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7. 20:43ㆍ일반/생활일반·여행
내친 김에 서양미술사를 통해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팜므 파탈의 전형으로 자주 그려진 유디트와 살로메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프랑스어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femme은 '여인', fatale은 '치명적'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팜므 파탈의 어원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을 지시하는 그리스의 운명의 여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팜므 파탈은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미술·연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상대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말로까지 확대·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팜므 파탈은 남성을 유혹해 파멸과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운명의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19세기말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게 되는 등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여권에 대한 당혹감은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라는 의미의 파멸적인 여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합리성에 대한 반발은 인간 내부에 있는 비합리적이며 감성적이고 파괴적인 것에 대한 어두운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이 어두운 욕망과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투사된 것이 팜므 파탈의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그 이전 바로크기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잔혹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 팜므 파탈의 대표적 유형으로 여러 화가들에 의해 자주 그려졌던 소재는 유디트(Judith)와 살로메(Salome)입니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그리고 살로메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팜므 파탈의 대표적 유형입니다. 그녀들은 둘 다 무참하게 잘려진 남자의 머리와 함께 등장합니다. 도상학적으로 볼 때 유디트는 칼, 살로메는 쟁반이 그 둘을 구분하는 지물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간혹 유디트인지 살로메인지 헛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엔 제목이라도 살펴봐야겠지만요. ^^~
I. 유디트(Judith)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등장인물로서 옛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이며, 이스라엘의 논개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도시가 점령되고 위기에 처하자 부유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젊은 과부였던 유디트는 고혹적으로 꾸미고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가 유혹하여 만취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이 사실을 발견한 아시리아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치게 되고 마침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아름다운 유디트가 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카라밧지오, 아르테미시아 뿐 아니라, 보티첼리, 클림트 등 여러 화가들이 즐겨 자신의 그림주제로 채택하였더랬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년)와 카라밧지오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598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카라밧지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8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x195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먼저 카라밧지오 특유의 극명한 명암법을 바탕으로 그려진 유디트는 갓 스물의 아직 젖살이 통통하게 남아있는 소녀 같은 모습입니다. 그녀의 싱싱한 젊음은 곁에 서 있는 주름 가득한 늙은 하녀와의 대조를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카라밧지오는 빛과 어둠, 미와 추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표현할 줄 알았던 화가였습니다. 늙은 마녀 같은 외모의 노파인 하녀는 보자기를 펼쳐들고 적장의 목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앳된 얼굴의 유디트는 앵두 같은 순진한 입술을 꼭 다물고 마지못한 듯 양미간에 주름살을 찌푸리며 칼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목을 자르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에선 선연한 피가 솟구칩니다.
카라밧지오는 같은 해 <메두사 Medusa>에서 다시 한 번 잘린 목에서 솟는 핏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카라밧지오 <메두사> 1598년.
카라밧지오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형장을 찾아가 사형수들이 처형되는 장면과 도살장의 동물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면밀히 관찰하며 수없이 스케치하였다고 합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순식간에 닥친 자신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화면 위쪽에 늘어진 붉은색 커튼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뒤늦게 예고라도 하듯 너울대고 있습니다. 새하얀 침대시트를 움켜쥔 왼쪽 손등 위로 방금 잘린 건장한 장수의 목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솟구쳐 내리고 있습니다. 유디트의 날카로운 칼날은 이미 그의 목의 3분의 2 지점을 지나고 있고 목이 뎅겅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지금 이 순간 홀로페르네스는 아직 살아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죽어간다고 해야 할까요? 화면에서 마지막 순간에 내지른 그의 외마디 허망한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는 듯합니다. 근육을 뒤틀며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마지막 그의 의식이 이생의 마지막 호흡을 멈춘 뒤 최후의 안광을 쏟아내고 있는 참혹한 그 순간을 카라밧지오는 극적으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저 마지막 눈빛을 보는 자는 이생을 사는 동안 평생 그 눈빛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하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하네요. 마치 메두사의 눈을 직접 들여다보는 자는 돌이 되어 굳어버린다는 신화처럼……. 400여년 후, 현재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살아있는 걸까요? 죽어가는 걸까요?
이번엔 앞선 카라밧지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의 작품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년)를 살펴 볼까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2-21년, 1620년 완성으로 추정됨, 199x162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피고 타시는 성추행 혐의가 인정되므로 유죄. 금고 팔월 형에 처한다.” 이처럼 1612년 10월 로마의 한 민사 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7개월 동안 끌었던 법정 공방이었습니다. 상대를 먼저 유혹한 저질스런 꽃뱀의 혐의를 받으며 진행되었던 세기의 강간사건으로 불린 굴욕적인 재판 후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의 작품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의 얼굴에 자신을,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자신을 칼로 위협한 후 강간한 타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명암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감상자의 시선을 이 극적 살해 사건에 주저없이 몰입하도록 만듭니다.
여리고 가냘픈 몸매의 카라밧지오의 유디트와는 달리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서른은 족히 넘긴 듯 보이는 아줌마처럼(^^;) 튼실한 어깨와 목 그리고 강한 팔뚝을 지닌 풍만한 체구의 완숙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완강한 표정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육간의 고기를 썰듯 적장의 목을 따고(?) 있는 유디트 옆에, 같은 연배로 뵈는 역시 튼실한 하녀는 보자기를 들고서 적장의 목이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리던 카라밧지오의 늙은 하녀와는 달리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갑작스레 닥친 이 위기를 모면하려 버둥대는 적장의 몸을 자신의 체중을 실어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적장의 목에서 튀는 피보라에 자신의 드레스가 더렵혀진다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듯합니다. 유디트의 손에 들린 칼은 그의 목을 거침없이 가르고 목에서 흘러나온 붉은 선혈은 침대시트를 적시며 화면 아래로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선 카라밧지오의 작품에서 보인 배경에 드리워진 붉은 커튼은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에서는 희생자의 식어가는 몸 위에 느슨히 걸쳐진 시트가 되어 절망적인 죽음 앞의 선 희생자의 무력감을 더욱 극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년)는 이렇게 자극적이며 노골적인 주제를 그림으로써 당시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해 반발하고 복수하려 하였던 한 여성화가의 <회화의 우의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한 타시는 당시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이 외에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이야기는 여러 미술가들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중에서 세기말 빈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의 작품에서 또 다른 매력적인 유형의 팜므 파탈로서의 유디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클림트의 유디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극작가 C. F. 헤벨의 희곡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헤벨은 자신의 처녀작 <유디트>를 5막 희곡으로 구성하였는데, 이 희곡은 1839년 완성되고 1840년에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데까지의 줄거리는 성서대로이지만, 그 행동의 동기는 사뭇 다릅니다. 이 희곡에서 유디트가 적장을 죽인 것은 동포 시민을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관능의 욕망에 약한 자신의 죄를 통감한 나머지, 그러한 자기에게 스스로 복수하기 위해서였다고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초인(超人)인 적장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은 유디트는 비탄한 나머지 미쳐버린 광녀로 그려집니다.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I> 1901년, 캔버스에 유채, 84x42cm
그러면 구스타브 클림트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I>(1901년)를 살펴 봅시다. 이 작품은 클림트의 황금빛 에로티시즘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클림트는 여기서 앞선 작가들과는 달리 이미 잘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신의 왼쪽 옆구리에 가져다 대고 있는 묘한 표정의 유디트를 그렸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성적 황홀감에서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치켜든 턱에 거의 감겨진 눈꺼풀, 반쯤 벌여진 그녀의 관능적인 붉은 입술사이로 곧장 쾌락의 신음이라도 새어 나올 듯 합니다. 그녀의 시선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감상자는 그녀를 자연스레 올려다보게 됩니다. 황금빛 목걸이와 팔찌, 벨트의 장신구로 인해 그녀는 더욱 아름답고 냉혹한 요부처럼 보입니다. 풀어 헤친 옷깃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아직도 붉게 흥분된 유두와 묘하게 강조된 배꼽 그리고 적장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잠시 전 황홀한 절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머리칼을 애무하듯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렇게 클림트는 유대민족의 영웅적인 모습보다는 관능적인 욕망의 순간에 취해 있는 유디트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글은 계속됩니다.) 미재합장 _()_
유디트에 이어서 살로메에 관해 쓰겠습니다.
II. 살로메(Salome)
살로메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사촌이자 예수의 앞길을 미리 예비하는 주요 사명을 부여받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여하는 인물로서, 왕의 생일연회에서 의붓아버지인 헤로데 왕 앞에서 유혹의 춤을 추고 난 후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잔혹한 악녀로 등장합니다. 대개의 화가들의 그림들에서 구약의 유디트는 유대민족을 구하기 위해 직접 적장의 목을 칼로 치는 영웅으로 묘사되어 칼과 함께 등장하지만, 유혹의 대가로 남자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는 쟁반 위에 참수된 남자의 머리와 함께 화면에 등장하지요.
그렇다면 왜 살로메는 치명적인 유혹의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였을까요? 여기에는 2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성서에, 또 다른 하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해석에 따릅니다.
성서적 해석에 따르자면, 세례 요한이 헤로데 왕과 원래 그의 형수였던 헤로디아와의 부당한 결혼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다녔고 이에 대해 살로메의 어미인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순진하고 아름다운 딸 살로메로 하여금 왕을 유혹하여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그 앙갚음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액면 그대로 성서대로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쟁반에 얹어 가져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마태복음 14:10-11)
이와는 달리, 오스카 와일드의 운문형식의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살로메는 어머니의 복수를 대신하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원하는 적극적이고 성숙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요한의 육체와 그의 사랑을 원하였지만, 그를 죽인 후에야 비로소 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시극 <살로메> 초판본(1892년)에 실린 영국의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가 그린 삽화
살로메 : 아, 왜 나를 보지 않았던 거야? 만일 나를 보았더라면, 당신은 나를 사랑했을 거야. 당신이 나를 사랑했으리라는 걸 난 잘 알아. 그리고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도 더욱 위대한 거야!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Salome> 중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은쟁반에 담겨져 자신 앞에 내어온 아직은 피의 더운 기운이 남아있는 참수된 요한의 입술에 정열적이고 광적인 키스를 합니다. 이어 그 엽기적 모습에 질려 ‘저 사악한 계집도 함께 죽여라’라고 내린 왕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루시앙 르뷔 뒤메르, <살로메> 1896, 파스텔화, 51*61cm, 개인소장, 독일
살로메 :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이 들린다) 아, 난 당신의 입술에 키스했어,..당신 입술에선 쓴 맛이 나는군. 그건 피의 맛이었나? 아니, 그건 아마도 사랑의 맛이었을 거야. 사랑은 쓴 맛이 난다고들 하잖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요한, 난 당신 입술에 키스했어!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Salome> 중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이 작품은 근친상간의 코드가 숨겨진 퇴폐적이고 병적인 성도착증을 묘사한 문학이라는 비난도 뒤따랐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의 오페라 <살로메>(1905년)를 비롯한 음악분야 뿐 아니라 세기말 여러 화가들의 그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Opera <Salome> Photo Credit Robert Clayton.
구스타브 모로의 <환영>(1876년)과 프란츠 폰 슈툭의 <살로메>(1906년)에서는 의붓아버지 헤로데 왕 앞에서 유혹의 춤인 ‘일곱 가지 베일의 춤’을 추며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원하는 선정적인 살로메 자태가 상징적이며 환상적인 색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환영>에서 ‘초인간적인 사악함과 초인간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항상 슬픈 사람’으로 알려졌던 화가 모로의 살로메는 동양적인 색채를 지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재현되어 있으며, 프란츠 폰 슈툭의 <살로메> 역시, 춤의 절정에 이른 고혹적인 자태로 그녀의 매력이 마치 금가루가 되어 날리는 것 같은 어두운 배경 깊숙이 감상자의 시선을 이끌어 갑니다.
구스타브 모로, <환영>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06x72cm.
프란츠 폰 슈툭 <살로메>, 1906년, 캔버스에 유채, 115x62cm, 뮌헨 시립 렌바흐미술관 소장.
한편, 구스타브 클림트 <살로메>(1909년)를 보면, ‘퇴폐적’이란 대상에 부여된 성질이라기 보단 감상자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구스타브 클림트 <살로메>, 1909년, 캔버스에 유채, 178x46cm.
클림트의 살로메는 비릿한 피냄새 풍기는 음탕한 악녀라기보다는 마치 오페라극장에 가는 귀부인마냥 격조 높은 우아한 자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르누보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선의 아름다움으로 창안된 매혹적인 이 살로메는 황홀한 미소가 채 가시지 않은 입술로 고통에 찬 영혼의 비명을 긴 호흡으로 내뱉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가녀린 양 손목에는 장신구들이 마치 고통의 그림자마냥 칭칭 감겨있습니다.
메마른 갈대밭을 스치며 불어오던 바람소리가 살로메의 풀어헤쳐진 아름다운 두 가슴 위에 서걱입니다. 살로메를 치장하는 또 다른 장신구인양 그녀의 손가락에 걸려 달랑이는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의 눈이 감겨져 있고 입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조차도 건네지 않은 채……. 차가운 사랑의 결별입니다.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 시드는 것, 사라지는 것, 한순간 그녀를 꿰뚫고 지나갔던 전율에 대한 결별입니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그녀의 눈동자가 밤의 세계의 한없이 깊은 어둠을 향하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살로메는 마치 죽음을 초월하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죽어간 세례 요한이 확신했던 영원한 빛의 세계와는 다른 곳이긴 하지만요.
칼 쇼르스케는 『세기말 비엔나 Fin-de-siècle Vienna』에서 말하기를, “클림트의 우주관은 쇼펜하우어 적이다. 즉 의지로서의 세계, 무의미한 출산, 사랑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에 묶인 맹목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이 세계관은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욕망이 선언하는 자아와 세계의 한계가 해체되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감수한다.”
이처럼 세기말에 등장한 팜므 파탈은 한편으로는 관능성의 해방을 표현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불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에 가 닿고자 욕망하는 남성은 죽음과 파멸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팜므 파탈의 유혹 앞에서 흔들립니다. 팜므 파탈의 유혹은 치명적이고 인간은 이 잔인한 쾌락을 통하여 사랑과 죽음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삶의 본질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팜므 파탈의 정신성은 조르쥬 바따이유 Goerges Bataille가 지적한 에로티즘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로티즘 L`Érotisme』(1957)에서 에로티즘을 단순한 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신성에까지 이르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바라보면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 규정합니다.
아, 인간이여! 귀 기울이라!
깊은 한밤중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난 잠들었다. 잠자고 있었다…….
깊은 꿈에서 깨어나서 알게 되었노라.
세계는 깊다고,
대낮이 알았던 것보다 더 깊다고…….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슬픔은 깊다…….
욕망은......고통보다 더 깊다.
슬픔이 말한다, 사라져다, 죽어라!
하지만 욕망은 영원하고 싶어 하지,
깊고도 깊은 영원성을 원한다네.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중에서
(글은 계속됩니다.) 미재합장 _()_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하였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당시 유행하던 베네치아풍의 풍부한 색채로 유대 신화 속의 릴리트를 당대의 복식을 입은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7년, 종이에 수채, 50.8*42.8
로제티의 릴리트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습니다. 주위엔 그녀의 향기로운 숨결인양 붉은 양귀비꽃과 장미가 가득합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에서 생명을 얻어 피어난 꽃이 장미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붉은 장미는 생명의 신비, 생명의 심장부를 나타내는 동시에 정념, 관능, 유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망각, 잠, 위안, 위로, 몽상 등의 꽃말을 가진 양귀비꽃은 덧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덧없지만 유혹적이며 달콤한 꿈과 같은 위안을 주는 팜므 파탈의 존재를 암시하듯 화면 가득히 꽃들이 피어있고, 릴리트의 무릎에는 방금 벗어둔 듯한 화관이 놓여져 있습니다.
몽환적인 표정의 릴리트는 창백하고 긴 손가락으로 우아한 목덜미 너머로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풍성한 황금빛 머릿결을 빗으로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손에 든 거울 너머의 아득히 먼 다른 세계를 응시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릴리트의 꿈꾸는 듯한 눈동자, 향긋한 체취가 묻어나는 뽀얀 살결, 육감적인 빨간 입술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남성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황홀한 몸짓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기)라 일컬어지던 세기말의 시기에 뭇 남성들을 홀려 파탄에 이르게 만드는 팜므 파탈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꽃들이 아쉬움 가득,
깊은 적막 속에서,
비밀처럼 달콤한 향기 풍긴다.
-보들레르 <악의 꽃> 중에서
장식적인 곡선과 아름다운 꽃과 여인을 자주 그렸던 라파엘전파에서 활동하였던 로제티가 창안한 릴리트의 이와 같은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영화, 드라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섹시 아이콘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팜므 파탈은 자주 여성잡지의 한 켠을 차지하면서 여성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섹시함으로 무장한 요부가 될 것을 질기게 부추깁니다. 대중매체의 팜므 파탈 이미지는 흔히 남성적 시선에 의해 성 상품화된 섹시한 여성으로 과장된 헤어스타일과 짙은 화장에 몽롱한 눈빛, 그리고 차가운듯 신비로운 미소를 머문 유혹적인 붉은 입술 등과 같은 외면적인 요소로써 강조됩니다.
팝아트를 표방한 앤디 워홀(Andrew Warhola 1928~1987)의 작품 <마릴린 먼로>시리즈에서 짙은 눈화장에 붉은 입술을 가진 유혹적인 표정의 금발미녀는 성적 관능성의 기호로 나타납니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1967>,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워홀이 만들어낸 성적 매력만을 단순화시켜 강조한 마릴린 먼로의 상투적 이미지 초상은 대량복제되어 무한히 재생산되며 코카콜라나 캠벨 스프마냥 날마다 소비, 유통되는 품목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앤디 워홀의 작품(복제)으로 그녀(실제)를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팜므 파탈의 성적 관능성에 대한 집착은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자태로 남자의 색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의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팜므 파탈에 대한 피상적인 외피만을 과도하게 주목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에 반발하여 벳시 프리올뢰는『유혹의 기술』(2004년)에서 ‘유혹녀(Seductress)’를 새로운 여성의 모델로 제시하면서, 유혹녀는 행복의 온전한 의미를 깨우침으로써 미래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릴리트 외에도 살로메, 유디트 등 여러 다양한 팜므 파탈의 유형이 있겠지만, 기억해야할 점은 이러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특히 19세기말 유미주의(aestheticism) 시대에 유행하던 몹시 치명적인 매력을 소유한 미인의 한 유형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미적인 사색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세기말적인 시대정신의 구체적 형상이며, ‘더 이상 예술은 인생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표어를 내세운 유미주의 시기에 탄생한 예술사조인 아르 누보의 심벌입니다. 팜므 파탈은 단순한 섹슈얼리티를 넘어 시대정신의 표출이며 인간의 미적 삶의 방식과 미적 인간상에 관한 알레고리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샤를 보들레르는 『근대적 삶의 화가』(1863년)에서 “모더니티를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즉흥적인 것으로 예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 예술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영원적인 것, 불변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세기말의 팜므 파탈은 보들레르가 제시한 모더니즘의 본질을 지니며 예술이라는 세계의 절반을 자기 영토로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착한 여자, 아니 어쩌면 남성적 속성을 부여받은 여성 아닌 여성이 지닌 영원하고 불변하는 빛의 구원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일시적, 충동적, 우연적인 요소들이 깊이 뿌리내린 은밀한 어둠 속에서 팜므 파탈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늘빛은 다가선 어둠 속에서 더욱 짙푸른 블루로 투명하여지는 시간, 날선 인간의 이성이 누그러져 아득한 감정과 뒤섞이는 혼돈의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찰라, 문득 관능의 향기로 다가선 팜므 파탈의 마법의 날갯짓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이브를 유혹한 또다른 악녀, 릴리트는 오래된 신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이 스미는 시간이면 고양이같은 몸짓으로 다가와 권태롭고 무거운 삶에 지친 이 지상의 슬픈 체류자인 우리에게 치명적인 유혹의 눈빛으로 달콤한 위로의 키스를 던지며 신비로운 꿈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남자들은 좋은 여자, 나쁜 여자 중에 어느 쪽에 더 끌릴까요? 혹은 나는 나쁜 여자일까? 좋은 여자일까? 이렇게 이원론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다만 인생에는 우리가 도저히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je ne sais quoi)’이 있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실타래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풀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들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양 날개로 정신과 관능의 환희를 노래하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통해 논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력을 요하는 인간의 이성 그 너머에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더욱 명징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기말적인 미인의 유형인 팜므 파탈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회·문화적 신드롬이 되고 광고, 드라마, 영화, 연극, 패션 등 최근 대중매체의 소재로 차용되고 있습니다. ‘신유미주의’로 규정될 수 있는 21세기 미에 대한 숭배의 시선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움과 악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운명의 결합체’인 팜므 파탈을 또다시 주목하고 있습니다. 19세기말적 증후의 하나로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찾아온 우울한 기질의 퇴폐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팜므 파탈 이미지가 다시 20세기 말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오늘날 문화전반에 걸쳐 유행하며 현대적이고 창조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아이콘으로 각광받고 재조명되는 현상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오늘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 Andy Warhol, the Greatest>展에 가셔서 워홀이 만들어낸 꿈같고 허상같은... 자본주의의 꽃, 팜므 파탈의 향기를 한번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미재합장 _()_
ANDY WARHOL, THE GREATEST
2009.12.12~2010.4.4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관람시간
평일: 오전10~오후9시
주말과 공휴일: 오전10시~오후6시 / 매주 토요일은 오후 9시까지 관람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일)
일반 12,000원 청소년 10,000원 어린이 8,000원
불교교리 및 참선(명상)강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역 가까이에 있는 해인사 백련암 분원인 '상적광선원'(常寂光禪院)은 지난 가을 성철스님의 상좌인 원유스님(상적광선원장, 화엄사 선종학원 한주) 이 개원한 참선 수행선원(몸과 마음 영혼이 깨어나는 수행도량)으로서 스님은 안거 해제기간에 이곳 도심 수행도량에서 저희 신도님들과 함께 더불어 수행지도합니다.
지리산 화엄사 선등선원에서 계속안거에 임했던 스님은 산중의 맑고 청정한 수행의 기운과 참선정진으로 일구어진 지혜를 도심의 조그마한 아란야 상적광선원에서 불교의 진수인 참선을 알고자 하는 불자님들에게 법음을 전하고자 경전강좌와 선 수행 강좌를 개설하였기에 님들의 청강을 청하는 바입니다.
특히 당선원에서는 성철큰스님께서 불자님들의 수행방편으로써 최상의 조도(助道) 수행이라고 강조하신 아비라 기도를 천일기도와 더불어 참선정진하시는바 직접 오전 10시부터 주관하시는 기도에 동참하심을 권장하오며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적광선원 신도 회장 덕상 정은용 합장
- 개강 일시 : 3월 2번째 주 ( 각 강좌별 해당요일 )
- 개설 기간 : 개강 후 2개월간
- 모집 인원 : 각반 선착순 30명. 복수 수강도 가능함 .
- 동 참 금 : 각 강좌당 교재비 포함 월 5만원 ( 복수 지원시에 2만원 활인 )
- 접수 방법 : 먼저 전화하여 반 선정확인 ( 070- 8764-3568 혹은 010-3594-5456 )→ 농협계좌 입금 ( 241032-56-064652 예금주 : 정인석 입금 )
불교 참선학당 운영 시간표
시간/ 요일 |
화 |
수 |
목 |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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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
(기초교리반) |
(경전 반 ) |
(선어록주간반) |
(선어록 야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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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9일 개강 |
3월10일개강 |
3월11일 개강 |
3월12일 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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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 |
10:00 ~11:30 |
사시불공 및 아비라 기도 |
사시 불공 및 아비라 기도 |
사시 불공 및 아비라 기도 |
사시 불공 및 아비라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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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불공 및 아비라 기도 |
11:40 ~13:00 |
공양, 차, 산책 |
공양, 차, 산책 |
공양, 차, 산책 |
공양, 차,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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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차, 산책 |
13:00 ~15:00 |
<기초교리반> 교재;조계종 출판사 |
<경전주간반> 반야심경및화엄경보현행원품 |
<선어록반> 육조단경 강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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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및강좌> -발심수행장-성철스님의백일법문등.. |
15:00 ~15:30 |
참선 |
참선 |
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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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
19:00 ~21:00 |
<기초교리반> 조계종 출판사 교재 이용 |
<경전야간반> 반야심경및 화엄경보현행원품 |
- |
<선어록야간반> 육조단경 강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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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21:30 |
참선 |
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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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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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는 길 : 경의선전철역 능곡역 옆 국민은행안쪽 골목 50m 아림약국 2층
-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토당동 383-10 201호 상적광선원
- 전 화 : 070- 8764-3568 / 010-3594-5456
- 상세 안내 : Daum 카페 -상적광선원 < http://cafe.daum.net/Buddha-lotusland >
당신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 권수형
강물이 이랑을 일구며 넘나든
천만 년 세월 동안
얼마나 연모해 온 오늘입니까?
먼 듯 가까운 듯 당신을 꿈꾸어 온
별빛 벌판에서
말없이 몰현금의 영혼을 탄주합니다.
신령스러운 꽃들이
가슴에서 두근거리며
마구 피어납니다.
바다에 길이 열리듯
당신 안으로 걸어 들어가
허공이 됩니다.
당신을 만나서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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