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그림자를 벗어나려면/설산스님

2010. 4. 13. 18: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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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그림자 벗어나려면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라


“서울에 살고 있는 1천만 인구 중에 극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서울 평창동 삼각산 정토사에 주석하고 계신 설산 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
대뜸 스님은 이런 물음을 던지셨다.
“현대의 첨단 과학 문명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허상의 그림자에 속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만든 본질은 보지 못하고 허상의 그림자에 속아 살고 있다 그 소립니다.
불교는 이러한 중생의 아픔을 제거하고 해탈의 세계로 이끌어 참 행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은 무엇일까요?
 허상에 속지 않고 자연 그대로, 순리 그대로 생활하는 것이 부처님 세계요 극락입니다.
그렇다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곳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염불은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30여 년 넘게 염불수행에 매진해 온 스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돈과 명예를
좇으며 하루하루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루 24시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자기 무릎이라도 한 번 꼬집어 주십시오.
‘아프다’고 느끼는 그 순간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자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십명왕생(十名往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10번만 부르면
극락에 간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 말의 참뜻은 염불하는 방법만은 알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단 1분 1초라도 다른 생각 말고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그 1초가 바로 극락이며,
1초가 다시 1초를 거듭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염불삼매입니다.
 
여러분들도 염불을 걸으면서도 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으면서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어 스님은 염불의 장점과 공덕을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일단 염불은 밑천이 안들잖아요?(웃음) 또 염불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됩니다. 하지만 염불하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세계에 들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같은 시간에 염불해 보세요.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변하지 않듯, 몸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미타경>에 이런 말이 나와요.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명호를 외우되
하루나 이틀 내지, 혹은 7일간 일심으로 산란하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 임해
아미타불과 여러 성중(聖衆)들이 나타나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염불에는 크나큰 공덕이 있습니다.”
스님에게는 요즘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바로 염불수행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염불을 하려는 불자들은 많은데 가르침을 배울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염불을 기복신앙으로 여기거나 참선보다 낮은 수행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염불정진은 불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면서 불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정토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얼마 전 열반한 청화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염불 수행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설산 스님은 어떻게 염불수행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까?
“14살에 염불왕생극락 발원의 중심도량인 건봉사에 들어가서 사미 생활을 했어요.
그때 강원과 염불방, 참선방이 따로 있었는데 강원에서 경전을 읽다보면
조용한 가운데 ‘쿵’하는 소리가 났어요. 마음이 이 소리를 자꾸 쫓아가요.
그게 바로 염불하는 소리였어요. 이후 염불로 불법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이후 한국전쟁으로 건봉사가 폐사되자 스님은 이곳에 정토사를 세우고
염불수행에 매진했다. 1974년 1만일 염불수행을 서원한 스님은 매일 새벽 4~5시와
오후 6~7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염불 일념에 들었다.
2001년 10월 만일염불정진을 회향한 스님은 이듬해 다시 만일염불 입제에 돌입했다.
건봉사에서 250여 명의 재가불자들과 함께 만일염불정진을 발원한 것이다.
평생을 염불수행에 매진하고 대중들에게 이를 널리 펼치겠다는
스님의 마음이 담긴 발원이다.
스님의 왼쪽 발에는 발톱이 하나 밖에 없다. 발톱이 붙어있어야 할 다른 네 발가락은
스님이 스스로 잘라버렸다. 일제의 학병에 끌려갈 수 없다는 항거의 표시였다.
사람들이 스님의 성치 않은 다리에서 지난 역사의 비애를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60여 년을 절뚝이며 살아왔으니, 오른쪽 다리인들 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제 지팡이와 벽을 의지하지 않고는 걸음을 옮기기 힘들지만
“아직 염불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건강하다”는 것이다.
“늙어서 그런지 낮잠도 많아 졌다”고는 하지만 매일 5시에 일어나 염불로 하루를
여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최근에는 스님이 ‘조선의 아버지’라고 여기는 만해 스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만해 스님에 관한 대부분의 글이 스님의 시에만 초점을 맞춘
것 같다”며 “나는 스님의 일대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
“요즘은 부쩍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만해 스님에 얽힌 이야기들을 쓰느라
더 그렇겠지만 내가 보고 자란 건봉사의 산과 바위와 나무가 자꾸 떠오르는데
그게 그렇게 정겹게 다가올 수가 없어.”
만해 스님 일대기를 쓰는 것 외에 시(詩)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스님이지만,
건봉사가 생각날 때면 읊조린다는 시 한 수를 들려주셨다.

낮달이 걸려 있는 소나무 가지 바위 아래
주리면 열매 따고 풀섶으로 바람 비 가려
옹달샘에 달빛 움켜 마시면 저 멀리
도솔천 별빛이 진주알처럼 흩어진다
연(緣)은 무상(無常)이요, 정(情)은 환멸(幻滅)인데
산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없다오
-스님의 시 ‘산거(山居)’ 전문

“우리는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머무는 이 곳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저는 염불을 하기 때문에 만족합니다.
 염불을 통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곳이 바로 극락이지요.”


북·징 두드리며 하루 세차례 염불
설산 스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세 번, 새벽 5시와 오전 11시 10분,
저녁 6시에 각각 20~40분씩 염불 수행에 매진한다. 스님은 염불을 할 때
번뇌와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북과 징을 이용한다.
전통 염불법에 따라 앉은자리 왼쪽에는 북을 앞에는 징을 놓고 아미타불을 호명한다.
“쇠를 치는 것은 불가에서 지옥문을 여는 것을 상징합니다. 염불을 해서 지옥문을 열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것이지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북을 치는 것은 고통 받는 축생의 육신을
모두 쉬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염불하면 새소리 나면 새소리를 쫓고 바람소리 나면 바람소리를 쫓게 되고
 잠도 쉽게 오는데 그걸 막기 위해서 북과 징을 치는 것입니다.”
스님은 염불할 때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북과 징을 치는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마음이 염불의 전부”라는 스님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관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을 한다. <관무량수불경>에 나오는 극락세계 직관방법인
‘일상관(日想觀, 서쪽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념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염불을 시작하고 끝낼 때는 머리를 조아려 “아미타부처님 예를 드리오니 높으신 부처님
아미타부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극락세계 가도록 인도해 주소서”하고 기도를 올린다.
“언제 어디서나 염불한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염불을 지극히 하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돌도 개울도 만나는 사람도 모두 부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강지연 기자 |

인순이의 뉴욕 '思父曲'

  철마  

   .가수 인순이는 16년 전 아기를 가졌을 때

                   "혹시 아이가

▶인순이는 돌아오자마자

이런 사연을 방송에서 숨김없이 알렸다.

 "마음껏 욕해 달라"고 했다.

그의 원정출산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3년 전 연예인 학력위조 파문 때는 중졸 학력을 고졸로

속여왔다는 게 드러났다.

그는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못 갔다.

나 자신과 팬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지난 몇십년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순이는 1957년 포천에서 태어났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떠나

다시 오지 않았다. 열네살 때까지

가끔 편지를 주고받다 소식이 끊겼다.

 

그런 그에게 작년에 '아버지'라는 노래가 들어왔다.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왔는지/

눈물이 말해준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단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아버지 심정을

노래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노래를 부르다

울컥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인순이는 199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

잔뜩 흥분해 신경성 장염과 위염으로

한 달을 고생했다.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그가 어머니 힘만으로

얼마나 잘 자랐는지 보여줄 기회라고 별렀다.

 

지난주 다시 가진 카네기홀 공연에서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6·25 참전용사 100명을 모셔놓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라고 인사했다.

 

 

 

▶그는 작년에 '군인의 딸' 자격으로

공군대학에 특강을 나가

마지막 한마디로 강의실을 뒤집어놓았다.

"외국에 파병 나가도

책임지지 못할 씨는 뿌리고 오지 마세요.

" 인순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였다.

 

노래 '아버지'도 용기를 내 취입했다.

카네기홀 공연에선

"전쟁통에 나 같은 자식을 두고 떠난 뒤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사는 참전용사들이

이제 짐을 내려놓으면 좋겠다"고 했다.

 

철마  

 

 

아버지를 극복하고 용서와 화해를 건네는

그녀가 당당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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