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래헌 일기/법정스님

2010. 5. 11. 19: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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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래헌 일기 법정 스님이 30대에 쓴 시 다래헌 일기 연일 아침안개 하오의 숲에서는 마른 바람 소리
              눈부신 하늘을 동화책으로 가리다 덩굴에서 꽃씨가 튀긴다 비틀거리는 해바라기 물든 잎에 취했는가 쥐가 쓸다만 맥고모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다 법당 쪽에서 은은한 요령 소리 맑은 날에 낙엽이 또 한 잎 지고 있다 나무들은 내려다보리라 허공에 팔던시선으로 엷어진 제 그림자를 창호에 번지는 찬 그늘 백자 과반에서 가을이 익는다 화선지를 펼쳐 전각에 인주를 묻히다
              이슬이 내린 청결한 뜰 마른 바람 소리 아침 안개
                  1969년 11월9일자 '대한불교'에 실린 '다래헌 일지'는 법정 스님이 동국역경원 역경사업에 참여할 때 봉은사 다래헌에서 쓴 것으로 추정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 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꽃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감상>

                            김용택은『섬진강』연작을 통해 순수서정과

                            사회 역사적 분노를 결합할 수 있는 시를

                            수일하게 보여준 시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바로 그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이 행복하게

                            조우한 모습을 보여주며 아울러 그의 많은 시에서 드러나는

                            시의 평면성을 극복해낸다.
                            지금 시인은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있는 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는 아마 이별의 서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 그 앞에는 풀잎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서 햇살 속에 빛난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고,

                            그 까닭에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의 흰

                            이마도 서럽다. 하지만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그 꽃은 겨울의 삭풍한설에 찢긴 자리에서 피어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고통 속에서

                            피어나고 그 고통은 또 꽃처럼 천천히 피어난다.

                            비록 오늘 고통스럽지만 몽땅 산 뒤에 있는

                            그리운 것들을 다시 그리워하다 보면 뒤로 오는

                            다정한 여인처럼 손에 닿지 못하는 것들이

                             꽃들이 되어서 돌아오리라.

                            그렇게 한 사람을 위로하지만 사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은 그런 내면의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시인 자신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 사람을 거기에 세웠을 뿐이지 실상은

                            시인 자신의 내면이 형상을 입은 경우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