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Femme Fatale) I : 나의 유혹은 사랑보다 아름답다. 01

2010. 2. 15. 16:09일반/생활일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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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런게 있다고 하더구나. 그 앞에선 돈도 미래도 생각나지 않고 자기 자신마저도 잊고 무작정 빠져 드는 그런거...그래 그런 사랑이 있긴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난 사랑따위는 믿지 않아”

 

한 때 세간의 논란이 되었던 <내 남자의 여자>라는 TV 드라마에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악쓰는 딸 화영(김희애분)에게 화영모(김영애분)가 공허한 목소리로 내뱉는 대사입니다. 화영의 읍소보다 화영모의 이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서 오히려 팜므 파탈의 입김이 확 풍겨납니다. 뱀처럼 차갑게 번뜩이는 눈동자 너머에 남겨진 그녀의 처연한 트라우마를 짐작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어쨌건 이 드라마에서 허망한 사랑과 삶의 비밀을 이미 알아채 버린 화영모와 화영은 어쩌면 동일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김수현 작가스런 불륜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화영은 절친한 친구의 남편을 빼앗는 뻔뻔하고 아름다운 악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왜 하필 화영의 직업을 성형외과의로 설정하였을까요? 성형외과의가 최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직업이긴 하지만 아마도 작가는 화영의 뽀글거리는 펌 헤어스타일과 더불어 아름다운 악녀라는 팜므 파탈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 주는 하나의 장치로 ‘인간의 외관 즉 육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외과의’라는 직업을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남자들은 간혹 이 세상에 대개 두 가지 종류의 여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서구 문화에서는 기본적으로 마리아(성녀)와 이브(악녀)라고 하는 여성상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르마 브루너는『미술과 페미니즘』(1994)에서 “중세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은 크게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죄의 상징인 ‘이브’로 대표되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원죄 없는 여성, 여성이지 않은 여성이며 이브이지 않은 여성인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표되는 성녀(聖女)의 이미지이다.” 라고 언급합니다.

 

일반적으로 원죄의 상징인 이브를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상정합니다.그러나 유대 민담에 따르면, 원죄의 상징인 이브 이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태초에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히브리어로 ‘밤의 괴물’이란 뜻을 지닌 여인, 릴리트였습니다. 그녀는 신조차도 시기하도록 만들었다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은 이브 이전에 존재하였고 원래 아담의 짝이었으나 너무나 아름답고 사악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릴리트라는 여인으로부터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곤 하였습니다. 시인 키이츠는 <라미아>에서 릴리트를 ‘아무런 죄의식없이 남자를 유혹해서 잔인하게 파멸시키는 아름다운 여자’로 노래하였고 화가 존 콜리어는 그의 시에 영감받아 <릴리트>를 그렸다고 합니다.

 

존 콜리어(Hon John Collier 1850-1934)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릴리트>는 성적 황홀감에 아예 눈을 감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는 같은 영국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판사들 앞의 프리네>(1861년)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제롬의 작품은 다음글에 이어서 쓰도록 할께요.^^~

 

                                                                          존 콜리어 <릴리트> 1887년, 캔버스에 유채, 237×141

 

릴리트의 황홀한 얼굴표정과는 달리 한줄기 빛조차 들어오는 걸 허락치 않는 깊고 깊은 숲 속 같은 축축하고 컴컴한 배경으로 오른쪽 발등부터 무릎, 사타구니와 허리를 감아 오르는 뱀의 애무를 거부하는 듯한 흰 대리석 조각같은 릴리트의 눈부신 나체는 인체를 가장 아름답게 연출해주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콘트라포스토란 이탈리아어로 '정반대의 것'이라는 뜻으로, 미술에서 '대칭적 조화'를 의미합니다. 한 쪽 다리에 체중을 실으면 반대편 어깨는 내려오는 한편 엉덩이 부분은 올라가져 전체적으로 인체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자세로 보이도록 하는 자세로 그리스시대부터 조각상에 적용되어온 포즈입니다. 요즘 말하는 인체가 S라인으로 돋보이도록 해주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답니다. (무대 위 패션 모델들이 주로 취하는 포즈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

 

존 콜리어의 <릴리트>를 다시 볼까요? 오른쪽 어깨너머로 풀어 헤쳐진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사이로 뱀이 머리를 들이밀며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고, 그녀는 또 한 마리의 뱀의 머리를 자신의 등 뒤에서부터 걷어 올리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여성과 그 나체를 칭칭 감싸며 타고 오르는 징그러운 뱀의 형상은 프로이트가 말한 바 있는 사랑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로 엮어진 에로티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탕한 내음이 진하게 풍겨나는 이 그림에서 누구라도 한번 흘낏 훔쳐보게 되면 좀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사악함의 매혹적인 결합을 목격하게 된답니다.

 

18세기 영국 미학자 월리엄 호가스는 『미의 분석』(1753년)에서 미의 원리를 가장 훌륭히 구현하고 있는 것이 사선(蛇線)이라 칭하며, 이를 미선(line of beauty), 우아선(line of grace)이라 주장한 바 있습니다. 존 콜리어는 뱀과 여체라는 소재의 직접적인 결합을 통해 늘 갈망하나 결코 만나보지 못한 쾌락 세계를 향하는 인간 내면의 꿈틀대는 성적 환상과 욕망의 시선을 섬뜩한 우미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초라한 남편의 미움거리로

당신은 수많은 여자 중에 나를 골랐으니,

그리고 연애 편지 던지듯 불꽃 속에

이 오그라진 괴물을 내던질 수도 없으니,

 

-보들레르 <악의 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