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간경수행의 의미

2010. 5. 5. 20: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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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간경수헹


1.간경수행의 의미


 1)간경수행의 의미


  간경은 경전을 읽고 듣고 옮겨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루 익힘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마음에서 허물이 생기는 것을 막아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수행법이다. 즉, 간경은 경전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으로만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그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진리를 익혀, 안으로는 끊임없이 마음을 향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행실을 가다듬도록 해야 한다.

  이에 선가구감에서는 “경을 보면서 마음 속을 향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만 권의 글을 모두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을 보면서 마음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어디 이익이 없는 데만 그치겠는가? 필경 사견과 아만을 키우고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마구니가 될 것이다. 육조께서는 법달이 문구 외우는데만 급급하여 헐떡거릴 뿐 번뇌와 망상의 분별심을 쉬지 못함을 보시고 참 독경이란 경의 뜻이 마음 가운데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마음을 밝히어 성품을 보는 것을 보살이라 하였다. 또한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지만,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하 하였다.


마음이 미하면 법화가 굴리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리나니

오래 읽어도 밝히지 못하면

경 뜻과 원수 되리라.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무를 다 안따지면

백우거(일불승) 길이 놀리라.


  수행을 위한 간경을 특히 전경(轉經)이라고 하여 법을 굴린다고 하는데, 경전을 읽고 그 뜻을 마음으로 깨달으면 경을 굴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지식을 쫒아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사구게 하나라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고 몸소 실천하여 깊은 뜻을 스스로 체득하여야 참다운 간경수행이라 할 것이다.


 2)간경수행의 원리


  모든 불교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듯이 간경수행의 목적도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성불하는데 있다. 그러나 진리란 말로써 전해질 수 없거니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언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경전은 일반적인 글이 아니다.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이니 부처님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를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게 언설로 표현한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분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간경수행의 원리이다.


  문 : 많이 듣고 널리 읽으며 배워 익히고 기억해 가지며, 또한 글뜻을 따라 궁구하는 등으로 어찌 견성할 수 있으리오.

  답 : 만일 말을 따라 견해를 내고 글과 함께 알음알이를 지으며, 언전(言詮)에 집착하여 지취(旨趣)를 잊고 교(敎)를 좇아 마음을 미해 손가락과 달을 분간치 못한다면 곧 성품을 보기 어려우려니와, 그렇지 않고 말을 인하여 도를 깨닫고 교를 빌려서 종지(宗旨)를 밝히며, 지혜롭게 언전에 들어 깊이 부처님의 뜻을 탐구한다면 실로 다문(多聞)에 나아가 보장(寶藏)을 이루며 적학(積學)으로써 또한 지혜의 바다를 삼을 것이니, 범부로 좇아 성인에 듦이 모두가 현학(玄學)의 힘을 인함이요, 위태한 곳에 처하여 평안함을 얻음이 다 묘음(妙旨)의 공(功)으로 도운 것이다.

  말이란 도에 드는 계단이요, 교는 사정(邪正)을 가려내는 먹줄이니, 그러므로 <화엄경>에 이르기를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머물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무장애해탈지를 떠나지 말 것이니, 이 무장애해탈지는 일체법여실각(一切法如實覺)을 떠나지 않았으며, 일체법여실각은 무행무생행혜광을 떠나지 않았고, 무행무생행혜광은 선선교결정관찰지(禪善巧決定觀察智)를 떠나지 않았으며, 선선교결정관찰지는 선교다문(善巧多聞)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해서 요지(了知)한다면 정법(正法)을 더욱 배로 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힘을 구할 것이니, 종일을 언제나 법문 듣기를, 법에 기뻐하기를, 법을 즐기기를, 법에 의지하기를, 법에 따르기를, 법을 알기를, 법에 순하기를, 법에 도달하기를, 법에 머물기를, 법을 실행하기를 발원할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불법을 구해서 있는 바 온갖 재물을 아낌이 없고 또한 따로 귀중하고 얻기 어려운 물건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다만 오직 불법을 선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법화경>에서 “만일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명료한 사람에게라면 다문강식(多聞强識)이라도 그를 위해 설할 수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論에 해설하기를 “지혜가 있으나 다문함이 없으면 곧 실상을 알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면 캄캄한 곳에서 눈은 있으되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다문하나 지혜가 없다면 또한 실상을 알지 못하리니, 흡사 밝은 데서 다시 등불까지 있으나 눈이 없어 못보는 것과 같다. 또한 많이 듣기도 하고 겸하여 지혜도 맹리(猛利)하면 곧 가르친 바를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려니와, 그러나 들음도 없고 지혜도 없다면 이를 일러 사람몸이 소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원교(圓敎)의 이품(二品)엔 선관(禪觀)에 겸하여 독송하기를 권하였으니, 이것은 위(位)에 거하여 물러나지 않으면 비로소 듣는 법에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듣는다면 관력(觀力)을 돕게 되고 바로 배우면 종지(宗旨)의 공(功)을 이루는 것인데, 일부러 소나 양 같은 눈을 지어서 방향을 가리지 못하고 또한 어리석고 고지식한 마음에 처하여 숙맥(菽麥)을 분간치 못해서야 되겠는가.<만선동귀집, 제2장>


  간경수행을 통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그 핵심은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경전을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대하느냐 부처님이 직접 나에게 설법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경전을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경전을 보는 것이 오히려 아만을 쌓고 무수한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또하나의 장애가 될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한말씀 한말씀을 허투로 듣지 않으며 언제나 마음으로 잊지 않고 생각하여 몸으로 익히는 중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긴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가닥 진실한 의문을 가슴에 담고 몸과 입과 생각으로 언제나 오로지 하다보면 문득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깨달아 가다보면 드디어 모든 이치가 밝아지고 번뇌업장이 눈 녹듯 사라지고 밝은 지혜가 솟아날 것이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통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아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일시에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간경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원리이다.


 3)간경의 필요성


  이와같이 간경수행을 통해 본성을 찾는 길이 분명하니 간경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선가에서 불립문자라 하여 교를 배우는 것을 꺼리고 경전마저 멀리하니 그것은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결과로써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가는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에 갖히지 말라는 것이지 문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 부처님과 만나서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니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이 있다면 보는 자가 지혜로써 궁구하지 아니하고 생각으로 분별하고 지식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이니,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드는 것과 같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겠거니와 더구나 경전은 부처님의 현신일진데 어찌 그길을 통하지 않고 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간경의 필요성과 바른 태도를 간명하게 밝히신 죽창수필의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이 글은 계율의 부흥과 선정일치를 강조하신 명대의 주굉스님(1535~1615)이 말년에 후학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공부하는 자에게 아주 요긴한 말씀들이다.


  나도 소시에는 선비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을 보고, 선입견과 경솔한 판단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그 후 우연히 계단(戒壇)과 강당(講堂)에서 몇 권의 경을 구하여 읽어 보고는 비로소 크게 놀라며, ‘이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들 거의 인생을 허송할 뻔하였다’하고 생각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눈에 스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 무수하다. 실로 보배산을 눈앞에 두고도 찾아나서지 않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비록 읽기는 하지만 말만을 따라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자신의 문장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데 불과하며,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그 이치를 궁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 보배산을 찾아 나서기는 했으나, 그 보배를 찾아 취하지 않는 자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비록 토론하고 강연하기는 하지만, 또한 글자나 풀이하고 문장을 해석하면서 서로 아만을 내세우는데 불과하여,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잠깐도 진실하게 수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보배를 취하여 손에 가지고 놀거나 감상하며, 혹은 품 속에 넣고 옷 소매 속에 간직했다 도로 내버리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식전(識田)에 물들면 마침내 道種을 이루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불경을 불가불 읽어야 한다.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는

 

  어떤 참선에 대하여 자부하는 자가

“달마는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 견성하기만 하면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염불을 자부하는 자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을 만나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경전이 필요하랴”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진정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굳이 더 논할 일이 아니거니와, 실제 얻은 것이 없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런 일들은 대개 자신의 교리에 통달하지 못한 허물을 숨기려 하는 자들일 것이다.

  나도 평소 염불을 숭상해 왔으나, 애써 사람들에게 경전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염불의 가르침이 어찌 저절로 온 것이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중생들이 어떻게 10만억 찰 밖에 아미타불이 계신 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참선하는 이들은 교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핑계하고 있으나, 교를 여의고 참구하는 것은 삿된 因이요, 교를 버리고 깨닫는 것은 삿된 견해임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대가 참구하여 깨달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경교로써 인증해야 할 것이요, 교와 더불어 합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두 邪見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육경과 사서로써 표준을 삼아야 하고, 불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삼장 십이부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경전이 아니라면 어떻게 불법을 만날 수 있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경전을 멀리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낱 미망을 벗어버리지 못한 범부중생으로써 부처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늘 경전을 보고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몸과 마음에 허물이 생기지 않고 불법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