땜시롱, 남편 땜시롱, 온갖 것에 여섯가지의 감각기관이 일상의 수만 가지의 대소사의 대상들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우리의 분별과 욕구와 집착과 애착들로 인하여 우리는 번뇌하고,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욕구에 시달리고 남의 집과 우리 집을 비교하면서, 남의 집 잘나가는 아저씨와 못나게만 느껴지는 우리집 아저씨를 비교하고 잘난 남의자식과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우리집 애들을 비교할 때마다 속 터지는 이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번뇌의 불길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번뇌의 씨앗인 것입니다.


지금 오늘 이 순간, 이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나, 아니면 남다가는 피서를 가기위해 뒤늦게라도 동해안으로 부지런히 가족을 태우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분들도 계시고 PC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나 이 모두가 우리는 매일 매일을 보내며 우리의 삶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명제를  절절히 깨닫고 통찰하는 사람은 무엇에 그리 애닮을 것도 없고 집착하고 애착할 것도 없음을 잘 알게 됩니다.


언젠가 한참 20대 여자애들이 부모를 원망하고 자기의 처지에 대해 속상해 하기에 모두 차에 타라 하구선, 다 늦은 밤에 속칭, 청량리 588이라는 곳에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차창 너머로 제 또래의 애들이 속옷만 걸친 듯 만 듯, 야릇한 불빛 아래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곳을 통과해서 오면서 제가 하는 말이 자, 봐라 지금 저기애들은 다 니들 또래 애들이다. 재들은 어찌해서 저기에 와 있고 너희들은 그래도 부모님들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계시기에 너희들은 이 날까지 이렇게 건강하고 저녁이면 한 지붕 밑에 가족이 다 모이는 않느냐, 지금부터는 너희들의 노력이 자기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엄마 아빠에게 그만 바라지 말거라. 했더니 그 후로 아이들의 삶이 달라졌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무엇에 괴로워하고 마음에 차지 않아 힘들어 하고 계신다면, 이 법회 끝나고 바로 저 벽제 화장장나 수원화장장에 가셔서 두어 시간만 어슬렁거리다 와보십시오.


아마, 부처님께서 오셔서 법문을 하지 않으셔도 스스로 절절히 무상을 깨닫고 괴롭던 마음이 가라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래도 우리가족들 모두가 한 지붕 밑에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는 절절히 느끼고선 되돌아오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반 까먹고 집에 들어와 또다시 눈에 거슬리는 것이 보이는 순간 반에 반 까먹고 다음날이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다시 온갖 것에 부딪치며 육근이 육경을 대하면서 온갖 망상과 애욕과 욕구와 집착으로 뒤범벅되어 버리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일요일 마다 정신차리게 해주는 것이 바로 법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예수고 부처고 하나님이고 없습니다. 소위,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생들에게는 오르고 내리고 즐겁고 괴로운 온갖 팔만사천 가지의 고뇌들이 존재하여 우리를 철들게 하고 기도에 매달리게도 하며 우리들 마음이 간절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집안에 아무런 탈 없이 큰일 없이 법회에 오신 여러분들의 가정의 삶, 이것이 바로 기도의 가피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이러한 법문을 듣고 스스로 자기의 삶이 우리 가족들의 일상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충만한 불보살님 들의 가피 속에 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뿌려온 온갖 인연과 인과의 씨앗들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고 반성하고 감사하고 이후로는 같은 업은 짓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하건만,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하건만, 달은 처다보지도 않고 손가락 끝만을 처다보는 분들이 있기에 이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 알기로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들이 그리 변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능력이건만, 그동안 천삼십일 기도에 동참하고 천일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에서건, 법당에 오셔서건, 해 오신 보살님들이나 법회에 오신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면 들어나 보입니다.


아무리 손금을 잘 본다 해도 맞추는 건 20%도 안됩니다.

아무리 관상을 잘 본다 해도 30%도 못 맞춥니다.

아무리 사주를 잘 본다 해도 50%도 못 맞춥니다.

그러나 심상을 볼 줄 안다면 100%인 것입니다.

(白雲仙師 이야기: 나뭇꾼 총각과 장마철 개미떼)


바로 여러분들의 일상의 의업을 바꿀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건만 하지들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곱가지로  나 아닌 가까운 가족들부터 시작하여 주변사람들에게 될 수 있으면

얼굴엔 和色을 띠고 말은 親切하게 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對하면서 편안하고 좋은 마음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며 무엇이든 親切히 잘 가르쳐주고 좋은 자리다 싶은 자리는 나보다 불편함을 가진 남에게 양보하고 참배하러 오시는 분들에게 방석이라도 권해주는 마음씀씀이가 바로 의업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심상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얼굴에 나타나게 되고 자신의 삶들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전예수재 기도와 성취

이제 백중기도도 끝났고, 18일엔 자기 살아생전에 스스로 자기 갈 길을 닦는다는 윤달생전예수재기도 입재가 있습니다.


자식이 없다거나, 있어도 천하에 불효자이거나, 저 멀리 외국에 나가 살거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님 돌아가셔도 자기 믿는다는 종교에 가서 찬송 몇 번 부르면 끝나버리고 49재가 뭔지, 백재가 뭔지, 일년 소상과 3년 탈상이 뭔지, 제사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후안무치한 자식며느리를 둔 분들이 행하는 의식이 바로 윤달에 행해지는 것이 생전예수재인 것입니다.


한국불교 조계종단에 이렇게 부동산이 많은 이유가 고찰에 가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공덕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공덕비의 주인공들이 이런 분들로 자기 죽어 제사 지낼 후손이 없는 분들이 살아생전에 자기 지어먹던 논과 밭을 위토답이라 하여 부처님 전에 시주하고 절에서는 거기서 나오는 일년 소득으로 사찰 경제에 보탬이 되면서 위토답 주인의 제사상을 차리는 경비로 삼아 제사를 올려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 어려운 숭유억불의 속에서도 불교의 기운은 끊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지금에 이르렀건만, “사자신중충”이라 백수의 왕 사자가 죽어서 꼼작도 않고 있어도 하이에나나 독수리가 덤벼들지 못하다가 사자 몸에서 나오는 벌레들이 사자의 위엄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까마귀 떼가 날아들고 하이에나가 덤벼든다고 하듯이 요즘 승가나 우리 사회는 모두가 이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가평 현리에서 일어난 이등병의 총기 사고를 보십시오.

이 시대 여야정치인들의 어리석음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잠깐의 한 순간을 이겨내지 못한 어리석음은 남과 자기를 결국에는 죽음에 몰아넣고 살아 있는 가족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적만 좋아 대학교만 잘 들어가면 다 되는 이 시대의 풍조로 인해 만들어진 인성교육의 부재로 인과법의 허물어짐이 이와 같은 현상과 결과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인과법이 허물어지면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서로 이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서슴치 않는 이 현상들이 바로 지옥세계요, 아귀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들이 사실은 인과법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면서 삶의 지혜는 까마득히 멀어져버리고 눈앞의 이익만을 급급해하는 인간들의 욕구가 빗어내는 이 시대의 지옥일 것 입니다.


우선은 공부가 중요하다 할지 모르나, 예전 어른들은 다 “지 먹을 것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개천에 용 나기 어렵듯이 이 시대엔 그런 말들이 맞지 않을지 모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식의 인성을 지켜주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평의 총기사고와 총체적으로 섞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바로 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성당도 많고 교회도 많고 절도 많고 매 주일마다 성경 책펴들고 있고, 경전을 독송하고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기도하건만, 왜 이렇게 이 시대는 암울해지는가를 우리는 고민해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인은 단 하나 인과법이 허물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명심을 하고 자기의 삶에 인과에 걸릴 것을 사려보며 “불낙인과의 도리와 불매인과”의(전백장 후백장 고사) 도리를 들으며 이러한 시대적 어려움과 앞으로 내 자식들이 겪을 시대적인 혼란을 극복하는 참 지혜를 찾아 배워 가슴에 새겨 고난을 극복하고 뜻하는 모든 소구소원들이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도법을 그것도 윤달에 더욱 의미 있는 지장기도 법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장경의 견문이익품에 보게되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현재와 미래의 세상에서 백천만억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고자 하면 지장보살의 형상 앞에서 귀의하고, 예배하고 공양하고 찬탄할 지니라, 이리하면 여러 가지 소원이나 구하는 바가 모두 성취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에는 자력과 타력이 있습니다.

자력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벗어나 종국에는 부처에 이르는 자력신앙, 자력수행의 길이 있습니다만, 보통의 중생은 근기가 하열하고 나약하기에 바로 타력수행이자 타력신앙인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타력신앙인 미타수행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그토록 당당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사람들도 시련이 닥쳐오고 고난이 앞을 가로막으면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자포자기해지면서 얼굴에 광채가 나고 당당하던 모습도 간데없이 초췌해지고 얼굴엔 어두운 그늘과 수심만 가득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리되는 이유는 心相에 그늘이 짐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찌할 것인가,

전번에 말씀드렸던 사람처럼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니며 고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가족 모두와 함께 죽을 극단적인 어리석음을 행동에 옮길 것인가로 고뇌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죄업장을 짓는 고민으로 시달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기보다 어려운 현실을 떠올리며 간절한 기도와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뿌려온 죄 업장들을 참회를 통한 불보살님의 자비로움을 체득하는 순간을 이루게 되면 참회의 눈물과 복받치는 희열의 눈물이 함께 하는 순간에 그토록 어려웠던 모든 일들이 순순히 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력수행이자 타력신앙이라 해도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자력인 것입니다.

간절하고 또 간절함이 함께하는 한 녹이지 못할 업이 없고 이루지 못할 성취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처신입니까?

그만큼 자신의 업이 지중함을 깨달아 더 분발해야하거늘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업이 지중하여 그 성취가 늦어지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고뇌만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기도를 하는 척은 해도 끊임없이 “과연 이렇게 기도해 가지고 될까?” 의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기도 중간에 스스로 포기를 하거나, 기도를 마친다 해도 자기에게 닥친 업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는 경우를 허다히 보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는 불보살님들에게 귀의하여, 예배하고, 간절한 기도의 마음, 참회의 마음을 공양하고, 불보살님들의 덕을 찬탄하고 나도 이와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극하고도 간절한 원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소원을 성취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이러한 기도법을 알려주고 가족 모두가 나름대로 틈나는 대로 이러한 기도의 기운이 충만해지고 인과법이 살아나는 가족들이 된다면 그 집안에 어찌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설사, 숙세의 업으로 어려움이 있다 쳐도 일념으로 기도를 함께한다면 숙세의 업도 녹아들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신행 생활이 자력을 바탕으로 한 타력수행을 해 간다면 항상 불보살님들의 명훈가피력은 그 집안과 함께해갈 것입니다.


이러한 명훈 가피력은 그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스스로 찾아가는 것임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칠월 백중법문

 

백중 우란분재 법문에 앞서 이 삼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삼복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 있는 속절(俗節)로 하지후 셋째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庚日)을 중복, 입추 후 첫 경일(庚日)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이라 했습니다.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리지만,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합니다.

복의 어원에 대해서는 신빙할 만한 설이 없으나, 최남선이 지은 조선상식(朝鮮常識)이라는 책에 의하면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서 유래됬다고 합니다.


복은 원래 중국의 속절로 진(秦)·한(漢) 이래부터 중요시 해왔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 기록에 의하면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진덕공(秦德公) 2년에 처음으로 삼복제사를 지냈는데, 성 4대문 안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방지했다”라는 동국세시기의 내용으로 보아 삼복은 중국에서 유래된 속절로 추측되고, 삼복은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이기에 이를 “삼복더위”라 부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소위 요즘 부르는 동빙고, 서빙고동)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고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여름 과일을 즐기고, 어른들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간계곡으로 들어가 탁족(濯足)을 하면서 하루를 즐겼으며,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는 요즘말로 피서를 즐겼다고 합니다.


여름철은 火의 기운이고 가을철은 金의 기운입니다.

“엎드릴 복(伏)”자를 쓰는 이유는 가을의 金기운이 대지로 나오려다가 아직 火기운이 강렬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한다, 소위 굴복(屈伏)한다는 의미로 복자를 썼던 것입니다.


伏字는 혹서(酷暑)의 계절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복(伏)”자가 사람 인자 변(人)에 개 견(犬)자를 썼다하여 복날 개를 삶아 먹는 것은 더위를 잊는 것뿐만 아니라 보신(補身)과 액(厄)을 물리치는 일까지 결부되어 보신탕(補身湯)으로도 불렸으나, 이 말은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삼복더위는 사람만 더운게 아니라 개들까지도 덮다해서 사람도 더운데 툇마루 밑에 개가 혓바닥을 내놓고 헥헥 거리는데서 너도 덮냐는 뜻으로 사람인변에 개 복자를 썼던 것이지 그날 개잡아 먹으라는 뜻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굳이 삼복에 더위를 쫒기 위해 이열치열로 보신탕을 했다는 말은 그 당시 살기 어려워 고기 먹기가 하늘의 별보기 보다 어려웠던 서민들이 정들여 키우던 개를 잡아 영양보충을 하는데 있어 빌미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수렵사회에서 발생한 서양의 종교에서는 남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 살기 위한 방편으로 사냥을 하면서 그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주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이라 하여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기는 첫아이를 출산하여 기뻐하면서 자신의 몸을 보양한답시고 새끼 딸린 축생을 보양식으로삼는게 우리들의 업입니다.

그래서 “원멸 사생육도 법계 다겁생래 죄업장 아금참회계수례를” 하면서 내 몸 살리기 위해 저질렀던 온갖 죄업장들을 소멸하겠다고 업장소멸발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알려드린다면 예로부터 삼복더위 최대 천적은 마(麻)였습니다.

여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시원함인데 마(麻)는 여름철 최고의 의류소재로 대마(삼베), 아마(린넨), 저마(모시)를 사용했는데, 삼베는 통기성과 수분 흡수력이 좋고 항균·항독 성분을 가지고 있어 고대 미이라를 쌌던 천이나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혔던 옷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삼베는 삼베를 입은 시신은 뼈가 땅속에서 썩지 않고 누런 황골로 돼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수의복으로 가장 많이 선호하고 있습니다.


아마(린넨)는 유사 이전 석기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스위스 호수에서 BC 1만년 경에 아마포의 조각이 발굴된 적도 있습니다.

모시는 입었을 때 단아하고 우아한 멋이 묻어나 한복감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모시를 수의로 사용하면 자손의 머리가 희어지고 유골이 검게 된다는 속설 때문에 수의로는 사용하지 않았고, 한산모시는 조선시대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더위를 이기는 방법을 자연 속에서 순응하며 이겨내 왔으나, 지금의 우리는 온갖 문명의 이기로 발생되는 프레온 가스와 자동차 배기가스로 지구온난화가 가속되어 작금의 지구촌의 폭염과 수해와 홍수와 태풍으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이 자업자득의 난리 블루스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소위 절집에서는 우란분재일로 민간에서는 백중절기이자 백종으로도 불리우는 날입니다.

지금우리는 위패의 주인공들인 일체 선망부모와 마음에 걸리는 일가친척 영가뿐만이 아니라, 도량내외 유주무주인연무연의 일체 영가들께 무상의 도리를 일러드려 금생에 대한 일체 불급한 연을 정리하여 홀연히 가벼운 영이 되어 되돌아가시도록 해드리는 최대의 축제의 날이자, 불자 여러분들이 다겁생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알게 모르게 지었던 그 모든 업들을 오늘의 공덕으로 소멸시켜버리는 날인 것입니다.


불교의 큰 행사에 하나인 우란분절,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모두들 아시다 싶이, 백종일(百種日), 백중절(百中節)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월 대보름을 상원일이라 하는데 반해 이 날을 중원일(中元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절에서는 망자(亡者)를 위한 재를 올리며 불공을 올리는 큰 명절로서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인들도 불전과 조상님 전에 공양하였으나 조선시대 이후, 요즘까지 절집만의 행사로 되어 버렸습니다.


또, 예전에는 백종 일을 전후하여 큰 시장이 서는데 이를 백중장(百中場)이라고도 했답니다.


이때는 여러가지 놀이와 노름, 그리고 흥행이 벌어지는 난장이 섰고, 난장이 서면 주인은 머슴들에게 새옷 한 벌과 장에 나가 먹고 즐길 돈을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날을 머슴 날(소위 오늘날의 노동절)이라고도 했답니다.


이 날은 산신(山神)들이 곡식을 추수하는 날이라 들에 나가 일을 하면 방해가 된다고 해서 남자들은 들에 나가지 않고, 여자들도 집안에서 바느질이나 그 밖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을 갖고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하루를 흥겹게 즐겼다고합니다.


초심에 사음수 하면 성독이요 우음수 하면 성유라, (해석) 했지만, 사람의 마음도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란 것이 묘합니다. 맹물에다 설탕을 타면 설탕물이 되어 단맛이 나고, 소금을 타면 소금물이 되어 짠맛을 내게 됩니다. 만약 물에 누군가가 독을 타게 되면 독물이 되고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죽습니다.


금목걸이도 금팔찌도, 금반지도 모두가 같은 금이지만, 인연을 만나 목걸이도 됬다가 팔찌도 됬다가, 반지도 되기도 합니다. 황금에 눈이 멀면 살인도 하구요. 이 모든 것이 의업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면, 물과 같은 이 마음은 부처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되어, 자비수로 가득 찬 마음이 될 것이고, 자비수로 마음이 가득 찬 불제자는 일상에서 모든 이를 대함에 있어 부처님의 자비로써 대하게 될 것이니, 똑 같은 금이건만, 인연따라 용도가 달라짐과 같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내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불교신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불교를 독실히 신행해 나가면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내 마음에 그 무엇이 녹아내리게 됩니다. 달리 말씀드린다면 마음이 훈습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훈습 된다는 말은, 마치 향이 타는 곳에 가게 되면 향 내음이 우리 옷깃에 스며들고 낙엽을 태우면 낙엽 타는 냄새가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불교적으로 말할 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업식훈습(業識薰習)으로 인한 업보중생으로 과거생의 과보에 따라 인연따라 천태만상으로 달리 태어나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결국, 마음이 어떻게 훈습되어지는냐는 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부처가 되느냐 못되느냐,의 방향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佛子라고 하며, 불자를 종불보생(從佛報生), 종법화생(從法化生)이라 합니다.


종불보생은 부처님 설법을 들은 사람이 새로운 정신을 일으켜, 자기 인격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의미이고, 종법화생은 부처님 법으로부터 교화가 되어 그 삶이 새롭게 태어난다. 즉 변화한다, 라는 뜻입니다.


불교란 결국 부처님 법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훈습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훈습이 되면, 훈습되기 전과 큰 차이가 생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 훈습이 되면 비로소 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 되어, 바로 이 세상이 인과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불자들과 비 불자들의 차이는 마음 속 사고방식에 인과법을 이해하는 지적인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변함없는 시간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아무리 의미있게 보내고 아무리 즐겁게 보냈다하더라도 사실은 자기 삶에서 하루가 죽어간 것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원인없는 결과가 없고 인연따라 이루어진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맨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요, 순환인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기에 뿌리면 거두고 심으면 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모두 인과로 이어져있습니다. 어제의 원인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고,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현재가 항상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면서 내일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인과동시’라 합니다.


불교를 독실히 믿으면 인과법이 가슴속에 와 닿게 되고, 비로소 부처님의 법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법의 자식교육과 이시대의 목련존자”

(우리의 현주소)

“목련존자 어머니의 이기심과 인과의 도리”

(실제로 목격한 보산거사의 효행)

모두 이 도리를 깨달아 철없던 시절 도리도리하며 고갯짓 했던 약속을 지키시키 바랍니다.^^

 

이번 백중기도엔 돌아가신 선망부모와 마음에 걸리는 모든 영가들에게 기도정성이 미치도록 지장보살님의 명훈가가 됬을런지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아주 힘든 일에 처했을 때, 또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눈앞에 물불을 안 가리고 매달려 기도하고서 그런 일들이 해결되면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었다고 하던가, 신중기도 가피를 입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의 일상생활화 되어있는 기도신행생활로 인하여 불보살님이 은근히 함께하여 보호해주시는 것이 바로 명훈가피력인 것입니다.


일일 호시일이라, 항상 매일 매일 기도를 생활화 하고 순간순간 지극한 마음으로 신심을 놓지 않을 때 불보살님은 함께하여 좋은 일과 인연을 만들어주고 나쁜 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큰일은 작아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감싸는 이러한 주변의 기운을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자신의 신행이 됬을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명훈가피력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급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기도를 하고 부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집에 천 염주를 준비해두고, 또는 목에 백팔 염주를 걸거나, 손목에 합장주 만이라도 차고 다니다가 언제 어디서건, 노느니 염불이라고 무료하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틈이 날 때마다 손에서 돌리며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며 염불을 할 때, 우리에게는 치매예방이 되면서 불보살님들의 명훈가피력이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 양손 엄지손가락과 좌우 뇌의 상관관계 )


예전에 제가 법문을 했던 대목인데 “한 부자가 마을 뒷산의 절에 찾아가 스님에게 봉투를 두둑이 내놓으며 집안 대대로 물려갈 가훈을 하나 써달라고 하자, 스님이 그 부자의 얼굴을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일필휘지로 여섯글자를 거침없이 써주었는데 뭐라고 썼느냐면 “父死子死孫死”라 아비죽고, 아들죽고, 손자가 죽는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가훈입니까?


그러자 그 부자는 얼굴이 확 붉어지며, 내 놨던 돈 봉투를 획 잡아채며 하는 말이 “아니, 이걸 가훈이라고 써 주냐며 지금 장난치면서 날 모욕하느냐고 노발대발하자 스님은 그 부자를 빤히 쳐다보며 하시는 말씀이 아니 이보다 더 좋은 구절의 가훈이 어디 있소?”  하자 부자는 더 기세가 등등해지는데 스님의 다음 말이 “생각해보시오, 만일 당신

에게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장가도 못가고 먼저 죽으면 그 얼마나 비통할 것이며, 또 당신의 손자가 그 아비 앞에서 먼저 죽는다면 그 또한 얼마나 비통하겠소.

모든 재물을 다 가진 당신에게 이보다 더 좋은 가훈이 어디 있소? 이 외에 당신이 무엇을 바랄 것이 있는가요.?”


하자,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이해한 부자는 스님에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며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의 삼성 이건희 회장의 셋째 딸이 미국에서 죽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씨가 부러울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순리대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였던 이 병철씨 또한 같습니다.

사람이 순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생활이 될 수 있을 때가 바로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집안 가족 중에 특별한 사고나 난치병이 없고 넉넉하게 펑펑 쓰지는 못한다 해도 먹고 입고 쓰는 의식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고 집안이 편안하면 그야말로 족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여기서 배워 알았다 해도 여러분들이 기를 쓰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역시나 중생은 다겁생래 지어오고 뿌려온 인과 연의 과보 속에서 뒹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장기도를 제 삼차 천삼십일 기도를 하고 있고, 낼 모레면 백중천도지장기도를 회향하게 되고 윤달에 생전예수재라 (예수재 설명)하기 때문에 지장경을 위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본원 경을 보면 “날마다 지장보살을 생각하고 떠올리며 그 명호를 하루 천번씩 불러 천일에 이르면, 지장보살은 그 사람이 있는 곳의 토지신을 시켜 그의 목숨이 다할 때 까지 보호하느니라. 그렇게 되면 그는 현세에 먹고 입고 쓰는 것이 풍족해지고 온갖 질병이나 고통이 없어지며 횡액이 그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거늘, 하물며

그의 몸에 미치겠느냐.

또 이 사람은 마침내 지장보살로부터 마정수기를 얻게되느니라.” (견문이익품)

이와 같은 것입니다.


또, “미래세의 중생들이 매달 1일, 8일, 14일, 15일,18일, 23일, 24일, 28일, 29일, 30일, 이라는 십재일(매월 10개의 날을 정하여 제계(齊戒)를 지켜 재앙과 재벌을 피하는 날)에 부처님과 보살님과 모든 성현들의 존상 앞에서 이 지장보살 본원경을 한 번씩 독송하면, 동서남북 사방의 백유순(由旬은 성스러운 왕이 백성들의 생활을 돌아보는 소위 민정시찰을 하는 하루 동안의 움직이는 행동반경으로 인도의 里數로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 정도에 해당됩니다.) 안에서는 모든 재앙과 고난이 없어지며, 그가 사는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가 모두 현재 또는 미래의 백천세 동안 악도에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그리고 매달 십재일 마다 이 지장보살본원 경을 독송하면 현재 집안의 모든 횡액과 질병이 사라지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하게 되느니라.”

(여래찬탄품)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이러한 실천수행이 없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그저 집안에 좋은 일만 바라고 나쁜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농사를 짓고나 있는지를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는 지장보살 염불기도법이고, 하나는 지장보살본원 경의 독송기도법입니다.

어떤 기도가 좋고 나쁘고 할 것 없이 시간 나고 틈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지장보살 염불기도법이요. 여유로움이 있으면 지장보살 본원경을 독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불자들은 아는게 많아 병이라, 소위 識字憂患이라 무슨 기도는 어디에 좋고, 집안에 결혼식을 앞두고 초상집을 가면 안된다느니, 지장기도를 많이하면 영가들이 꼬인다느니, 온갖 망상과 제 생각으로 만들어낸 “이럴 것이다”를 “이렇다” 해버리는 무명으로 떡칠을 하는 어리석음으로 신행생활을 하는 알음알이 도깨비 불자들 또한 많다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절의 가족들은 올바른 신앙생활과 올바른 신행관으로 참다운 기도 실천수행을 행하여 스스로 자신의 다겁생래의 업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업을 소멸시키고 해쳐나갈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지사항) 

윤달 生前豫修齋기도 안내.   위패작성법.


생전예수재란 무슨 뜻인가.?

 

자식이 있다해도 불효를 한다거나, 아예 자식이 없다거나, 자식이 있다해도 먼 외국에 가서 살면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거나, 종교가 달라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을 천도해줄 인연이 없는 사람이 자기 죽은 후에 행할 천도불사를 자기 생전에 미리 닦는 재로 그 근거는 “관정수원왕생십력정토경”에 이르기를 “4부 대중들이 이 몸이 무상한 줄을 알고 부지런히 닦아 보리도를 행하려거든 죽기 전에 미리 삼칠일을 닦되, 등을 켜고 번을 달고 스님들을 청하여 경전을 일고 복업을 지으면 한량없는 복을 얻으며 소원대로 과보를 얻는다” 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말년에 장천이라는 사람은 생전예수재를 하는 의식을 규정한 예수재의(豫修齋儀)라는 책을 썼고 그에 기준하여 예수재를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이차 인연공덕으로 성불하십시오.

자녀를 위한 축원 

어제 일이 있어 잠시 서울 가는 길에 만남의 광장엘 들렸더니 넘쳐나는 피서객들의 차량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불경기는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백중기도 회향도 팔월 첫 주에 7재를 마지막으로 얼마 남지 않았고, 천 삼십일 기도 회향도 팔월 마지막 주인 27일에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지장기도를 해왔습니다만,

말법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지장기도가 가장 와 닿는 기도일 것입니다.


대부분이 기도를 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벗어나 불보살님들의 기도가피를 입어 소원을 성취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인가가 기도를 하는 이들의 내면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를 지장기도를 하면 地藏行者라 하고, 관음기도를 하면 觀音行者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장단에 지장보살본원경의 약찬게 만을 독송하고 있습니다만, 지극정성으로 행하는 지장기도의 공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지장본원경을 독송하다보면 인간이 태어날 때, 부모로서 태중의 아이를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부터, 태어나서 한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生老病死의 모든 고난을 벗어나고 죽음 후의 내생에 이르기까지를 총 망라하여 여기서 벗어나는 모든 기도법이 들어있는 것이 바로 지장보살 본원경인 것입니다.


제가 우리절에 오기 전 주지로 있었던 절에 항상 오시던 신혼 초인 보살님이 계셨는데 법회에 참석하여 항상 법문을 듣고 하다 아이를 갖기 위해 새벽기도를 오시더니 실제로 아이를 갖게 되어 제게 태교에 대해서 물어오기에 유신태교와 유심태교에 대해서 차이점을 일러주었더니 그때부터 唯身台敎가 아니라 唯心台敎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가지 태교의 차이점 설명.) 


시집은 기독교를 주로 하는 정서였는데도 보살님이 뜻을 굽히지 않고 일러준대로 태교를 하는데 아궁이 약해서 조심하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어 힘든 절은 많이 못하였으나 임신하고 백일이 지날 때까지는 항상 천수경을 독송하고 집에서 독경테이프를 틀어두라고 했더니 아이가 달이 가까울수록 엄마가 법당에 와서 기도에 동참을 하게 되면 뱃속에서 목탁소리에 맞추어 발길질을 하면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아이 아빠도 퇴근하고 오면 뱃속의 아이에게 좋다하니 독경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을 잘 정도였는데 나중에 하는 이야기가 자기도 그렇게 잠이 잘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아이를 참으로 편안히 낳았고 아이이름을 지어달래서 性이 손씨인지라 아이의 태어난 네가지 기둥에 맞추어 천간과 지간의 여덟글자로 이루어진 천지의 기운에 부족함과 실함을 조화를 이루도록 허실 맞추어 명방이라 이름 해주었더니 다들 너무나 이름이 예쁘다고 참 희한한 이름이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둘째를 갖게 되어 한번 해보았으니 역시나 같은 방법으로 태교를 하게 됬는데 둘째도 그렇게 편안하게 태어낳다고 하여 제가 이름을 짓기를 유왕이라지어 손유왕이라했더니 둘째애 이름도 주변에서 참 예쁜 이름이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속의 태교는 유신의 태교에 불과하지만 불가의 기도를 겸한 태교는 유심의 태교가 될뿐더러 아이의 과거생의 업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살아가면서 격게 될 업장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으나, 지장보살 본원경의 여래찬탄품을 보십시오.


“새로 태어난 아이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7일 이내에 이 불가사의한 경전을 읽어주고 지장보살의 명호를 1만 번을 불러주면, 비록 과거생의 허물로 인해 죄보를 받을 지라도 곧 해탈을 얻게 되며, 안락하게 잘 자라며 수명이 연장되느니라,

만약 그 아이가 복을 받아 태어난 자라면 안락과 수명이 더욱 더하게 되느니라.” 하고 되어있습니다.


하물며 태교에 이르러서는 어찌하겠습니까?

모두들 요즘 부모들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더니

요즘은 그 하나도 낳지 않으려 들고, 낳자마자 냉장고에 들어가고 쓰레기더미에 버려지고, 화장실에 버려지는 이 슬픈 악업과 악연을 어디에 돌려야 하겠습니까?


모두가 자기 자식 잘되기를 바라고 자나깨나 근심하지만,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했을 때, 사랑하는 자녀들이 편안해하고 자녀들의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자식들에게 좋은 에너지가 갈 것인가를 부처님의 지혜창고에서 오늘 가지고 오신 복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걱정의 기도와 근심의 관심보다는 오로지 기도 후에 해주는 축원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해주는 지극한 축원 한마디가 자녀의 주변을 근심과 어두운 기운으로부터 밝음과 환한 불보살님의 기운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자녀를 위한다면 근심과 걱정의 기운을 보내는 것보다 기도 끝에 자녀에게 지극한 축원 한마디가 더욱 강한 에너지를 주는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법당에서 곰팡냄새하나 없이 끈적거림 하나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에 말씀드렸던 명방이와 유왕이가 보내준 저 제습기의 덕분입니다.


법당에 들어와 기도를 할 때마다 감사의 축원을 해줍니다.


너무나 고맙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두를 위한 공덕이고 공양인 것입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 아름다운 인생을 위하여 ♣


 


자신의 삶에만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삶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읍시다

자신감이 힘입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입니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합시다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시다.


참다운 나로 살아갑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며 체면을 벗어 던지고 눈치를 보지

말고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자신의 삶을 영위합시다.


삶을 배우기 위해

슬픔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삶을 배우기 위해

고통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삶을 배우기 위해

좌절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슬픔도 인생의 일부

고통도 인생의 일부

좌절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슬픔을 가슴에 안아보세요

고통도 가슴에 안아보세요

좌절도 가슴에 안아보세요,

그리고 지우세요.


자신을 슬픔으로, 고통으로

그리고 좌절로 구속하지 마세요

슬픔이나 고통이나 좌절을

마음에 담아두면 안됩니다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슬픔이고 고통입니다.



좌절은 삶을 어긋나게 하여

인생을 포기하게 하는 암 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하며

사랑을 주는 데 인색하지 맙시다.

사랑 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랑은 간단합니다

복잡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가까운 사이 일수록 사랑한다.고맙다

수고했다 미안하다

괜찮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시다.

   

사랑은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기쁨을 나누는 삶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 받을 일입니까?

기쁨을 나누며 일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인생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좋은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