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緣起法)과 동체대비(同體大悲)/청화큰스님

2010. 4. 4. 17: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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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緣起法)과 동체대비(同體大悲)

 

청화 큰스님

 우리가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를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연기법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모르면 부처란 나를 모른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연기법은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입니다. 실은 연기법이라 하는 우주의 대법(大法) 위에 불교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기법이 바로 우주의 대법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인연·연기이므로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도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연기법에 포섭되고 특히 불교는 연기법으로 체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동체대비'라는 것은 남하고 나하고 같은 몸이기 때문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자비가 나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은 일체 중생을 동일체로 관찰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째서 다른 사람과 나와 같을 것인가? 분명히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뿔뿔이 있는 것인데 왜 한 몸, 한 마음일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린 것이 이른바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우주(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참다운 생명자체(生命自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자체는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 자체가 바로 한 덩어리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분할(分割)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우주가 하나의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하나님 덩어리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인연 따라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전변무상(轉變無常)한 모양만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은 같다 하더라도 한 번 모양을 나투면 뿔뿔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어려운 말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조금도 한계가 없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바늘구멍만큼 적은 현상적인 존재나 히말라야 산같이 큰 존재나 부처님의 정기(精氣)라는 뜻에서는 원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相對)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주는 빈틈도 없이 부처님 진여불성이란 한 생명만으로 충만(充滿)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나한테 있는 불성(佛性)이나 너한테 있는, 예수한테, 공자한테,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하고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도 아시이성불(我是已成佛)이요,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요. 나 아(我)자, 바로 시(是)자, 이 시자는 옳을 시, 바로 시, 그렇게도 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바로, 이미 이(已)자, 이룰 성(成)자, 부처 불(佛)자, 나는 이미 부처를 성취한 사람이고, 여시당성불(汝是當成佛)이라. 그대는 바로 당성불(當成佛)이라. 마땅 당(當)자, 앞으로 그대 역시 필히 부처가 될 사람이다.

이렇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원래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 자리는 호리(豪釐)도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워서 겉으로는 나같이 보이고, 남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근본 성품 자리,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바람 따라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波濤)가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자리에서 나온 너나, 나나 일체의 존재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도인이고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제아무리 무엇을 분별지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도인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깨달아 체증(體證)해야 도인(道人)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성취한 분들은 그때는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너한테 들어 있는 것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이 들어 있으므로 어떻게 남을 무시하고 다르게 구분 지어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도덕(道德)이라는 것도, 우리가 이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참다운 도덕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아무리 남을 돌본다 해도 항시 자기가 중심이 돼 있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재물을 보시하고 어디다 봉사를 하나 항시 자기라는 것이 전제가 돼 있고 자기라는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른바 상(相)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쉽게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이런 말을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언제나 위선(僞善)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미처 못 떠났기 때문에 위선을 미처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 그 자리를 체험을 해버려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하면 조금 양심이 더 있고 덜 있고 하는 상대적인 차이 뿐이지 온전히 상을 떠나서 조금도 흐림 없는 베풀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나 카톨릭 계통에서도 하고 있는 한마음 한 몸 운동, 그런 것도 참 굉장히 좋은 운동이지요. 그러나 그네들로 해서는 한마음 한 몸을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했고, 한 번 창조한 사람들은 뿔뿔이 있고, 하나님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이런 이론 체계로 해서는 한마음이나 한 몸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될수록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서 남을 돕는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불교와 같이 바로 철학적으로 온전히 나와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는 안됩니다.

 

목련의 슬픈 전설


하늘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의 아름다움과 착하고 상냥한 마음씨에 이끌린

하늘 나라의 젊은이들은 저마다 사랑을 구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공주는 그렇게 늠름한 젊은이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느날 하늘나라 왕이 공주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지만

아직 어리다는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곤 했다.


공주는 언젠가 북쪽 마을의 바다지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늠름한 모습을 공주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다지기는 이미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었고,

마음도 정직하지 못한 데다 흉악하기까지 했지만

착하고 예쁜 공주는 그의 건장한 모습에만

홀딱 반해 버렸던 것이다.


공주의 마음 속에는 오직 바다지기 뿐~

어느 날 밤 공주는 아무도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물어물어 찾아 내었지만

바다지기는 이미 결혼을 한 뒤였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실망을 한 공주는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지 못하고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안 바다지기는

비록 마음이 바르지 못하였으나

공주의 사랑에 감동하여 시체를 거두어 잘 묻어 주었다.


그 날부터 기운이 없고 말도 잘 하지 않는 남편이

걱정되어 물어 보는 아내를 바다지기는

점점 귀찮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내에게 잠자는 약을 먹여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야 딸의 소식을 전해 들은 하늘 나라의 왕은

바다지기를 사모해 죽은 공주와 바다지기의 아내를

꽃으로 태어나게 했는데, 공주의 넋은 하얀 백목련으로

태어났고, 바다지기 아내의 넋은 자줏빛 목련인

자목련으로 태어나게 했다.


모두 북쪽 바다의 신을 사랑했던 두 여인의 넋으로

무덤가에 피어난 목련은 죽어서도 북쪽 바다의

신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 북쪽을 바라보고 피어났다. 

 

 

4월의 노래

박목월 작시, 김순애 작곡/ 메조소프라노 백남옥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