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 세상과의 새로운 화해

2010. 4. 2. 21: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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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 제3장.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만배백일기도 (crystaldrop)  

제3장.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열심히 산 것은 ‘내 인생의 숨은그림찾기’에서
언젠가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는 일이

숨은 그림을 하나씩 찾아나가는 과정이며

이는 곧 꿈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숨은 그림 중 몇 개쯤을 찾은 것 같다.


오체투지 : 3-1. 세상과의 새로운 화해  

만배백일기도 (crystaldrop) 

세상과의 새로운 화해


   “언니야, 미안해. 집이 좀 엉망일 거야. 회사일도 많고…… 에, 그리고 내가 또 한 인기하니까 만날 친구들도 많고. 헤헤.”

 수화기 저 편에서 경아는 예의 그 밝은 웃음을 웃고 있었다. 서울 올라가는 중인데 경아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진영에 작가의 집이 완성된 후로 나는 주말이면 아이들과 외국인의 문화체험을 위해 그곳에 머물다 올라오곤 한다. 요즘은 대학원 공부와 논문 때문에 과천에서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 날도 일이 있어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경아가 집안을 치우지 않은 채 출근을 했는지 내게 전화를 걸어 미리 자수(?)를 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괜찮아. 그리고 새삼스레 왜 그래? 언제 한경아가 뭐 깔끔하게 치우고 살았니?”


  “음, 어째 말씀하시는 게 편안하게만 안 들리네.”


  “편안하게 들어. 내가 너한테 밉보여봤자 뭐가 좋겠냐? 자다가 잠꼬대로 위장한 욕이나 들어야 할 텐데 뭐.”


  “언니!”


  “농담이야, 농담. 저녁에 보자.”


 웃으며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니 투명한 햇살이 시골의 겨울을 감싸고 있었다. 차가워서 더욱 맑은 느낌이 드는 겨울공기. 거기에다 반짝이는 햇빛이 보태어지면 그곳이 어딘들 산뜻하고 새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봄이 우리를 설레게 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까닭은 겨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로 진영을 출발한지 6시간 만에 과천에 도착했다. 경아도 없는 집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아마 엄마와 나 그리고 경아, 우리 세 식구가 부비고 살았던 세월이 누적된 냄새일 것이다.


 과천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열여덟 살 때부터였다. 그곳에서 내 속에 확실한 가치관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실질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한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나간 곳이라 그런지, 가장 오래 산 곳이라 그런지 내게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집이다. 과천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은 엄마의 자식사랑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모성만큼 깊고 진실한 게 있을까 싶다. 아무리 가족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할지라도 이 명제만큼은 언제나 지지를 받을 것이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맹모’가 되기로 한 엄마. 창원에서 우리 세 모녀는 경아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출퇴근하는 게 힘든 거리인데도 굳이 마산으로 옮긴 까닭은 창원보다는 마산이 우리 교육에 좋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했던가. 엄마는 마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는 기필코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마산에서 우리가 이미 중학교 배정을 받았는데도 엄마는 당신의 계획대로 우리를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수 있게 서둘러 이사를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더라.”


 엄마는 우리 자매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가르치고 싶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창동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 동안 회사는 아주 많이 성장했고, 회사의 서울 지역 일을 맡기로 하고 엄마가 과감한 결단을 내리신 거였다. 경아와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명동에 있는 숭의여중이었다.


 우린 학교에 가기 위해 창동역에서 명동역까지 전철을 타고 다녔다. 지방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솔직히 볼 것도 많고 문화적 경험도 훨씬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누리고 즐기기엔 내가 가진 장애가 언제나 문제였다. 처음 얼마간은 새로운 구경을 하느라 정신을 빼놓고 다녔지만 장애인이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때는 장애인을 위한 사회시설과 인식이 더 심하게 부족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적거린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싫었다. 어떤 남학생들은 대놓고 “에이 씨!”라고 큰소리로 불평을 터트리고는 나를 비켜 뛰어 내려가거나 뛰어 올라갔다. 학교에 늦을까봐 뛰고 있는데 빨리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앞에서 얼쩡거리니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창원이나 마산보다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사춘기에 접어든 내가 그들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도 새삼 불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불경을 외거나 좋아하는 책 구절을 암송하거나 하면서 묵묵히 내 팔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라는 느낌은 종종 나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빠트렸다. 그럴 때면 뒤에서 오던 사람을 태우고 막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전철을 보는 순간, 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그런 느낌을 소외감이나 아웃사이더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고 그저 서글픈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면의 소용돌이와는 다르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벽 한쪽에 붙어 서서 아주 천천히 걷거나 난간을 잡고 힘들게 오르내리며 조금이라도 빨리 나만의 공간으로 가기를 애쓸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힘이 들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싫었고 사람들 시선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그때쯤에는 내 동생 경아에게도 미안했다. 아무리 경아가 잡아주고 끌어주어도 난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고 동생까지 나 때문에 길거리나 차 안에서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학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점점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경아와 같은 반이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다른 반이었고 초등학교 때처럼 경아가 내내 나의 보호자 역할을 해줄 수가 없었다. 경아도 경아의 삶이 있었으니까. 아니, 내가 이제 경아를 자꾸 내게서 밀어냈다. 그것이 경아를 위한 일 같았다. 그러면서 나 혼자 속으로 참 많이 울었다.


 중학생이 된 후, 등하교 길엔 내겐 그동안과는 좀 다른 생각을 하고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학교에 갈 때는 그래도 경아와 거의 함께 갔지만 돌아올 때는 혼자 오는 때가 많았는데 그 시간이 내겐 나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게 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초등학교 때처럼 크게 어려운 점이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보다 더 내게 친절했다. 놀리거나 따돌림은 없었고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내가 쌍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또 슬프게 했다. 친구들은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나와 사귀고 깊이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나의 아픔도 초등학교 때와는 달랐다. 경아는 세상의 나이를 먹을수록 나와의 공통분모보다 경아만의 세계를 가지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생겨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청소년 시기 땐 그 무엇보다 친구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기였으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물론 친구들이 나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은 아니다. 내 몸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꾸 제외되는 것이었다. 결국 친구들은 내가 자신들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 역시 마음속으로야 그러한 상황이 안타깝고 슬퍼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티를 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친구들과 세상으로 향하는 시선을 자꾸 내 안으로 돌렸다. 내 처지가 속상할 때일수록 더욱 절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조금 벅찼던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책과 씨름을 했다.


 선생님의 수업 내용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간과 방법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몇 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아가 수업 외 학교 활동으로, 혹은 친구와의 만남으로 저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일이 많아지고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한 방법이 지나놓고 보니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친구들 속에, 나와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상처만 날 뿐이어서 나는 마치 생존본능처럼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효과적이었다. 좌절감이나 소외감으로 아예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당연히 ‘단짝친구’라는 개념이 내겐 없었고 그저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반 친구들과 필요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렇게 또래친구들을 갖지 못하는 대신 내겐 특별한 벗이 있어 외로움과 좌절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독서와 그림이었다.


 친구들과 떠들고 웃는 시간에 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나의 친구들이었고 나의 마음을 다독여 바른 생각을 갖게 하는 길이었다. 그 시절에 읽은 책 중에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이 ‘상록수’와 ‘데미안’이다. 상록수를 읽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데미안을 읽으며 새로 태어나기 위해선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진정한 용기를 내 속에 쌓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하게 된 묵화는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고, 결국 나의 삶의 큰 줄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양화가로 다시 서게 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붓을 잡고 간단한 선이나 도형을 그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절하는 것 못지않게 그리고 또 그리며 매달렸더니 선이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그 선들은 다시 나를 살려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점자 그림에 빠져들어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되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내 속에서 끓고 있는 무엇인가가 빠져나와 제 나름대로 새로운 생명으로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중학시절이 흘러가면서 나는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성숙해가고 있었다.


 외톨이라는 슬픔을 혼자만의 세계에서 치유해나가던 나는 오히려 그 치유를 통해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만들어나갔다. 그 창틀에 턱을 괴고 앉아 친구들이나 세상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그 속에 속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키우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된 고집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고집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에 대한 애정이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 몸을 부끄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기로, 사람들마다 다른 얼굴 모습처럼 그저 생김새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기로, 그리하여 자존감을 가지자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려면 나 먼저 나 자신을 사회와 현실에서 소외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여는 연습을 했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도 울적해 하지 않았다. 1학년 때 체육시간에는 따로 스탠드에 앉아 있거나 교실에 있은 적도 많았지만 2학년부터는 꼬박꼬박 수업에 참여했고 내용도 따라갔다. 체력장 연습도 열심히 했다.

  “경혜야. 2~3개 종목만 해도 된다. 힘들면 무리하지마.”


 체육선생님이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난 다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오래달리기는 차라리 체력이 관건이라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처음에야 꼴찌로 달렸지만 끝까지 같은 속도로 유지하며 8바퀴를 상위 그룹 안에 속한 채 완주할 수 있었다. 절 수행을 통해 다져진 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를 애먹인 것은 제자리멀리뛰기와 던지기 그리고 오래 매달리기였다. 내 딴에는 힘껏 뛴다고 뛰어도 도무지 멀리 뛰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던지기도 마찬가지였다. 팔의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나로서는 특히 힘든 종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방향과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 그만 하라는 신경질적인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이를 앙다물고 듣지 않았다. 그런 정도로 약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래 매달리기의 경우에는 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철봉을 쥘 수가 없어서 잘 할 수가 없었다. 손아귀가 세게 쥐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내 안의 힘이라는 힘은 다 끌어올려 매달려 있으면 “힘내라, 힘!” “한경혜,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체력장 연습이 내게 준 것은 체력향상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였고, 친구들과의 거리가 좁아졌다는 기분 좋은 인식이었다.


 사실 친구들 중에도 체력이 약하거나 심각한 몸치라서 도저히 기록이 안 나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특히 내 경우에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다들 격려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가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지만 곧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차갑지 않다는 것과,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해야 할 때는 자신 있게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심사하시는 선생님들의 호의에 덕을 많이 본 셈이지만 결국 나는 체력장 당일 날, 20점 만점을 받았다. 오래달리기에선 5위로 결승선에 들어오기도 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아도 점수를 받을 수 있지만 당당하게 치르고 싶었고 결과는 좋았다. 내가 만점을 받자 모두 내게 박수를 쳐주었고,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20점 만점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나의 노력을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격려해 준다는 사실이,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날 감격시켰기 때문이다. “그냥 안 해도 된다면 하지 말지…… 보기 힘들게 그리 유별을 떠니? 악착스럽기도 하다.” 이런 말 대신 “와, 한경혜. 너 멋지다!”라는 말을 해주는 친구들의 격려의 박수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절을 통해 내 몸과는 진작 화해하고 있었지만 세상과는 힘들었는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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