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 중요하다

2010. 2. 7. 22: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728x90

실천이 중요하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인생의 근본 고통인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괜찮은 생활이 보장되는 궁궐을 벗어나 출가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했다.

그는 당시의 종교사상 중에서 절대자의 창조를 믿는 브라흐만교의 가르침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브라흐만교에 반기를 든 수행자들인 사문沙門의 무리에 들어가서 스승을 구했다.

당시로는 자유로운 사상가인 사문들 중에서 으뜸 수행자인

아라라 카르마, 웃다카 라마풋다 등의 사상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스승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즉, 생로병사를 해결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해

자신만의 수행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새로운 수행생활을 시작했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고, 생로병사를 해결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확신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결과를 갖도록 하기 위해

나머지 전 생애를,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생을 전도에 바쳤다.

 

수행의 과정과 전도의 여정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실천에 대해 강조하신 이야기는

초기 불교의 여러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인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워도

그 뜻을 모르면 무엇이 유익하랴.

단 한 구절의 법을 알아도

그것을 행行하면 도를 얻으리라.”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행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은

남의 소를 세는 목자牧者와 같아

사문沙門된 결과를 얻기 어렵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따르고 싶다는

유행가의 가사도 바로 이 가르침의 의미를 잘 살린 노랫말을 통해 감동을 주고 있다.

당시 새로운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부처님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는 것이 중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보다도 우선하는 개념으로 실천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칼라마경』에서는 더욱 진전된 입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말이라고 해서,

경전에 씌어 있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해서…… 믿지 말고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골똘히 사유하여獨一靜處專精思惟’

옳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때 믿어라.”

 

이 말씀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며

종교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너무나 진정이 어린 말씀이다.

진리를 찾아 출가할 때 성을 벗어나기 위해 마부에게 말을 데려 오라고 하였다.

마부가 원수가 궁궐에 침범한 것도 아닌데 어찌 몰래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싯타르타는 ‘나의 원수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고 하며

 ‘내 해골이 썩을지라도 생로병사의 근원을 다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오분율』에 나오는 이 말씀은 그야말로 지극한 실천 수행의 의지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지도하는 대로 수행해

그들이 인정하는 수행의 결과를 얻었으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도 당시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며 다른 사문들이 수행하고 있었던 고행을 버렸다.

 

그리고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자신만의 수행법을 통해 부처를 이루었다.

그때 걸린 시간이 일주일이었고,

선가에서 일주일이면 도를 깨칠 수 있다고 하는 말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요즘은 그 수행법을 참선이라고도 하지만,

당시의 표현에 의하면 헐떡이는 마음을 꿈틀대다가 쉬는 호수의 표면처럼

고요하게 그치게止 해서 여러 가지 현상이나 이치를 주의 깊게 관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죽음은 늙고 병듦에 의해서 생기고,

그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며, 태어남은 존재가 있어서……

최초엔 어리석음無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원수인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워진 부처님은

자신이 출가하기 전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이들에 대한 약속을 이행한다.

그것은 그들 역시 겪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되자 하늘의 신 중 하나인 정거천淨居天이 찬탄시를 읊었다.

“중생의 어두움은 지혜라야 능히 없애리.

중생은 기나긴 밤에 잠기어 번뇌의 병에 얽매어 있으니

부처님은 대의왕大醫王이 되시어 낫게 하시리.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니 8난八難은 모두 자취 없고

모든 사람, 하늘도 부처님의 음덕으로 안락하리라.”

 

이는 『본생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음미해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서 설법을 한 목적이 어디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싯타르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고 설법한 것이다.

 인간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강구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고를 통해서 다른 이의 고통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때문에 요즘처럼 사회적인 이유로 인한 고통도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을 통찰해서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써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사회고 해결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세계관과 그에 따르는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 개인의 통합체인

사회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하지만,

스스로만의 고통을 해결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번뇌까지 해결하는 데서 불교의 사회성을 파악할 수 있다.

 

뜻있는 수행은 사회적 실천이 따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 오심의 의의도 바로 그런 것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어도 당신 혼자만 알고 말았더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실천을 하고 남에게 전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뜨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 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 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 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붓다의 향기뜨락에서 <심인지>님이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