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念佛)기도에 대한 소고

2010. 2. 12. 20: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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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기도에 대한 소고

 

 

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이 하는 수행은 절기도와 염불기도일 것이다. 소수가 참선을 하고, 간경, 독경, 사경, 주력 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기 힘들다. 여기서는 거의 모든 불자들이 하는 염불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

 

염불은 이론적으로 4종류로 나눈다.

1. 칭명염불(稱名念佛)

2. 관상염불(觀像念佛)

3. 관상염불(觀想念佛)

4. 실상염불(實相念佛)

 

첫 번째 칭명염불은 우리가 흔히 목탁을 치며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두 번째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원만한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표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삼매를 개발하는 좋은 사마타 수행법이 될 것이다.

 

세 번째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공덕을 회상하는 수행이다. 이 방법은 남방불교에서 부처님의 열 가지 덕을 생각하는 불수념(佛隨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세밀한 설명이 없으므로 구체적인 수행법이 없다. 자비 지혜가 구족하신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것을 관상염불이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 실상염불은 진리를 관하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전의 청화스님은 ‘아미타불’을 외우면서 실상인 법신불을 관하도록 가르치셨다. 태국의 아짠 차 스님은 ‘붓도(붓다의 주격)’를 염송하면서 생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도록(위빳사나) 가르치셨다. 염불선이라는 것도 있는데 염불을 하면서 ‘염불하는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참구하는 수행이다. 이들 수행법이 각론에서는 다르지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수행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제석천경(S40.10)에서는 佛法僧 삼보에 귀의하면 몸의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매일 부처님의 10가지 공덕을 회상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더 큰 공덕이 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공덕뿐만 아니라, 법의 공덕, 승가의 공덕에 대해서도 명상하면 큰 공덕이 될 것이다. 삼보에 귀의한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되는데 매일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기도하면 훨씬 더 큰 공덕이 될 것이다.

 

여기서 염불삼매에 대해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삼매는 예비삼매, 근접삼매와 본삼매로 나눌 수 있다. 예비삼매는 아직 삼매라고 부를 수 없지만 마음이 고요한 경지를 말한다. 근접삼매는 본삼매가 일어나기 전에, 본삼매에 거의 다가간 삼매를 말한다. 본삼매는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몰입되어 외부의 감각이 끊어진 깊은 삼매이다. 사선정이란 이런 깊은 몰입을 말한다. 즉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흔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염불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 없다. 자꾸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므로 이름을 부르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소리를 내게 하는 의도가 일어나고 이름을 부르고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쉼 없이 일어나는 상태이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소리를 내어 하는 염불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 즉 예비삼매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붓다의 공덕 중에서 하나의 공덕에 집중하여 명상하면 근접삼매까지 가능하다. 그러므로 염불로 본삼매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소원을 빈다. 기도란 어느 종교에든 다 있다. 어떤 이는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을 이야기하며 다른 종교에는 타력신앙만 있는데, 불교에는 자력신앙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을 동급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타력신앙의 원리는 이렇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표상이 나타난다. 죽는 순간에 세 가지 표상 중 하나가 나타난다. 세 가지 표상이란 ‘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다. 업이란 스님에게 보시를 했다는 기억, 남에게 도움을 준 기억 등과 같은 선업, 살인의 기억, 살생의 기억 등과 같은 악업을 말한다. 업의 표상이란 불교신자라면 부처님 모습, 절의 모습, 살생을 한 자는 살생도구 등과 같은 물체나 인물이 나타난다. 태어날 곳의 표상이란 천상에 태어날 사람에게는 천상의 궁전, 지옥에 태어날 사람에게는 지옥의 불, 포유류나 인간으로 태어날 사람에게는 빨간 모포처럼 보이는 자궁이 나타난다. 이 표상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그럼 타력신앙으로 되돌아가자. 타력신앙은 불교인이 염불을 열심히 했다면 죽는 순간에 마음에 부처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열심히 한 가톨릭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보편성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는 순간의 마음에 나타난 표상이 그 사람의 다음 생을 결 짓기 때문에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열심히 하나의 표상에 몰입하면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다. 아무리 나쁜 악업을 지었더라도 죽는 순간의 좋은 표상으로 인해 좋은 곳(善處)에 태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생전에 수많은 소의 숨통을 끊었던 도축업자가 죽는 순간에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외웠더니 아미타불이 맞이하러오는 모습이 표상으로 나타나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 도축업자가 수많은 소를 죽였던 과보는 어디로 갔는가? 그 악업은 잠시 보류된 상태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언젠가 업의 과보가 무르익으면 다시 드러난다. 더 큰 공덕을 계속 지음으로써 악업의 과보가 나타날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된다면 업의 효력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업이란 붓다의 지혜가 아니면 헤아릴 수 없다.

 

법구경(게송 151번 이야기)에도 말리까 왕비가 생전에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비길 데 없는 큰 공양을 올리며 많은 공덕을 지었지만 남편 빠세나디 왕에게 거짓말한 양심의 가책으로 죽는 순간에 공덕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짓말한 잘못만을 기억했기 때문에 죽어 지옥에 태어났다. 하지만 작은 잘못에 대한 과보는 지극히 짧아서 그녀는 일주일 동안 지옥에 있다가 바로 도솔천에 태어나 천상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제 타력신앙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을 것이다. 염불이나 묵상이나 기도는 죽는 순간의 좋은 표상을 얻는 방편이 된다. 하지만 타력신앙은 윤회에서 해탈하는 수행이 아니다. 천상에 태어났더라도 복이 다하면 업에 따라 또 다른 세계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력신앙이란 수행을 통해 마음속의 모든 오염원을 제거하고 청정을 이루어 스스로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염불기도는 세간의 길이요, 수행은 출세간의 길이다. (* 여기서 실상염불은 제외된다. 실상염불은 염불이라는 방편을 통해 마음챙기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마라.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마라. 어떤 것이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인가? 그것은 사념처(四念處)를 수행하며 모든 오염원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무는 것이다."(대반열반경, D16)

 

부처님께서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스스로 열심히 수행하여 해탈을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미타불, 서방 극락정토는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질지 모른다. 아미타불을 지극하게 염하면 서방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며 여기에 태어나기만 하면 번뇌가 있더라도 해탈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보편성의 법칙을 다시 들먹일 수밖에 없다. 불교도에게 극락세계가 있다면 기독교도에게는 야훼신의 세계가 있을 것이고, 힌두교도들에는 브라흐마의 세계가 있을 것이고, 회교도들에게는 알라신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잉카인들에게는 비라꼬차 신의 세계가 있을 것이고, 도교인들에게는 원시천존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이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마다 그들 나름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이들도 모두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세계는 진짜이고 너희들의 세계는 가짜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육조 혜능 대사는 극락세계가 서쪽 어느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청정함에 있으며,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극락세계에 가더라도 해탈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 육조단경을 인용해보겠다.

 

위 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방에 가서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어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니라.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속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르면 곧 부처님의 정토이니라.'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서방정토에] 가서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다만 마음이 청정하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온갖 오염원에 시달리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려우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으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이 없는 돈법[無生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로 보게 하리니, 사군은 보기를 바라는가?"

위 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서방정토를 봐라. 보고 의심이 없을 것이니 곧 대중은 흩어지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청정하면 서방에 가는 것이 멀지 아니함이요, 마음이 더러우면 염불해서 정토에 가 나려 하더라도 이루기가 어려우니라.”

 

사람들은 염불을 하면서 소원을 빈다. 어찌 보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절박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가정에 우환이 닥쳤거나, 아이의 대학입시가 눈앞에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거나,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라며 기도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염불을 하며 기도를 올릴 것이다. 이로 인해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염불을 할 기회가 생겼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원을 빈다고 생각해보자.

“돈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찾아올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공떡이다. 이는 괴로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 즉 바라는 것에 있다.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런 진리(四聖諦)의 두 번째 진리이다. 그러니 너무 터무니없는 소원을 비는 기도는 하지 말자. 그런 기도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기도이다.

 

 

“빨리 도과를 얻기를!, 빨리 닙바나를 얻기를!, 빨리 깨달음을 성취하기를!”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바라는 것도 일종의 욕망이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욕망으로 ‘서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니까.

 

Donde Voy (어디로 가야하나요) - Tish Hinojosa 

 

나는 가야할 길을 알지 못한다

 

길은 많아도 선택된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길이 있어 가고 때론 길이 없어 못간다

 

 

 

나는 홀로 외로워도 혼자서 길을 떠나지 않는다

 

홀로가는 길은 더 외롭고 서럽기 때문이다

바람부는 날은 바람이 싫고

바람없는 날은 바람이 그립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림은 바람이 좋아서가 아니고

흔들리지 않으면 꺽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네가 있어 함께 즐거움이 있음이라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사랑해서 하나가 되는 기쁨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 하지만

 빚진자가 갚아야할 채무 같은 것

  동행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 하지만은 않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아프면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언젠가는 홀로 되는 아픔은 있으리라

 

 

 

 네가 가는 길은 순탄하고

내가 가는 길은 굴곡이 심하다

 

  보이는 길은 가까웁고 보이지 않은 길은 멀다

 

 

 

 세월은 곁에 있어도 멀고

멀리 있어도 어느듯 내 곁에 있다

 

 나는 동쪽에서 동쪽으로 오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와도 또 서쪽으로 간다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한다

 

 

  

사람들이 외면할 때 나는 그를 보려하고

    그가 나를 보려하면 내가 외면하고 만다

 

  기도하는 자가 기도를 듣고 꿈꾸는 자가 꿈 속에 있다

 

 

 

길을 가는 자가 길 위에 있어도

행선지가 아득하여 갈 곳이 없어

멀고 먼 길을 영원하다 말하는가

 

나는 정녕 어디로 가는가...

 

 

 

모셔온 글입니다

 

 

 

Donde Voy (어디로 가야하나요) - Tish Hinojosa  

  

 

Madrugada me ve corriendo
Bajo cielo que empieza color
No me salgas sol a nombrar me
A la fuerza de "la migracion"

동트는 새벽녘 나는 달리고 있어요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어느 하늘 아래를 말이죠.
태양이여, 부디 나를 들키지 않게 해다오
이민국에 신고되지 않도록 말예요

Un dolor que siento en el pecho
Es mi alma que llere de amor
Pienso en ti y tus brazos que esperan
Tus besos y tu passion

내 가슴 속에서 느껴오는 이 고통은
쓰라린 사랑의 상처로 내 가슴에 남아 있지요
난 당신의 품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키스와 애정을.....

Chorus:

Donde voy, donde voy
Esperanza es mi destinacion
Solo estoy, solo estoy
Por el monte profugo me voy

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난 희망을 찾아가고 있어요
난 혼자서, 외로이.....
사막을 헤매며 도망쳐 가고 있어요,

Dias semanas y meces
Pasa muy lejos de ti
Muy pronto te llega un dinero
Yo te quiero tener junto a mi

하루 이틀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당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머지 않아 당신은 얼마간의 돈을 받을거예요.
그걸로 당신이 내 곁에 와줬으면 좋겠어요.



 

El trabajo me llena las horas
Tu risa no puedo olividar
Vivir sin tu amor no es vida
Vivir de profugo es igual


매일같이 일하느라 너무 힘들지만
당신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 없이 살아 간다는건 무의미한 삶일 뿐예요

도망자처럼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난 희망을 찾아가고 있어요
난 혼자서, 외로이.....
사막을 헤매며 도망쳐 가고 있어요,


 
(Homeland, 1989.)
'Tish Hinojosa'는 1955년 미국 텍사스주 출생.
어머니가 멕시코인이어서 남미특유의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퓨전 컨트리풍 형식의 포크송이다.

 



1989년에 'Donde Voy'라는 단 하나의 데뷔곡으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한 손에 거머쥔 행운의 아티스트인
'Tish Hinojosa'는 소수 민족의 애환을 주제로 한 가사와
애잔한 멜로디로 순백한 분위기의 오염되지 않은 정서를
표현하였다.





Donde Voy (어디로 가야하나요) - Tish Hinojosa ~~ ♬
 




가사를 보면 "American Dream'을 꿈꾸며 미국으로 국경을 넘는
수많은 불법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린 서글픈 노래이다.


'Donde Voy'(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랫말과 함께
그들은 무엇을 찾으러, 무엇을 위하여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매사에 바보가 되어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데 있지 --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