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사람이 모두 부처님이다.
나를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첫 질문을 던집니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기십니까?"
이는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을 어떻게 섬기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인데 대답은 모두 엉뚱한 쪽으로 향합니다.
이어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집니다.
"예불은 어떻게 합니까?"
이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라는 부처님 앞에서
자식된 도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하는 질문인데,
이 또한 바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부처님을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집이 바로 법당이고 내 가족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먼데서 찾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가장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내가 부처님입니다.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내 곁의 사람이 모두 부처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처님이요,
우리 어머니가 부처님입니다.
내 남편이 부처님이요,
내 아내가 부처님입니다.
내 아들 딸이 부처님입니다.
먼데서 부처님을 찾지 마십시오.
불교는 살아나는 것을 배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죽는 것을 배우는 종교입니다.
'나'가 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입니다.
집집마다 '나' 때문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 때문에 내외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부모자식 사이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여기에 '나'가 죽어버리고
우리 집이라고 하는 '나'가 살아나야 합니다.
작은 나인 소아(小我)가 죽으면서
우리 가족이라고 하는 보다 큰 '나'가 살아나야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대아(大我)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그마한 '나'에 얽혀있는 욕심때문에
큰 것을 다 죽여 버립니다.
큰 것을 살리고 작은 것을 죽이는 것이 불교이지만,
욕심을 충족시키고 이 작은 '나'를
붙들기 위해 큰 것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과보를 만들고,
한없는 복을 털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부처입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것을 주춧돌로 삼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나'의 주춧돌로 삼고 있습니다.
빛깔과 모양과 소리와 냄새를 '나'의 주춧돌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산이 빗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 '나'를 죽이고,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을
주춧돌로 삼아 계산을 하면 그 세계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므로 모순이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처님의 세계를 벗어나면 전부가 모순입니다.
불교에는 일체의 모든 법의 이치를 그 성질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삼성(三性)'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입니다.
이리저리 나름대로 헤아리고 억측을 부려
집착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으로,
범부의 어리석고 허망한 소견으로
일체의 사물에 대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 하는 착각입니다.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다른 인연에 의하여 생긴 만유(萬有)를 말합니다.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현상의 본체를 일컫는 것으로 원만,
성취, 진실한 진여(眞如)를 말합니다.
곧 원만한 진리인 원성실성이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생기는 모습이 의타기성이요,
이 의타기성을 착각해서 잘못 풀이하는 것이 변계소집성입니다.
다시 말해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원성실성의 원점이요,
'나'라는 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생긴 의타기성인데도,
자꾸만 이 의타기의 '나'를
원점으로 삼을 때 변계소집성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짚이라고 하는 원점이
인연의 힘에 의해 이루러진 것이 새끼입니다.
이 새끼를 언뜻 잘못보고 '앗! 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변계소집입니다.
그런데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새끼를 보고 뱀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변계소집의 현상입니다.
새끼를 보고서 "저것 새끼요.
원점은 짚이야." 이렇게 이해하면 탈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끼줄을 보고 "앗,
뱀이다라고 할 때부터는 계산이 전부 빗나갑니다.
'뱀한테 물리면 큰일 난다.
저걸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고...'
이렇게 새끼를 뱀으로 착각하고
나름대로 계산을 전개시키면 원점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몸을 '나'라고 할 때 계산은 모두 빗나갑니다.
그러므로 이 몸을 절대 '나'라고 붙들지 마십시오.
이 몸은 이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임을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은
새끼를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새끼를 뱀이라고 착각을 할 때부터 '물리면 큰일 난다.
물리면 죽는다.
몽둥이를 가져다가 때려 죽여야 한다.
어디로 집어던져야 한다....'는
등의 갖가지 망상이 다 일어나듯이,
이 몸을 '나'라고
할 때부터 모든 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삶이 전부 잘못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을 잘 생각하여
지금 모인 인연을 나쁜 쪽으로 끌고가지 마십시오.
그럼 어떻게 하여야 변계소집 쪽이 아닌
원성실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 결국 떠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버릇이 들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따질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붙들고 늘어지는 버릇만 자꾸 들여서,
이 몸을 '내다'하며 붙들고,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남편, 내 부인, 내 자식'이라 하면서
붙들고만 살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놓아버리면 의지할 데가 없는 것처럼 불안해하고,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죽이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순하게 풀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오계(五戒)를 주춧돌로 삼아
'나'를 이기고 우리 집을 유지하고 사회를 유지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불교를 믿는 불자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이라는 법당에서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 집이 바로 법당이요, 내 가족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 앞에 삼배를 하면서 축원을 하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모든 죄를 참회 드립니다. 용서 하십시오.
당신이 건강하시고 당신이
바라고 원하는 일을 모두 성취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마음에 맺힘이 풀어지면서 집안의 운이 살아나고,
집안으로 복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정성껏 하는 이 절이야말로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월간 [법공양] 10월호에서 우룡스님-