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도깨비/석용산 스님
우화나 전설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그래도 귀엽고 맹랑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무서움 보다는 친근감을 주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절간에는 아주 무섭고 두려운 도깨비가 있다.
눈이 둘 코 하나 ,생긴 모습은 우리와 똑 같은데 하는 일이 가관이다.
이 절 기웃 저 절 기웃! 이 스님 찝적 ,저 스님 찝쩍!
이 절 흉을 저절에, 저스님 흉을
이스님에게 옮기어 절싸움 내지는 중싸움을 만들고 다닌다.
더 무서운 것은 무슨 방망이를 휘두르는지 ,
멀쩡한 중들이 흘리어 함께 춤을 추고
그러다가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 진다는 점이다.
승려들이 타락하고 절이나 시중 포교당이 무너지는 이유 중에 태반이 이 절도깨비라면...
타종교에 비하여 불교에 유독 왔다갔다 하는 도깨비가 많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가르침 자체가 속박되지 않는 해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더 현실적인 이유를 꼽는다면 소속감을 줄 수 없는 교단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스님들의 지도관리 능력 등도 들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신도 자신들의 신앙 정립과 주체성이
결여된 데에 이유를 주고싶다.
믿는 마음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이절 저절 방황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신도들의 자세를 꼬집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몸담아 배우고 닦고 공들여 성숙의 덕을 쌓은 도량이라면
그 도량을 보호 육성할 책임과 의무는 못 지키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는 알아야 하건만 화합을 깨고 물의를 일으키는 혼란과 업을 지으니
이들 같은 무리가 있기에 승려들은
어렵고 힘드는 개척 포교는 포기를 하고 신도 관리를 하지 않아도
편안히 살수 있는 재정 튼튼한 기존 절들을 차지 하려고 칼부림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승려들의 못난 짓을 합리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자세를 이야기 하고픈 것이다.
김시습이 어느날 쌍계사에 가게 되었는데
뒷간구석에서 발발 떨고 있는 여자귀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그러구 있나 물었더니 여귀 왈< 살아생전에 안가본절이 없고 이름 올리지
않는 암자가 없는데 죽고나서 배가 고파 밥 숟갈이나 얻어 먹으려 이절 저절
기웃거려 보았지만 절도깨비귀신이라고 신장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니 죽을지경이다.
쌍계사불사에도 큰 시주를 한 일이 있어서 홀대하지 않으리란 기대로 왔으나
이곳 신장들은 더 펄펄뛰며 <네년이 보시물이 무주상 보시가 아니고 애착과 교만이
더덕 더덕 붙은 업 덩어리여서 씻어내고 닦아내느라 죽을 똥을 쌌으니 한번만
더 다시 눈에 띄면 박살을 낸다고 하여 오가지도 못하고 떨고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김시습은 절 도깨비 귀신에게 이절 저절 다니며 화합을 깨고 삼보를 비방한 죄가
얼마만큼 무서운 것인가를 일러주고 지장염불을 가르쳐 주어 천도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불자들은 자신도 절 도깨비가 아닌가 한번 정도 점검해 볼일이다.
여인과 스님 /석용산스님
어느방패라도 뚫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 있는가 하면
어떤창도 막을 수 있는 뛰어난 방패가 있으니
창 모矛 방패 순盾 그래서 세상살이는 모순인 것이다.
모순된 세상사를 조화롭게 만들려는 노력 역시 모순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순이 조화요 조화가 모순이며
모순과 조화 마저도 뛰어 넘는 더 큰 영역이 있으니
우린 또 노력을 계속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스님 생활의 시작이, 여인 보기를 독사보다 더 무섭게 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된다.
처음이나 끝이나 스님과 여인은 조화 될 수 없는
철길의 평행선인 양 인식되어 왔고 그렇게들 가르치고 배워왔다.
그러나 가장 조화를 요구하고 조화로워야할 사이가 스님과 여인인 것 같다.
여인의 몸을 빌어 세상에 태어났고 여인의 가슴팍과 등허리에서 자랐으며
승려같은 경우는 신도의 90%가 여신도인 만큼 여인들 속에서 살아간다,
아니 인구의 반이 여인이니 여인을 독사보듯 무서워해서야 어찌 살겠는가!
선현의 가르침 역시 조화를 이루라는 말씀이지
여인을 독하고 몹쓸 존재로 떼어 놓으란 말씀은 아닌것이다.
선현들의 족적을 보더라도 궁궐에서 거친 옷 음식으로 생활하며 남편의 도가
원만히 이루어지기를 하루같이 기원했던
야소다라 왕비가 없었다면 어찌 석가가 부처가 되셨겠는가!
아들 라훌라를 앞세워 얼마든지 방해할 수도 있었던 왕비가 아니었던가.
요석공주 없는 원효를 또한 생각할 수 없다,
요석의 사랑과 보이지않는 희생의 뒷바라지가
원효스님이 원효성사 원효보살로 거듭나는 힘이 되었고
의상대사 역시 선묘의 목숨던진 사랑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 했겠는가.
스님이 중국 유학길에 병을 얻어 고생할 때 모든 정성을 기울려 간호를 했고
애절한 사랑을 모질게 삭이면서 스님을 공부의 길로 떠나 보내야 했던 선묘낭자!
죽어서도 님의 꽃이 되겠다고 발원하여
의상대사의 발길마다 빛이되고 숨결마다 꽃이 되었던 여인.
큰사람 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여인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다.
지순한 사랑과 헌신은 모순을 벗어나 아름다운 세계,
더 큰 조화의 세계를 여는 힘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진실되지 못한 물든 마음에 있는 것이지 남과 여 스님과 여인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재색지화 심어독사라는 가르침에 길들여진 마음을 내려놓고
오늘은 어느 성직자의 여인 신성론을 끝으로 맺음하고 싶다.
[무릎꿇고 공경례하기엔 너무 아름답고 끌어안고 사랑하기엔 너무도 신성한 그대 여인이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스님들 이야기는 접어두고........
스님들이 포교를 해보고자 해도 보살들한테 지쳐서 산중으로 숨어 버린답니다.
우리 여성보살님들 ...보살님들이 없었으면 큰 불사를 누가 이루었을까요!
불교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보살님들 .....
불교를 살리는 일이 보살님들 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스님을 사랑하려거든 선묘낭자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도업을 성취하게 하고
불사를 하거 싶거든 절 도깨비 소리 듣지말고 무주상 보시하여 그 공덕으로
성불하시기를 바라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인생 최고의 영양제
스위팅이라는 사람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이런 멋진 말을 했답니다.
'사람은 40일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고,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8분간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 2초도 살 수 없다. 희망 없이는…….'
그렇답니다. 똑 같은 상황, 똑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의 인생과 절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의 인생 사이에는
도무지 메울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차이가 있답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이끄는 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두 손일 때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말.
세상에서 두 글자로 된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적었답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자, 이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 주는 말
희망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내가 되세요.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 하나.
그것의 이름은 바로 '희망'입니다.
-박성철, ‘희망 반창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